444화 데스웜(Deathworm) (4)
<스투웜> -등급: A+ / 특성: 벌레, 땅, 가뭄, 앙버팀, 착굴(鑿掘), 지진, 불완전변태
-서식지: 만마전(萬魔殿), 구더기 언덕
-크기: 70m.
-샌드웜이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은 결과 생겨난 변이체.
육체의 힘은 맨틀까지 뚫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으나 전의 그 고고했던 정신체계는 무너진 지 오래이다.
스투웜.
샌드웜이 극한의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로 인해 변이한 개체.
[갸오-오오오오!]
놈은 마몬의 기운에 오염되어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뿌직! …뿌지지지직!
샌드웜이 스투웜으로 변태하는 과정에서 가지게 된 불완전변태 특성 탓일까?
스투웜의 외형은 점점 변하고 있었다.
윤솔도 드레이크도 입을 딱 벌리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서, 설마?”
“진화하는 것인가!”
모두의 입이 딱 벌어질 규모의 대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샌드웜이 스투웜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정신계 공격의 저항력이 크게 떨어진 것이 패인이로군.”
내 말 그대로다.
샌드웜은 스투웜으로 변하며 크게 파워업했지만 그만큼 정신력이 약해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끔찍한 것이었다.
<데스웜> -등급: S / 특성: 벌레, 땅, 가뭄, 앙버팀, 착굴(鑿掘), 지진, 예지, 무저갱, 와류
-서식지: ?
-크기: 100m.
-육체는 웜 형 몬스터의 궁극(窮極)에 이르렀으나 정신은 육체의 진화를 미처 따라잡지 못했다.
무너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은 채 전 세계의 지하를 꿰뚫어 달린다.
……오잉!? 샌드웜의 상태가……!
지금까지 봐 왔던 몬스터들 중 가장 거대한 개체가 출몰했다.
데스웜!
신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 괴물은 만마전의 주인마냥 거체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하하하. 길들이지는 못하더라도 폭주시킬 수는 있지.]
마몬은 껄껄 웃으며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가질 수 없다면 부숴 버리겠다는 심산 같았다.
놈의 의도대로, 데스웜은 우리가 있는 쪽을 향해서 적개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놈은 투우사에게 달려들기 전 황소처럼 환대의 비늘을 세워 천천히 땅을 긁었다.
콰콰콰쾅!
데스웜은 몸을 사납게 뒤틀어 사방을 진동시켰다.
금화의 산들이 풀썩풀썩 무너져 내린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내부의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지하의 괴물.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쉬지 않고 굴을 팔 수 있는 힘과 맨틀 층에서도 문제없이 버텨내는 육체.
땅속에 있을 때는 감히 모든 지하종의 왕이라 칭할 자격이 있는 존재가 바로 데스웜이다.
…그리고 지금 그런 존재가 그 흉악한 적의를 온통 우리에게만 쏟고 있었다.
“…젠장, 거기다 무저갱 특성이 붙었군.”
나는 데스웜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드레이크가 그런 나에게 고개를 갸웃해 보인다.
“어진, 무저갱 특성이 뭔데 그러나?”
“크라켄의 심해 특성과 같은 거야. 지하 깊은 곳에 있을 때는 위험등급이 한 단계 상승하는 특성이지.”
내 말을 들은 윤솔과 드레이크는 해쓱해진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현재 데스웜의 위험 등급은 거의 S+등급에 준한다!
이는 만마전 외성에서 보았던 데모고르곤과 발록을 합친 것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등급이 아니던가!
윤솔도 드레이크도 난감한 표정이다.
“으아, S+등급이라니! 아무리 고정 S+등급이 아니라 제한적 S+등급이라도… 이건 너무하잖아!”
“대격변 전 문고리 3인방이랑 비슷하군. 심해의 크라켄이나 여덟 다리 대왕 큘레키움 폴다운 모드, 보카사 배드엔딩 나이트메어 폼 모드의 위험등급도 S+정도였지.”
그중 심해 크라켄의 힘만은 제대로 느껴 본 적이 없다.
우리가 크라켄을 만난 장소는 블루홀 안이 아니라 밖이었기 때문에 놈의 ‘심해’ 특성이 완전히 발휘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S+등급의 힘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더군다나 지금 데스웜은 ‘무저갱’ 특성의 힘을 완전히 발휘하고 있지 않은가!
“…으음. 모든 힘을 100% 개화한 무저갱 데스웜은 대심해 크라켄과도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
그 말인즉슨…상대하기 무척이나 까다로운 적이라는 뜻이다.
나는 침음성을 삼키며 눈앞의 거대한 괴물과 마주했다.
[오-오오오오오!]
데스웜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우리를 향해 돌진했다.
“어진! 내가 엄호한다!”
드레이크가 앞으로 나섰다.
데스웜 같은 이동패턴을 가진 몬스터에게는 드레이크의 마름쇠가 효과적이다.
푸푸푸푸푹!
땅에 뾰족한 마름쇠들이 쫙 깔렸다.
전부 다 불카노스로 만들어진 강력한 함정들이다.
하지만 내가 알기론 지하에서 데스웜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콰콰콰콰쾅!
데스웜은 드레이크의 마름쇠들을 그대로 밀어 버리며 전진했다.
…끼깅! …끼깅! 꽈드드득!
마름쇠들은 데스웜의 육중한 바디에 눌려 납작한 불카노스 철판으로 돌아가거나 주변을 향해 놀라운 속도로 튕겨나갔다.
명장 아르파공이 그토록 망치질을 해댔음에도 불구하고 쌀알만큼도 변형되지 않던 불카노스 금속마저 납작해질 정도로 샌드웜의 힘은 굉장한 것이다.
“…크윽!”
“솔아, 힐!”
바위와 흙 파편, 도로 되튕겨나온 마름쇠에 맞아 HP가 깎인 나와 드레이크에게 윤솔이 힐 마법을 걸어주었다.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외친다.
“으아아아! 어둠 특성이 없어서 그런가 신성불가침 특성도 안 먹혀!”
데스웜은 그야말로 공방일체의 완벽한 바디를 가지고 있었다.
드레이크가 필사적으로 쏘아 보내는 불카노스 화살촉도 그저 제한적인 상처만을 남길 뿐이다.
그때.
[……오오오오!]
데스웜의 공격이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드레이크가 외쳤다.
“어진, 데스웜이 지친 것 같다!”
아무리 광기에 휩싸인 상태라지만 저런 격렬한 움직임을 계속해서 선보이는 것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하지만.
“그럴 리가.”
무저갱 특성까지 발현된 데스웜은 결코 지치는 법이 없다.
저것은 단지 하나.
[우-우우우……!]
마지막 남은 충왕종의 고고한 이성이 마몬에게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어진아, 공격해야 하는 거 아냐?”
“아니, 하려면 처음에 했어야지. 지금은 늦었어.”
윤솔의 말에 대답하자마자 데스웜은 갑자기 거체를 일으켜 꼿꼿이 세웠다.
역시 내 예상대로. 지금까지는 맛보기에 불과했다.
진짜…진짜가 온다!
[…오.]
데스웜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하늘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자세를 낮췄다.
윤솔과 드레이크를 향해 충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들 조심해. 정신을 완전히 잠식당했어. 이제부터는 본래의 공격패턴이 추가될 거야.”
“…음? 지금의 본래의 공격패턴이 아닌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주먹과 생각하며 휘두른 주먹은 확연히 다른 법이지. 저길 봐. 온다!”
콰콰콰쾅!
데스웜이 만들어 내는 지진파가 모두를 덮쳐온다.
[오-오오오오오!]
천지를 흔드는 듯한 포효는 일순간 시야를 흐려 버릴 정도의 강력함을 지니고 있었다.
저레벨 플레이어였다면 이 피어 효과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딱딱하게 굳어 쓰러졌을지 모른다.
“뒤로 물러나!”
나는 갸우뚱하고 있는 윤솔과 드레이크의 허리를 잡고 뒤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나는 친구들을 껴안고 허공으로 펄쩍 뛰어올라 땅의 진동을 피해 버렸다.
“자, 두 번 말할 시간 없으니 잘 듣고 바로바로 이해해야 해. 지금부터 데스웜을 상대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
나는 급박한 와중에도 윤솔과 드레이크에게 열강을 펼쳤다.
우지지지직!
눈앞으로 미친 듯이 달려오는 데스웜을 돌아본 나는 이내 놈의 공략 패턴을 알려 주었다.
“내가 쭉 살펴보니 데스웜의 이동 패턴은 실로 단순해.”
사실 쭉 살펴봤다기보다는 미래에 나올 공략을 미리 외우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데스웜의 이동 및 공격 패턴은 1970년대에 나온 고전 게임인 ‘뱀 게임(Snake game)’의 형식 그대로야. 사실 더 설명할 필요도 없지.”
뱀 게임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아주 단순한 규칙을 가진 게임이다.
화면에 있는 길쭉한 뱀은 자동으로 앞으로 가게끔 설정되어 있고 플레이어는 이 뱀을 상하좌우로 움직여 화면에 랜덤으로 생성되는 사과를 먹어야 한다.
사과를 먹는 것에 성공하면 뱀은 조금씩 조금씩 길어지고 사용자는 이 뱀을 조종해서 계속해서 다음 사과를 먹되 뱀의 머리가 화면 바깥으로 나가거나 혹은 자신의 몸에 닿으면 죽게 된다.
사과를 먹으면 먹을수록 뱀이 길어져 결국 화면을 거의 뒤덮다시피 하게 되고 마치 미로게임처럼 변해 버리기도 한다.
때문에 뱀을 화면 가장자리에서부터 잘 컨트롤해서 머리가 빠져나갈 공간을 확보해 가며 중심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공략 포인트.
아주 단순하고 쉬운 게임이지만 깊게 파고들면 정말 어렵고 끝이 없는 무시무시한 게임이기도 하다.
“또 온다! 피해!”
나는 친구들을 데리고 데스웜의 꼬리 부근에 서 있다가 잽싸게 몸을 날려 데스웜의 머리를 피했다.
그러자.
…콰쾅!
자기 몸통에 머리를 부딪친 데스웜은 크게 괴로워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오-오오오오오!]
놈의 커다란 입이 닿은 곳에는 커다란 이빨 자국이 남았다.
마치 뾰족뾰족한 접촉면을 가진 단지로 부황이라도 뜬 듯한 모양새.
“꺄악! 만세! 데미지가 들어갔다!”
“오오! 그것도 엄청나게 들어갔군!”
윤솔과 드레이크가 환호한다.
이제 데스웜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이 잡힌 듯했다.
…하지만 한 가지의 문제가 더 있었다.
“어진아! 근데 데스웜의 HP가 너무 높아서 이런 식으로 잡으려면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그사이에 데모고르곤 하고 발록이 나타나지 않을까?”
“더군다나 위치도 문제인 것 같다! 뱀 게임이라면 뱀을 가장자리에서부터 컨트롤해야 하는데 우리는 만마전 중앙에서부터 데스웜에게 쫓기고 있잖아! 이렇게 되면 점점 중심부에 있는 마몬에게서 멀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벽에 닿아 데스웜에게 짓눌려 죽게 될지도 모른다!”
심지어 데스웜이 마냥 얌전하게 우리를 뒤쫓는 것도 아니다.
뱀 게임의 뱀은 사과를 공격하지 않지만 데스웜은 우리를 향해 계속해서 공격을 날려 오고 있었다.
…콰콰콰콰쾅!
이 묵직한 지진파가 바로 그것이다!
데스웜이 한번 몸을 뒤틀 때마다 지축이 뒤흔들리며 우리의 뜀박질을 방해한다.
그뿐만 아니라 땅에서부터 발을 통해 타올라 오는 엄청난 지진 데미지 때문에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바로 리타이어 당할 위험이 있었다.
총체적 난국!
데스웜은 그만큼이나 위협적인 중간 보스였다.
…하지만.
언제나 방법은 있는 법이다.
쿠르륵!
나는 드레이크의 화살 하나를 넘겨받아 화살촉에 불을 붙였다.
촉이 시뻘겋게 달궈진 불화살 한 대가 만들어졌다.
나는 그것을 다시 드레이크에게 내밀었다.
“……?”
“……?”
의아한 표정을 짓는 윤솔과 드레이크에게 나는 한번 씩 웃어 보였다.
“지금부터 낙타의 복수를 해 주자고.”
레이드 직전, 미리 깔아 놓았던 떡밥을 회수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