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40화 (440/1,000)
  • 441화 데스웜(Deathworm) (1)

    ‘웜(Worm)’

    [명사]

    1. (땅 속에 사는) 벌레.

    2. (사람동물 체내의) 기생충.

    3. 애벌레, 유충

    하지만 이 단어는 1988년 11월 이후 다른 뜻도 가지게 되었다.

    네트워크를 통해 감염되며 사용자의 컴퓨터 안에서 증식해 과부하를 일으키는 악성 프로그램을 뜻하는 신조어.

    심지어 다른 사용자의 컴퓨터로 메일을 통해 스스로 이동하는 등 엄청나게 빠른 확산 속도를 가지고 있으며 단시간 내에 네트워크에 치명적인 구멍을 뚫어놓는다.

    *       *       *

    [오-오오오오오오!]

    거대한 웜(Worm) 한 마리가 지하감옥 안의 좁은 방 안에 갇힌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샌드웜.

    대격변 이전에는 필드보스들의 왕으로 군림하던 지하종 몬스터.

    심지어 가혹한 사막이나 어비스 터미널에서 만났던 개체보다도 훨씬 더 몸집이 거대하다.

    두텁고 거친 살가죽 표면에서는 산성 점액이 송글송글 배어나온다.

    근육으로 꽉 찬 통짜형 바디가 한번 날뛸 때마다 지하감옥 전체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드웜은 지하감옥에 갇혀 나갈 수 없다.

    불카노스 사슬!

    샌드웜의 전신을 칭칭 휘감고 있는 것은 바로 파괴불가나 다름없는 단단하고 질긴 사슬이었다.

    지하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지하종 몬스터가 지하감옥에 갇혀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쾅! …콰콰쾅! …쿠르르릉!

    샌드웜이 전신에서 지진파를 뿜어내며 날뛴다.

    몸길이 수십 미터나 되는 거대한 몬스터가 좁은 공간에 갇혀 날뛰는 모습은 엄청나게 박진감 넘치는 것이어서 우리는 잠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이는 드레이크였다.

    “아니, 왜 지하종 몬스터를 지하에 가둬 놨지?”

    “그야, 지하가 아니면 금세 말라죽으니까. 그리고 몸에 흙이 닿아 있지 않아도 스트레스로 금방 죽어.”

    나는 샌드웜의 습성을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의외로 흙이 없으면 한없이 연약해지는 것이 바로 지하종 몬스터이다.

    그리고 샌드웜은 그중에서도 흙의 영향을 꽤나 심하게 받는 편이었다.

    윤솔 역시도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아니, 샌드웜의 서식지 설명을 보면 여기에서 등장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는데. 설정오류인가?”

    “맞아. 크기를 보아하니 이 샌드웜은 원래 가혹한 사막에 살던 놈이야. 그것을 마몬이 여기까지 억지로 잡아온 것이지.”

    “…샌드웜을? 굳이? 왜?”

    윤솔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대답 전에 그녀가 두르고 있는 샌드웜 가죽 망토를 한번 툭 건드렸다.

    -<샌드웜의 가죽> 망토 / A+

    샌드웜은 충왕족(蟲王族) 몬스터 중 가장 크고 강하며 또한 고고한 존재이다.

    여지껏 수많은 세력들이 이 거대한 존재를 붙잡아 전술적으로 이용하려 하였으나 단 한 번도 성공한 사례가 없다.

    -방어력 +500

    -특성 ‘흙장난’ 사용 가능(특수)

    -특성 ‘앙버팀’ 사용 가능(특수)

    망토의 설명을 보면 재미있는 설정 하나가 있다.

    ‘여지껏 수많은 세력들이 샌드웜을 붙잡아 전술적으로 이용하려 하였으나 단 한 번도 성공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다.

    “마몬은 지하광물을 다스리는 악마야. 그리고 무저갱 속에서 대규모의 공사를 하고 있지. 아마 샌드웜을 길들일 수 있다면 공사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지하의 패권을 노리는 군주라면 한번쯤 해 보았을 상상이다.

    하루에 수만 킬로미터의 땅굴을 만들고 다니는 샌드웜의 습성을 잘만 이용한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지하 세력을 불릴 수가 있을 것이니.

    (그리고 나 역시도 이와 비슷한 계획을 꿈꾸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샌드웜은 설정 상 길들일 수 없는 존재.

    고로 여기에 있는 이 샌드웜은 계속 여기에 잡혀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갸-오오오오오!]

    샌드웜은 불카노스 사슬에 붙잡힌 채 계속해서 몸을 꿈틀거린다.

    머리로 벽을 들이받고 몸으로 철창을 치고 꼬리로 천장과 바닥을 번갈아 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샌드웜의 몸만 피투성이가 될 뿐, 지하를 향한 야성과 갈망은 완벽하게 봉인당한 채 갇혀 있을 뿐이다.

    “이 거대 벌레가 가엾어 보이기는 처음이군.”

    드레이크는 새삼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샌드웜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면 저 거대 몬스터에게는 지금껏 늘 쫓기기만 했다.

    가혹한 사막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척살령을 벗어나기 위해 이용할 때, 그리고 어비스 터미널에서 금은동 자매와 싸울 때…….

    샌드웜은 늘 나를 쫓아오는 입장이었다.

    위험등급 A+에 빛나는 전투력과 거대한 덩치, 위압감 넘치는 외모.

    나를 도망치게 만들 자격이 있는, 실로 까다로운 보스 몬스터였지.

    드레이크와 나는 저 밑의 독방에서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샌드웜을 보며 혀를 찼다.

    “그렇게 강력하던 녀석이 이렇게 풀 죽어 있다니. 안타깝군.”

    “그러게. 꼭 가녀린 미소녀처럼 느껴질 정도야.”

    “……?”

    물론 윤솔은 전혀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뭐 어쨌거나.

    …쾅쾅쾅쾅쾅쾅쾅쾅쾅!

    샌드웜은 지금 이 순간에도 미친 듯이 날뛰고 있다.

    피와 살점을 튀기며 미친 듯이 불카노스 사슬과 벽을 들이받는 샌드웜.

    그 탓에 두꺼운 가죽이 사슬에 긁혀 넝마처럼 너덜거렸고 그 안쪽의 부드러운 살점이 전부 손상되고 있었다.

    입 안에 빼곡하게 돋아나 있던 날카로운 이빨들도 거의 대부분 마모되거나 빠져 버렸다.

    “더 늦기 전에 손을 써야지.”

    나는 잽싸게 샌드웜의 독방으로 달려가 사슬이 휘감겨 있는 연결고리들을 풀었다.

    사슬은 불카노스로 만들어졌더라도 그것들을 벽에 고정하고 있는 걸쇠들은 무쇠였기에 파괴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드레이크 역시 화살촉을 불카노스로 만들지 않았던가.

    나와 드레이크는 샌드웜의 난동을 피해 조심스럽게 움직여 끝에 있는 사슬들부터 공략했다.

    “2시 방향. 쇠고리.”

    “라져.”

    “다음은 6시 방향 쇠고리.”

    “오케이.”

    나는 드레이크에게 오더를 내림과 동시에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쇠고리들을 착착 제거해 나간다.

    여차 잘못해서 출렁이는 사슬이나 샌드웜의 체액에 데미지를 입어도 윤솔이 바로 힐을 걸어 주니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이윽고.

    …투둑! …파캉! …땅!

    요란한 굉음과 함께, 사슬이 풀려나가며 샌드웜이 자유를 얻었다.

    콰쾅! 우지지직!

    샌드웜은 머리를 휘둘러 불카노스 사슬이 그물처럼 둘러져 있는 방 벽을 들이받았다.

    방 전체가 사납게 요동치며 벽에 거대한 핏자국이 생겨났다.

    [오-오오오오오!]

    샌드웜은 포효를 내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이미 사슬에 긁혀 너무 많은 잔상처를 입은 탓인가 파괴력은 예전만 못하다.

    그때.

    “샌드웜아, 밥먹자, 구구구구구~”

    나는 샌드웜이 기운을 차릴 수 있게 선물을 내밀었다.

    그것은 우리가 타고 왔던 네 마리의 낙타였다.

    기본적으로 낙타의 피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샌드웜이 아니던가?

    꿀꺽- 꿀꺽- 꿀꺽- 꿀꺽-

    샌드웜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낙타 네 마리를 먹어치웠다.

    “……낙타가 불쌍해.”

    “솔. 게임 속 탈것에 연민을 느낄 것이면 현실의 불우한 이웃들에게 먼저…….”

    “아오! 나는 무슨 말도 못해요!?”

    “아임 솔이…….”

    그새 많이 친해진 윤솔과 드레이크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나는 샌드웜의 식사를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우드득! …우득! …뿌드득! …뿌직!

    이 소리는 낙타를 머금고 있는 샌드웜의 입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다.

    샌드웜의 몸 곳곳에서 나는 소리!

    이내, 샌드웜의 두터운 가죽이 찢어지며 그 안에서 물렁한 살점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물렁한 살점은 공기와 접촉하는 즉시 딱딱하게 굳는다.

    …지독한 허기와 고통 끝에 단비와도 같은 낙타 피를 만나서일까?

    샌드웜은 지금 허물을 벗고 있었던 것이다!

    <스투웜> -등급: A+ / 특성: 벌레, 땅, 가뭄, 앙버팀, 착굴(鑿掘), 지진, 불완전변태

    -서식지: 만마전(萬魔殿), 구더기 언덕

    -크기: 70m.

    -샌드웜이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은 결과 생겨난 변이체.

    맨틀까지 뚫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육체의 힘은 강해졌으나 전의 그 고고한 정신체계는 무너진 지 오래이다.

    스투웜. 샌드웜의 아종(亞種).

    다른 종으로 독립할 만큼 다르지는 않지만 변종으로 치기에는 서로 다른 점이 많고 서식지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분명 개체값은 크게 올라갔지만 상위종으로 진화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호오. 이건 나도 처음 보는 몬스터인데.”

    나는 샌드웜의 새로운 모습에 감탄하며 스크린샷과 동영상을 찍었다.

    지금껏 샌드웜의 상위 진화형태를 다른 몬스터로 알고 있었는데…아무래도 그 사이에 스투웜이라는 몬스터 단계가 하나 끼어 있었던 모양.

    몬스터 진화 체계 상의 잃어버린 부분, 멸실환(Missing Link) 하나를 찾은 느낌이라 뿌듯했다.

    이것은 회귀 전의 세상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희귀정보가 아니던가!

    앞으로 15년간 밝혀지지 않을 샌드웜의 진화과정이 나에 의해 처음으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뒤로 물러났다.

    아니나 다를까, 스투웜으로 변이한 샌드웜은 전신에 난 딱딱한 비늘을 이용해 독방을 탈출했고 이내 지하감옥의 복도 중앙을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오-오오오오오!]

    스투웜은 마치 무엇엔가 홀린 것처럼 수직굴을 뚫으며 아래로 내려간다.

    변이 후 땅을 파야겠다는 본능만이 남은 듯하다.

    ‘역시 백도어에는 웜(worm) 악성코드가 효과적이지.’

    나는 감옥 복도 중앙에 뻥 뚫린 스트웜의 굴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2차 백도어 시작이다.”

    마몬이 있는 만마전으로 바로 직진.

    네비게이션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쉽고 빠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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