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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439화 (439/1,000)
  • 440화 바로 잡기 (5)

    드르륵… 드르르륵… 쿵!

    목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바깥의 동태를 살피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뭐냐 이 커다란 것은? 말?]

    [용 놈들이 보낸 함정일지도 몰라!]

    [수상하니 그냥 부숴 버려라!]

    [불에 태워 버리자고! 그게 깔끔해!]

    악마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목마의 몸이 연달아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악마들이 목마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용없지.’

    드워프 명장 아르파공의 수제자인 벨럿이 직접 만든 목마이다.

    아무리 빠르게 축조한 것이라지만 그 견고함은 일반적인 대장장이가 만든 것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

    심지어 부진목 재질이라서 불에 타지도 않는다.

    악마들은 한참 동안이나 목마를 향해 공격을 퍼붓다가 탈진했는지 고래고래 고함쳤다.

    [대체 왜 안 부서지는 거야!]

    [그나저나, 잘 보니 꽤 멋진 조형물 같기도 한데. 부수기는 좀 아깝지 않아?]

    [그래, 어차피 그냥 이대로 두고 갈 수도 없잖아? 성 안에 두어도 좋지 않겠어?]

    [무게도 또 제법 가볍단 말이지. 가져가서 두 대왕님께 진상하자.]

    내 예상대로 악마들은 목마를 전리품처럼 취급하기 시작했다.

    드르르륵…

    목마는 천천히 비탈길을 내려간다.

    밖을 볼 수는 없지만 분명 만마전 외성으로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는 견고한 성벽.

    S급 몬스터 두 마리가 지키고 있는 마지노선을 우리는 이토록 쉽게 넘어 버렸다.

    역시 인생은 백도어다.

    *       *       *

    해가 중천에 떴다.

    자욱한 매연과 유황가스가 빛을 가려 밤이나 낮이나 별로 차이도 없었지만.

    미친 듯이 이글대던 불길이 약간은 잠잠해졌을 무렵, 악마들에게는 이 시간대가 취침 시간대이다.

    만마전이 잠시 조용해지는 순간.

    …달그락!

    우리는 목마의 덮개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안락해서 나가기 싫을 정도네. 헤헤.”

    마지막 주자 윤솔이 멋쩍은 표정으로 웃으며 사다리를 내려온다.

    우리는 풀 컨디션 상태로 만마전 외성을 넘어온 것이다!

    “까딱했으면 저 괴물들과 맞서 싸울 뻔했군.”

    드레이크는 목마의 뒷다리 뒤에 숨어 만마전 양측에 높게 솟은 두 개의 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위에는 초고위악마인 데모고르곤과 발록의 등짝이 보인다.

    놈들은 여전히 만마전 외성의 최선두에 서서 전면의 전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쿠르르륵!

    놈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두 개의 불덩이는 마치 눈알처럼 전방을 감시한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놈들의 감시망을 피해 안으로 들어온 상태.

    이대로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안으로 침입하면 그만이다.

    “데모고르곤과 발록은 둘 다 미친 싸움광들이지. 한번 전장에 서면 뒤를 돌아보지 않아. 그러니 뒤에서 살금살금 움직이기만 한다면 어지간해서는 들킬 일이 없을 거야.”

    나는 조심스럽게 움직여 만마전 외성의 후방으로 향했다.

    내가 아는 미래지식대로, 데모고르곤과 발록은 뒤편에 있는 우리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무사히 외성 뒤에 높게 솟은 성채 안으로 잠입할 수 있었다.

    나는 해자 밑에 몸을 숨긴 채 말했다.

    “좋아. 일단 1차 백도어는 성공이다.”

    내 말에 윤솔과 드레이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진아. 1차가 성공이라는 건…2차도 있다는 거야?”

    “트로이 목마 작전이 끝 아니었나?”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해킹 프로그램에는 트로이 목마만 있는 것이 아니지.”

    백도어 전략은 장소와 상황, 시전자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나뉜다.

    나는 2차 백도어를 준비하기 위해 내성 안쪽으로 깊게 잠입해 들었다.

    만마전 내성은 명성에 비해 그리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저 돌산을 깎아 성처럼 모양을 낸 정도?

    오히려 검소하고 투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한낱 최외곽, 보여지는 곳일 뿐.

    나는 여기가 만마전의 핵심 구역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은 만마전으로 통하는 입구일 뿐이야. 말하자면 안내 데스크에 불과하지. 진짜는 내성 중앙, 무저갱으로 통하는 지하통로를 지나야 나와.”

    그 말인즉슨 또 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다.

    마몬 역시 죽음룡 오즈와 마찬가지로 무저갱의 군주이니 당연한 일이다.

    드레이크가 내게 물었다.

    “으음, 그렇다면 땅굴을 찾으면 되는 건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성 안에는 통로가 따로 없어.”

    “…없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모르는 거지.”

    마몬이 있는 무저갱으로 가는 통로가 정말 있을까?

    그것은 나도 알 수 없다.

    이것은 회귀 전의 세상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던 화제였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이것 하나뿐이다.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그 누가 말했던가?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라고.

    호다닥-

    나는 잽싸게 움직여 내성 안쪽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만마전 본당이 아닌 지하감옥으로 가는 입구가 있었다.

    “맨날 감옥만 들어가는군.”

    드레이크가 우스갯소리삼아 불평을 했다.

    나 역시 동의하는 바였기에 고개만 끄덕여 준다.

    “자, 그럼 2차 백도어를 시작해 볼까?”

    나는 감옥 앞에 있던 간수 두 명을 순식간에 베어 버린 뒤 감옥 문을 열었다.

    [어억!? 누, 누구냐!?]

    창을 쥔 악마병 하나가 감옥 안에서 보초를 서다가 깜짝 놀라 외쳤다.

    투구 밑 푸른 피부를 보아하니 오크 족인 모양.

    나는 깎단을 거꾸로 든 뒤 악마병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아, 몽둥이. 좋은 대화 수단이지.”

    고기는 때리면 연해진다고 했다. 그것은 사람의 성격도 비슷하다.

    퍽! 퍼억! 뻑! 우득!

    악마의 경우에도 통하는 것 같았다.

    [누, 누구신데 이러새오…….]

    악마병은 한껏 더 푸르딩딩해진 눈두덩이를 부여잡고 내 앞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하지만 오크어로 아무리 지껄여 봤자 내 친구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나는 짧은 오크어로 물었다.

    “지하. 방위. 본부. 어디?”

    그러자 오크병은 덜덜 떨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은 절대로 말해 줄 수 없다는 기개가 느껴진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신념. 빠따로 대체되었다.”

    내 손놀림과 동시에 악마병의 육질이 조금 더 연해진다.

    [저! 저쪽! 저쪽 문! 열고 들어가 왼쪽 끝! 그, 그만 때려!]

    나는 깎단을 거꾸로 쥐어 오크병을 사정없이 난타했고 결국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콰쾅!

    문을 부수고 아래로 내려가자 지하감옥 특유의 음산한 일자형 복도가 보인다.

    복도 양측에는 수많은 감옥들이 있었는데 해골만 남아 있는 방도 있었고 죄수가 들어 있는 방도 있었다.

    […거기 누구야!?]

    [오오! 나를 구하러 왔는가!]

    [꺼내 줘! 나를 꺼내 줘 제발!]

    창살을 붙잡고 흔드는 죄수들. 거의 대부분이 리자드맨들이었다.

    그때.

    “…오잉?”

    나는 뜻밖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엇?”

    감옥 안에서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열두 명의 죄수가 고개를 들었다.

    카렐린 강. 그리고 그를 따르는 11명의 리자드맨 유저들.

    그들이 여기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늬들이 왜 여기서 나오냐?”

    나는 황당한 마음에 물었다.

    이곳에 갇혀있는 리자드맨 죄수들은 죄다 NPC들인데…얘네는 왜 플레이어 주제에 이런 데 갇혀 있는 거람?

    그러자 카렐린 강은 표정을 구기며 땅에 글자를 썼다.

    나는 그것을 번역기로 돌려보았다.

    -버섯마을의 도마뱀 장로 스탄에게 ‘지하방위본부로 가서 편지를 전해달라는 퀘스트’를 받아서 왔는데……난데없이 S급 몬스터가 출몰해서 우리를 여기에 가뒀다. 여기에 갇혀서는 도저히 나갈 수가 없어서 캐릭터를 삭제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이런 가엾은 일이 있나.

    하필이면 ‘싸이코패스 스탄’에게 걸려들다니.

    그 NPC는 저렙 초보 유저들에게 터무니없을 정도로 높은 난이도의 퀘스트를 주는 걸로 악명 높다.

    초보들이 쏠쏠한 보상에 혹해 멋모르고 편지를 배달하러 갔다가 해당 맵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 캐릭터를 삭제하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카렐린 강 정도 되는 고수임에도 불구하고 낚여서 쩔쩔맬 정도면 말 다한 셈이다.

    ‘옛날 생각나네. 한번쯤은 도와줄까?’

    나는 아까 악마병을 구타하고 빼앗은 열쇠로 카렐린 강 파티가 갇혀있던 자물쇠를 열어 주었다.

    “…고맙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다!”

    카렐린 강은 나에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잽싸게 지하감옥을 탈출해 계단을 올라가 사라져 버렸다.

    “별말씀을.”

    나는 열두 마리의 리자드맨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문을 부수느라 큰 소리가 나서 추격병들을 걱정해야 할 처지였는데 다행이다.

    나는 나머지 죄수들도 모조리 풀어 줘 버렸다.

    낙타 계열 수인, 산적, 현상수배범, 악마사냥꾼 등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죄수들이 일제히 탈출했다.

    [흐하하하! 나는 자유다! 죽여 버리겠어 데모고르곤!]

    [오오! 나 에이햅! 자네에게 빚을 졌네! 언제고 ‘하해(下海)’로 찾아오시게!]

    [그아아앗! 드디어 탈옥이다!]

    [발록! 내 이놈부터 쳐 죽이리라!]

    이걸로 감옥 밖에 큰 소란이 벌어지겠지.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안전하게 감옥 깊은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어진아. 감옥으로 내려가는 이유가 따로 있어?”

    윤솔이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우리의 2차 백도어를 도와줄 길잡이가 거기에 있거든.”

    그러자 윤솔도 드레이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도 ‘잭 오 랜턴’ 같은 훌륭한 조력자를 만난 바 있으니까.

    하지만.

    “……헉!?”

    “꺄아악!?”

    지하감옥 최심층부로 내려오자 윤솔도 드레이크도 헛바람을 집어삼킬 광경이 펼쳐졌다.

    깊은 감옥의 죄수.

    앞으로 우리의 든든한 길잡이가 될 녀석.

    나는 눈앞에 있는 독방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어때, 오랜만이지?”

    우리 모두와 구면인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거대한 몸.

    멀어 버린 눈.

    쭈글쭈글한 일자형 바디.

    커다란 입과 그 안을 빼곡히 채운 날카로운 이빨들.

    <샌드웜> -등급: A+ / 특성: 벌레, 땅, 가뭄, 앙버팀, 착굴(鑿掘), 지진

    -서식지: 가혹한 사막 전 구역, 어비스 터미널 ‘칠흑 승강장’ A-51 구역

    -크기: 50m.

    -신화의 끝자락 말석에 표기되어 있는 이 거대한 괴물은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사막의 유목민들만큼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수백 마리의 낙타를 한꺼번에 집어삼키곤 했던 이 모래 속의 악몽을.

    지하의 귀염둥이 샌드웜의 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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