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35화 (435/1,000)
  • 436화 바로 잡기 (1)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다네. 전부 내 잘못이지.]

    아르파공은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

    “…….”

    “…….”

    나와 윤솔, 드레이크는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아르파공의 앞에 앉아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을 깬 이는 벨럿이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너희들이 아는 바와 동일하다. 마몬은 마을을 탈주한 이후 악마가 되어 버렸어. 그리고 정령왕 선거에서 패배한 고르딕사를 타락시켜 마을을 지옥으로 만들었지.]

    […허허, 그 순진하고 착했던 아이가 설마 마왕까지 될 줄을 누가 알았겠나?]

    아르파공은 벨럿의 말을 듣고는 탄식했다.

    나 역시도 마몬의 히스토리를 듣고 조금 놀랐다.

    “정황 상 마몬을 타락시킨 악마성좌는 벨제붑인 것 같고… 성좌 급이 직접 나선 것을 보면 확실히 마몬의 떡잎이 남다르긴 남달랐나 보네.”

    마몬이 벨제붑에 의해 타락했다면 왜 마몬과 벨제붑이 동맹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지, 왜 마몬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데린쿠유에 벨제붑의 역병이 퍼져 있는지, 더 나아가 ‘황금’과 ‘부패’가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도 설명이 가능하다.

    한편 윤솔과 드레이크는 꽤나 놀란 기색이었다.

    “와아, 마몬이 오크로 변했고 바로 오우거로 진화했다고? 그럼 오크의 상위종이 오우거라는 거네?”

    “흐음… 내가 알기로 오우거의 상위종들이 또 따로 존재한다고 알고 있는데. 일전에 맞붙었던 트윈헤드 오우거도 그렇고. 그렇다면…….”

    윤솔과 드레이크의 얼굴에 불안한 빛이 스친다.

    둘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유저들도 마왕이 될 수 있다는 것!?”

    나는 친구들의 의문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 답해 주었다.

    “인간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지. 오크도 될 수 있고 리자드맨도 될 수 있어.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지. 레벨을 올리면 그 이상의 상위종으로도 얼마든지 진화 가능해. 능력만 있다면 말이야.”

    물론 오크에서 마왕까지, 리자드맨에서 용까지 진화하는 개체는 플레이어나 NPC, 몬스터를 통틀어 정말 극소수이다.

    …애초에 고정 S+등급 몬스터들 중 용과 악마는 세계관을 통틀어서 열네 존재밖에 없지 않은가?

    (죽음룡 오즈의 사망으로 인해 이제는 13존재)

    나는 조용히 눈빛만 빛낼 뿐이다.

    “…이래서 게임 후반부로 갈수록 레벨이 중요해지는 거야.”

    게임 초창기부터 말이 많았던 것이 바로 ‘레벨’ 시스템이다.

    대체 레벨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아이템 착용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수 스킬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던전 출입에 제한이 있지도 않고……이럴 거면 레벨이 왜 필요하냐!?

    이런 의문들은 게임 초창기부터 수많은 유저들에 의해 성토되었다.

    개중에는 레벨은 그저 얼마나 이 게임을 오래 많이 했는지, 단순히 그 숙련도만 따지는 척도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대격변 전까지의 이야기.

    1차 대격변이 일어났으니 레벨에 따라서 모든 플레이어들은 더 크고 강력한 육체 기본값을 가지게 되었다.

    아직은 유저들의 수준이 낮아서 모르겠지만… 이는 곧 ‘진화’라는 시스템의 일부로 널리 알려지게 될 것이다.

    한편.

    내 말을 듣는 순간 윤솔과 드레이크는 오싹함을 느꼈다고 했다.

    나의 레벨은 현재 86의 끝자락에 이르러 있다.

    현존하는 유저들 중 가장 높은 수치.

    만약 내가 이 레벨로 오크나 리자드맨이 된다면 대체 어떤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인가?

    “…곧 보게 될지도 모르지.”

    나는 친구들을 향해 그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어 보일 뿐이다.

    뭐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나는 심란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아르파공을 향해 최후의 요구조건을 건넸다.

    “아까 시작한 것은 끝을 내야 한다고 하셨었죠? 작업도, 이야기도.”

    아르파공은 내 목자를 따라 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지하도시의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빛나고 있는 황금 의자가 보인다.

    -<불완전한 황금만능주의자> / 의자 / A+

    세계 제일의 대장장이 몰리에르 아르파공이 만들어 낸 귀물(鬼物).

    화려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 의자로 한번 앉으면 빈털터리가 될 때까지는 일어날 수 없다.

    자신의 부유함을 자랑하기에 이만한 의자가 또 없을 것이다.

    -어둠 속성 저항력 -50%

    -‘수전노’ 특성 사용 가능

    주변 풍경을 일그러트릴 정도로 화미한 의자.

    그 어디에 놓아도 주변을 부자연스럽게 만들 정도로 사치스럽고 화려하다.

    세계제일의 거부 스크루지를 파산시키고 더욱 더 크게 성장한 이 의자, 그 전에는 대체 얼마만큼 많은 사람들의 돈을 빨아먹으며 몸을 불린 것일까?

    […내가 뿌린 싹이니 내가 책임져야겠지. 내 손에서 끝내 보이겠네.]

    아르파공은 의자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단호한 결의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       *       *

    -띠링!

    [로그아웃 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와 주세요.]

    .

    .

    나는 캡슐에서 일어나 몸을 풀었다.

    “간만에 로그아웃하네.”

    게임을 오래 하면 몸이 상한다.

    평소에 아무리 잘 관리한 몸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녹슬어 있기 마련.

    나는 냉장고를 열어 쥬스 몇 팩을 들고 건물 중층에 있는 헬스장으로 향했다.

    그때.

    “…어? 왔냐?”

    나는 헬스장 앞에서 나오는 엄재영 감독과 마주쳤다.

    같은 건물을 쓰니까 어딜 가든 동선이 아는 얼굴들과 겹칠 수밖에.

    “게임만 하지 말고 운동 좀 해라.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한다면서.”

    “그래서 지금 하러 왔잖아요.”

    “오 그래. 나도 너 따라 한 세트만 더 하고 가야겠다.”

    “형님은 집도 있으시면서 왜 자꾸 여기로 와요?”

    “자식이 건물 좀 있다고 생색은, 마! 좀 오면 안 돼?”

    “올 때마다 자꾸 잔소리 하시니깐 그렇죠.”

    나는 손에 든 쥬스 팩을 엄재영 감독에게 내밀며 투덜거렸다.

    한편, 엄재영 감독 역시 내가 내민 쥬스를 한 입 먹고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린다.

    “으엑, 야, 뭐야 이거? 무슨 즙이야? 맛이 왜 이래?”

    “새우랑 아로니아랑 브로콜리랑 고구마랑 청국장 간 거요.”

    “…응? 아니 그 다섯 개 중에 무슨 맛이냐고. 이거.”

    “새우랑 아로니아랑 브로콜리랑 고구마랑 청국장 맛이요.”

    “……통합이야?”

    엄재영 감독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쥬스를 살짝 내 옆으로 밀어 놓는다.

    나는 어림없다는 듯 쥬스 팩을 다시 엄재영 감독의 손에 쥐어 주고는 억지로 다 먹였다.

    “몸에 좋은 거니까 다 드세요.”

    “그윽……우리 처갓집 누렁이도 이건 거르겠다.”

    “먹다 보면 또 괜찮아져요.”

    나는 쥬스를 마신 뒤 운동을 시작했다.

    달리기를 하는 동안 엄재영 감독과 앞으로의 전략을 간단히 논의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따로 회의나 보고를 하지 않아도 되니 시간을 아낄 수 있는 셈.

    엄재영 감독은 정면의 TV 뉴스를 보았다.

    공중파 9시 뉴스 메인에 대문짝만하게 나오고 있는 것은 앞으로 곧 펼쳐질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의 소식.

    “이제 곧 리틀리그가 열린다. 중국, 일본이랑 붙는 역대급 죽음의 조인데…뭐 생각해 놓은 전략 있냐?”

    “그 전에 마몬 잡아 놔야죠.”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엄재영 감독은 충분히 대수라고 느낀 듯하다.

    “고정 S+급 몬스터를 잡는다라, 가능하겠어?”

    “이미 한번 잡아 봤는데요 뭐.”

    죽음룡 오즈도 거꾸러트린 마당에 마몬이라고 해서 두려울 게 뭐 있으랴?

    이미 준비는 철저히 끝내 놓지 않았던가.

    나는 엄재영 감독에게 말했다.

    “이번 리틀리그에서 고인물 전용 아이템인 ‘죽음비늘 갑옷’은 가능한 안 쓸 거예요. 나중에 마동왕과 고인물 능력이 비슷하다는 논란 안 나오게요.”

    “별로 상관없지 않을까? 어차피 국내 선발전에서도 배그옵 때 딱 한번 쓴 게 다고. 그것도 화물 밀 때 썼잖냐.”

    “세계대회니까 그냥 조심하는 거죠 뭐. 어차피 코스튬 변경 아이템 있어서 별 상관없는 것은 저도 알아요.”

    “으음, S+급 아이템을 안 쓰면 절대 우위에는 서기 힘들겠군? 경쟁 선수들도 어지간하면 A급 이상의 아이템들로 무장하고 나올 테니. 특히 중국은…….”

    “그 때문에 마몬을 잡으려는 것도 있죠.”

    어차피 그 누가 나온다고 해도 나는 지지 않는다.

    S급 아이템 선에서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S+등급 아이템을 얻으려는 이유는 ‘압도적인 화력 차이’를 보여 주기 위해서.

    그것도 전 세계 랭커들을 상대로 말이다.

    ‘퍼포먼스(performance)’,

    이게 중요한 것이다.

    “마동왕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은 아무래도 압도적인 근력에서 나오는 힘이죠. 파워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하니까요.”

    “맞아. 고인물은 아무래도 좀 얄밉게 잘한다는 느낌이니까. 마동왕 하면 역시 힘이지.”

    “그래서 힘의 화신인 마몬을 잡아 놈의 ‘상징’을 빼앗아야 하는 겁니다.”

    나는 런닝머신의 바닥을 박차며 말을 이었다.

    “마몬은 뼛속까지 대장장이입니다. 지금은 ‘만마전(萬魔殿)’을 건설하고 있죠. 온갖 악마들이 다 모일 수 있는 거대한 마귀굴을 시공하느라 정신이 없을 겁니다.”

    이 대공사를 위해 마몬은 대량의 불카노스들을 필요로 했고 결국 죽음룡 오즈와 맞붙었던 것이다.

    마몬과 동맹 관계인 벨제붑이 오즈와 적대관계였으니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즈는 제가 죽였고 그의 불카노스 주괴들도 제가 일부 빼앗았죠. 마몬은 승부욕과 지하광물에 집착이 심하니 결국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엄재영 감독은 고개를 끄덕인 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블랙드래곤을 죽였을 때처럼 긴 과정이 필요하겠구나. 리틀리그 시작 전까지 레이드 종료가 가능할까?”

    예전에 나는 죽음룡 오즈를 잡기 위해 불사의 군단 소속 ‘언데드 쌍두마차’인 리치 왕과 데스나이트를 먼저 꺾어야 했다.

    그 기나긴 레이드 과정에서 거쳐 가야 했던 중간 보스들은 또 어떠한가?

    S등급의 흉악한 몬스터 하린마루와 인간지네, 밴시 퀸을 상대하는 것 역시도 고역이었다.

    그 이후 리자드맨 용사 도로시까지 제거한 뒤에야 비로소 최종보스인 오즈에 이를 수 있었으니 그 고생은 차마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수준.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에는 중간 보스들 싹 다 스킵합니다.”

    나는 마지막 한 발자국을 박찼다.

    그리고는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바로 잡습니다. 마몬.”

    삐뚤어진 제자 놈을 바로잡을 시간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