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화 이별의 밤 (8)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
맛있는 걸 봐서 그런 게 아니다. 긴장해서 그런 거다.
윤솔이 마른침을 삼킨 뒤 아르파공을 향해 물었다.
“그, 그래서 어떻게 되셨어요?”
그러자 아르파공은 피곤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기억 너머로 들춰 본 오래 전의 일은 생각보다 더 무겁고 끔찍한 것이었다.
벨럿이 그런 아르파공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스승님. 조금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하지만 아르파공은 고개를 저었다.
[시작한 것은 끝을 내야지. 작업도, 이야기도.]
말을 마친 아르파공은 눈앞에 있는 황금만능주의자를 한번 쓰다듬었다.
-<불완전한 황금만능주의자> / 의자 / A+
세계 제일의 대장장이 몰리에르 아르파공이 만들어낸 귀물(鬼物).
화려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 의자로 한번 앉으면 빈털터리가 될 때까지는 일어날 수 없다.
자신의 부유함을 자랑하기에 이만한 의자가 또 없을 것이다.
-어둠 속성 저항력 -50%
-‘수전노’ 특성 사용 가능
명장 아르파공이 전성기 시절
고르딕사의 폭주를 막기 위해 고안해 냈던 아이템.
그리고 그것을 손에 넣어 전 세계의 거부들을 무릎 꿇리려는 마몬의 야욕.
이야기는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다.
묘하게 불안한 기류를 타고서.
* * *
…텅! …텅!
망치 두 자루가 던져졌다.
오른편에 있는 망치는 싸구려.
왼편에 있는 망치는 명품.
마몬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아르파공을 내려다보며 비죽 웃었다.
“어디 한번 보자. 단순히 물건을 넘어 그것의 영향을 받을 사람을 볼 줄 아는지.”
마몬의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아직 굳지 않은 쇠 특유의 잔울림과도 닮았다.
‘…어느 것을 고를 것인가.’
사실 마몬 역시 아르파공 만큼이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른쪽에 던져놓은 싸구려 망치는 마몬에게 있어서 꽤나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의 습작> / 한손무기 / C+
초보 땜장이 ‘드머프 마몬 클레망소’가 처음으로 만들어 낸 도구.
서툴고 조악하지만 바른 정신과 큰 꿈이 깃들어 있다.
-공격력 +120
-SET (특수)
마몬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든 망치.
이것을 만들어 낸 날 아르파공에게 얼마나 큰 칭찬을 받았던가?
그토록 존경하던 스승에게 바른 정신과 가능성이 담겨 있다는 극찬을 받게 해 주었던 이 망치는 유년시절 마몬의 보물 1호였다.
마몬은 지금 아득한 기억 저 너머에 묻어 두었던 그 보물 1호를 바닥에 내려놓은 것이다.
‘…단순히 물건을 넘어 그것의 영향을 받을 사람을 본다.’
마몬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것을 처음 만들어 가져간 날 스승이 했던 대사를.
‘그 어떤 것도 바르게 펼 수 있는 망치로다! 내 생애 최고의 보물이로구나! 장하다, 장해!’
그렇기에 마몬은 내심 바랐다.
스승이 왼편에 있는 A급 망치보다 오른편에 있는 자신의 첫 작품을 선택해 주기를.
하지만.
타탓!
아르파공이 움직인 쪽은 왼편이었다.
“…이놈! 정신 차리거라! 악마의 꾐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왼편에 있던 커다란 망치를 집어든 아르파공은 다시 한번 마몬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바닥을 노리지 않았다.
부웅-
망치는 곧장 마몬의 머리로 향하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마몬은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콰쾅!
이내, 마몬이 든 망치와 아르파공이 든 망치가 한데 격돌했다.
우지지지직!
두 거한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한 망치 두 자루가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가는 쇳조각.
흔적도 없이 박살난 두 망치.
그리고 박살난 것은 두 사람의 관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콰쾅!
아르파공은 뒤로 수 미터나 날아가 쓰러졌다.
마몬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 그 앞에 섰다.
“결국 당신은 사람 보는 눈도, 도구 보는 눈도 없었군. 그런 주제에 지금껏 스승 행세를 해 왔던 것인가?”
“…….”
“잘 가시오, 허풍선이.”
마몬은 망치 자루를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양손 검 하나를 집어 들고 아르파공의 머리를 겨눴다.
바로 그때.
“…안 대!”
마몬과 아르파공의 사이를 가로막는 존재가 있었다.
왕방울만 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소녀.
드머프 엘리제 벨럿이 아르파공의 앞에 서 있었다.
그것도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철판만 대충 덧대고 기운 티가 나는 철쪼가리.
서툴고 조악하기 그지없는 방패를 들고 아르파공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허.”
마몬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반쯤 벌렸다.
드머프 엘리제 벨럿.
나이 차이가 많아 별로 대화를 시도해 본 적 없던 사매.
그런 벨럿이 지금 눈을 부릅뜬 채 넝마나 다를 것 없는 방패를 들고 아르파공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방금 만든 것이냐?”
마몬은 벨럿에게 물었다.
그녀가 꼭 쥐고 있는 방패를 두고 물은 것이다.
벨럿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났나 했더니 지금껏 대장간에 굴러다니는 쇳조각들을 주워 모아 방패를 만들고 있었던 모양.
쉬이이익…
작고 조악한 방패에서는 아직 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 뜨거운 것을 벨럿은 지금 맨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하라뿌지는…내가 지켜!”
벨럿은 쓰러져 있는 아르파공의 앞에서 자기 몸만큼이나 작은 방패를 든 채 당돌하게 외쳤다.
비록 다리는 달달달 떨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
마몬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벨럿과 아르파공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문득, 귓가에 으르렁거리는 듯한 쉰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남에게 우러름을 받을 상이로군.’
어느 날이었던가? 눈 내리는 벌판에서 한 사냥꾼에게 들었던 말이다.
마몬은 피식 웃고 말았다.
“늙은 떠돌이가 통찰력 하나는 제법이군.”
말을 마친 마몬은 앞으로 성큼 걸었다.
이제 모든 것을 끝낼 시간이다.
바로 그때.
파팡!
벨럿이 방패 뒤에 붙어 있는 주머니를 앞으로 내던졌다.
푸우우우우…
먼지와 나무 조각들 사이로 시커먼 가루들이 풀썩였다.
마몬은 인상을 찌푸렸다.
“흐음. 코뮌 강의 사철(沙鐵)인가. 귀찮은 것을…….”
아르파공이 늘 재료를 구하러 가곤 했던 강둑의 흙.
어찌 모르겠는가? 코뮌 강은 마몬의 고향을 휘감아 흐르던 강줄기인 것을.
당연하게도 마몬은 자신의 고향 강둑의 흙이 특별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애초에 보물 1호였던 망치 역시 코뮌 강의 사철로 만든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코뮌 강의 사철은 그 입자가 크고 거칠기로 정평이 나 있다.
까딱 잘못해서 분진을 코나 입으로 조금이라도 호흡할 경우 호흡기에 치명적인 문제가 일어난다.
심지어 다른 금속에 끼치는 악영향도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대장장이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다루기 어려운 재료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후욱-
마몬은 코 속 점막을 긁으며 파고드는 분진을 피해 뒤로 반 보 물러났다.
한 팔로 입을 막은 마몬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독한 년. 이제 사형이 아니라 이건가?”
그는 숨을 참은 채 손을 휘휘 저어 검은 분진을 걷어냈다.
그러자 저 멀리 벨럿이 아르파공의 몸을 낑낑 잡아당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쓰승님! 빨리! 빨리!”
보아하니 아르파공을 데리고 멀리 도망가고 싶은 마음인가 보다.
하지만 아르파공은 이미 움직일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움직일 의지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 녀석아…… 안 된다. 악마의 꾐에 넘어가면 안 돼…….”
아르파공은 이 지경이 된 지금도 마몬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채 그 자세 그대로.
마몬은 불쾌감을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끝까지 스승 행세를 하겠다는 건가? 어이가 없군.”
그리고는 주먹을 들어 아르파공의 몸을 향해 내리찍었다.
…쩌억!
망치나 칼도 필요 없었다.
콰콰콰쾅!
불안정했던 바닥이 완전히 푹 주저앉았고 사방에 균열이 생겨났다.
“끄으으으윽!”
아르파공은 격통에 몸부림쳤다.
마몬의 힘!
그 미증유의 거력이 담긴 주먹은 아르파공의 두 다리를 맨손으로 짓이겨 버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와아아아앙!”
벨럿은 방패를 바닥에 떨어트린 채 울음을 터트렸다.
피범벅이 된 다리를 끌어안고 신음하는 아르파공, 목 놓아 우는 벨럿.
“……흥. 너절하기는.”
마몬은 코웃음을 치고는 폐허가 된 대장간을 뒤돌아 나왔다.
…아니, 나오려 했다.
그때, 마몬은 문득 자기가 주저앉힌 바닥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
바닥에 크게 뚫린 구멍 밑으로 보인 것은 지하 작업실의 풍경이었다.
“허어, 매일 밤 남 몰래 지하실에 숨어서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나 했더니. 이런 것을 만들고 있었군.”
마몬은 커다란 손을 뻗어 바닥의 구멍을 휘저었다.
그리고 이내 지하 작업실 중앙에 놓여 있던 커다란 물건을 손에 쥔 채 끌어올렸다.
…그르르륵!
그것은 금과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는 화려한 의자였다.
아르파공의 몸에서 쏟아진 핏물 때문에 붉게 물들어 있어서 더욱 더 화려해 보였다.
‘불안전한 황금만능주의자’
그것을 본 아르파공의 눈이 처음으로 세차게 흔들렸다.
“…아, 안 된다! 이놈아! 그, 그것만은 안 돼!”
아르파공은 두 다리를 잃어버린 것도 잊은 채 바닥을 기며 소리쳤다.
하지만 고통에 겨워 잠시 고개를 떨궜다 든 사이, 마몬이 서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간 함께해서 더러웠소. 다시는 보지 맙시다.”
무너진 벽 너머 어둠 속, 마몬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귓가에 또렷하게 전해져 온다.
그 목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다가오는 횃불과 사냥개들의 하울링을 피해 대장간 뒤의 숲속으로 녹아들어 버렸다.
인연이 맺어지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 것, 반면 인연이 깨지는 것은 너무나도 쉽고 또 순간적이다.
천천히 기울어 가는 달.
이별의 밤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