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화 이별의 밤 (5)
그 뒤로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고 마을의 모습도 많이 바뀌었다.
중앙 광장에 있는 의회에서는 다툼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었다.
“곧 선택의 날이 다가올 거요.”
“가이악사 님과 고르딕사 님 중 한 분만을 정령왕으로 추대해야 하겠지.”
“두 정령님 모두 오래 전부터 우리를 도와주셨던 분들인데, 마음이 무겁구만.”
“그날 어느 쪽에 투표할지 미리 정해 둡시다.”
마을 사람들은 셋 이상 모이면 이 이야기를 하기에 바빴다.
“후우…….”
드머프 몰리에르 아르파공.
그는 몇 년 새에 꽤 늙었다.
세계 제일의 대장장이도 세월은 피해가지 못하는 법이다.
제자들이 부쩍부쩍 클 동안 그는 조금씩 조금씩 작아졌다.
웅장한 바위가 바람에 조금씩 깎여나가듯.
의회 계단에 앉아 한숨을 쉬는 그에게 마을 이장이 다가왔다.
“아르파공 님. 간만입니다.”
“아, 이장님이시군요. 늘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장과 이르파공은 계단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먼저 입을 연 이는 이장이었다.
“…그 소문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문 말입니까?”
“저 남쪽의 대저택 주인 말입니다. 볼트웰스 파베누 씨. 그 왜 이번에 중앙 은행장으로 취임했던.”
“그런 이가 있었던가요?”
아르파공이 별 관심 없다는 듯 묻자 이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가 이번에 큰 사고를 당했다더군요.”
“사고요?”
“예. 고르딕사 님이 주신 금화를 이웃 나라로 팔러 가다가 그만 오크…….”
아르파공은 사람이 오크에게 당했다는 말인 줄 알고 혀를 찼다.
하지만 이어진 이장의 말은 다소 뜻밖이었다.
“오크로 변해 버렸다는군요.”
“……이런.”
아르파공은 더욱 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용과 악마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혼탁한 세상.
인간은 조금만 평정심을 잃어도 그 기운에 오염되어 괴물로 변해버리곤 한다.
“파베누 씨는 야망이 컸지요. 그 때문에 악마의 꼬드김에 넘어간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오크가 적성에 맞을 지도 모르지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에게 있어서는 차라리 오크로 사는 것이 더 행복일지도.”
뒷말을 흐리던 이장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아르파공에게 물었다.
“참, 그러고 보니 아르파공 님께서는 훗날 있을 정령왕 투표에서 어느 쪽을 지지하실 것인지…….”
이장의 질문을 들은 아르파공은 쓰게 웃으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뭐, 요즘 젊은이들은 모르겠다만. 늙은이들 생각은 다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가이악사 님을 지지하고 있습니다만.”
“제 생각이 이장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아르파공의 대답을 들은 이장은 크게 안심이 된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사람의 삶에 본질적으로 더 가까운 것은 황금보다는 곡식이지요. 겉이 누런 것이야 같지만 그 속은 엄연히 다르지 않겠습니까?”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고르딕사 님은 가이악사 님에 비해 아무래도 그릇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좁으신 듯하니…….”
“그래도 다행입니다. 아르파공 님께서 가이악사 님을 지지해 주시니. 당연히 제자 분들께서도 마찬가지시겠죠?”
하지만, 이장의 질문을 들은 아르파공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진다.
“그것이…….”
아르파공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제 제자 놈은 고르딕사 님을 지지하고 있답니다.”
“예에? 어찌 스승과 다른 정령왕 후보를?”
“뭐, 투표야 개인의 자유이니까요. 젊어서 그런가 생각도 괄괄합디다. 허허.”
그러자 이장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마몬, 그 친구가 어렸을 적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가 대기근 때 버림받았다고 했었죠? 그 아이를 아르파공 님이 데려오신 것이고요.”
“용과 악마가 그토록 싸워 대니 농사가 잘 되겠습니까? 저희야 가이악사님이 보살펴 주시니 다행입니다만, 다른 마을에는 배곯는 아이가 많습니다.”
“부디 마몬과 벨럿에게 천사님의 가호가 있기를.”
“후우,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천사들이 있긴 있나 모르겠습니다.”
“…….”
대화가 잠시 끊겼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마을 중앙 광장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수레에서 젊은 청년들이 쩌렁쩌렁 고함치는 것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곧 ‘선택의 날’이 다가옵니다! 고르딕사 님에게 한 표 부탁드립니다! 황금신을 정령왕으로!]
[쌀값보다 금값이 더 높다! 실리를 추구하자!]
[고르딕사 정령왕님 만세! 황금청년단 만세!]
수레와 말을 모는 청년단원들은 자극적인 구호를 외치며 마을 전역을 누빈다.
이장은 젊은이들이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쯧쯧, 저것들도 집에 가면 곡식을 입에 퍼 넣을 텐데. 이 혼란의 시대에 밥숟갈이나마 뜰 수 있는 것이 누구 은혜인 줄 알고…….”
“…….”
하지만 옆에 있던 아르파공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방금 고르딕사 선거운동본부의 맨 앞에서 말을 몰아 달리는 건장한 체격의 젊은이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드머프 클레망소 마몬.
그의 제자가 거기에 있었다.
* * *
그날 저녁.
아르파공은 여느 때처럼 오래 전부터 꾸준히 해 오던 작업에 착수했다.
땅! 따앙! 땅!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망치를 두드리는 아르파공.
그 앞에는 크고 화려한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불완전한 황금만능주의자> / 의자 / A+
세계 제일의 대장장이 몰리에르 아르파공이 만들어 낸 귀물(鬼物).
화려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 의자로 한번 앉으면 빈털터리가 될 때까지는 일어날 수 없다.
자신의 부유함을 자랑하기에 이만한 의자가 또 없을 것이다.
-어둠 속성 저항력 -50%
-‘수전노’ 특성 사용 가능
아르파공은 거의 다 완성된 의자를 보며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만들었지만 정말로 화려하군. 아마 돈푼께나 있는 것들치고 이 의자에 앉아 보기를 원하지 않는 자 없을 것이다.”
이 의자는 전적으로 고르딕사를 위해 제작되고 있었다.
훗날 투표에 진 고르딕사가 분노로 인해 폭주할 것을 대비하여 만들고 있는 의자였다.
“모든 부유한 것들은 이 의자에 앉아 자신을 뽐내길 원할 것이야.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들은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지.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허영에 가려졌던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다 잃어야 보이는 것도 있는 법이거든. 특히나 황금 같이 사람의 눈과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들일 경우에는 더더욱.”
아르파공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그때.
“하라뿌지.”
옆에서 아르파공의 소매를 당기는 손이 하나 있었다.
아르파공이 고개를 돌리자 아주 작은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드머프 엘리제 벨럿.
아르파공이 거둔 마지막 제자가 손가락을 쭙쭙 빨며 스승이 있는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의자 이뿌당. 안꼬 싶어요!”
벨럿이 방실방실 웃으며 말한다.
아르파공은 너털웃음과 함께 벨럿을 안아들었다.
“이 의자는 앉는 것이 아니라서 안 된단다.”
“에엥. 할아뿌지 바보. 의자는 안는 건데!”
“그렇지. 의자는 보통 앉으라고 만들지. 하지만 남을 깔아보기 위해 의자를 쓰는 이도 있어요. 이처럼 같은 물건이라도 용도는 쓰는 사람마다 다 다르단다. 좋은 대장장이라면 그것들을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럼 만져바도 데요?”
“그럼. 그 정도야 얼마든지.”
말을 마친 아르파공은 벨럿을 의자 앞에다 놓아 주었다.
그러자.
쪼르르-
벨럿은 아르파공의 말을 무시하고는 의자로 달려가 냉큼 앉아 버렸다.
그러자.
…짤그랑!
요란한 소리가 한번 울렸다.
그것은 벨럿의 호주머니에서 난 소리였다.
“어?”
벨럿은 깜짝 놀라 자신의 호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사탕을 사 먹으려고 아껴 모아둔 용돈 500골드가 사라져 버렸다.
“뿌애애앵!”
벨럿은 호주머니를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아르파공이 껄껄 웃으며 의자 위의 벨럿을 안아들었다.
“으휴, 이 녀석. 그러니까 눈으로만 보라고 했잖느냐.”
“애애앵! 내 용똔!”
“할아버지가 다시 주마. 뚝.”
아르파공이 어르고 달래자 벨럿은 이내 울음을 그쳤다.
“진짜 다시 주시꺼에요?”
벨럿이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묻자 아르파공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은 못 주고. 이 스승의 일을 도와주면 용돈을 주지.”
“므슨 일이요?”
“그야 이 의자를 보수하는 일이지.”
아르파공은 어린 벨럿을 데리고 의자를 마저 만들기 시작했다.
“대장간 일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담금질이란다. 아무리 모양이 화려하고 예뻐도 이 담금질이 제대로 안 되면 쇠가 무르게 되지. 그러면 쉽게 찌그러지고 부러져 버려. 불에 뜨겁게 달구어진 금속을 물에 담금질하는 실력을 보면 대장장이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단다.”
아르파공은 벨럿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의자를 만들고 보수했다.
따앙! 쩡!
아르파공의 망치와 정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의자가 점점 제 모습을 갖춰나간다.
화려하고 웅장한 모양새로.
“우와! 스승님 멋쨍이!”
벨럿은 젖니 빠진 이를 훤히 드러내며 박수쳤다.
그런 벨럿을 바라보며 아르파공은 쓰게 웃었다.
‘…부디 이 의자를 쓰는 일이 오지 않았으면.’
언젠가 펼쳐질 가이악사와 고르딕사의 총투표.
과연 벨럿, 이 어린 아이가 그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르파공은 그것이 걱정이었다.
바로 그때.
땡그랑!
위층에서 무언가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도둑을 막기 위해 다락 창에 대충 설치해 놓은 방울 신호줄이 내는 소리일 것이다.
“…으응? 우리 대장간 다락에 뭐가 있다고 도둑이 들었지?”
아르파공은 소리를 듣고도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할아뿌지, 도둑? 도둑?”
벨럿이 발을 콩콩 구르며 묻자 아르파공은 허허롭게 웃었다.
“다락에 뭐가 있다고 훔쳐가겠니. 뭐 훔쳐 갈 게 있다고 해도 그것을 훔쳐 갈 정도면 그 사정이 오죽할까.”
그래도 일단 집주인인 이상 나가 보기는 해야 한다.
아르파공은 일부러 천천히 겉옷을 입었다.
야밤에 침입해 온 어설픈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