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화 이별의 밤 (4)
휘이이이잉-
눈발이 점점 거세진다.
마몬은 눈 덮인 설산을 기어가듯 올라가고 있었다.
‘…꼭 대금을 받고 말겠어!’
스승의 무기가 제 가치를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상상도 하지 못할 거금이 아까워서일까?
마몬의 머릿속에는 두 개의 마음이 서로 복잡하게 뒤섞이고 있었다.
그때.
…깡!
어디선가 맑은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쇳소리. 그동안 수도 없이 들었던 소리다.
더군다나 저 잡티 하나 없이 맑은 소리는 쉽게 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스승이 만든 무구 정도는 되어야 저런 깔끔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
‘찾았다!’
마몬은 발이 동상으로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도 모른 채 재빨리 산비탈을 뛰어 올라갔다.
“……!”
마몬은 산등성이 위에 올라서자마자 두 눈을 크게 떠야 했다.
구릉 아래에서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털옷을 입은 사냥꾼.
그는 아르파공이 준 칼을 빼들고 네 마리의 오크와 대치하고 있었다.
“보아라 얘야. 홀로 싸우는 것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란다. 최소 넷은 되어야 사냥의 효율이 극대화되지. 보렴, 이 추악한 악마의 개들도 지금 넷씩 무리지어 몰려다니고 있지 않니?”
사냥꾼은 뒤에 있는 여자아이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사뿍! 쩍! 뿌지직!
이내, 사냥꾼은 유려한 칼솜씨를 뽐내며 오크 셋의 목과, 허리, 무릎을 베어 눈밭 위로 구르게 만들었다.
후다닥-
살아남은 오크 하나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뒤돌아 뛴다.
머리가 잘려나간 놈을 제외한 숨이 붙어 있는 나머지 두 놈이 필사적으로 샤낭꾼의 주의를 돌리려 애쓴다.
한편, 사냥꾼은 도망치는 사냥감을 바라보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좋은 판단이야. 여럿이서도 당해낼 수 없는 적을 만나면 가장 살 가능성이 높은 존재부터 도망시켜야 하지. 의리를 지키며 다 같이 죽는 것보단 하나라도 살아남아야 복수를 꾀할 수 있으니 말이다.”
말을 마친 사냥꾼은 칼의 손잡이를 잡고 허공으로 힘차게 내던졌다.
퍼퍽! 쩍-
칼은 도망치는 오크의 목을 뚫고 나아가 그 앞의 나무를 두 조각으로 쪼개 버렸다.
스윽-
사냥꾼은 나무에 박힌 칼을 뽑아 눈에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몸을 기울여 뒤에 있는 여자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뒤 말했다.
“…혼란의 시대란다, 얘야. 인간은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용이나 악마의 꾐에 넘어가 리자드맨이나 오크로 변해 버리고 말지. 용사가 되기 위해서는 늘 정진하고 수련하여 마음에 흔들림 한 점 없게끔 갈고닦아야 한다. 그것이 이 혼탁한 세상에서 인간의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일 지어니.”
여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망한 눈망울에 사냥꾼의 얼굴을 담는다.
말을 마친 사냥꾼은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렸다.
“…헉!?”
사냥꾼이 오크를 사냥하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던 마몬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자신이 여기 있는 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저 눈빛이라니!
사냥꾼은 턱수염에 얼어붙은 서리를 털어내며 물었다.
“기척만 보고 오크인 줄 알았는데 아까의 땜장이로군. …무슨 일로 예까지 왔소?”
질문. 그것도 꽤 날이 서 있는.
마몬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감각이 없었던 발가락이 몹시 간지러웠다.
“그, 그게… 스, 스승님이…….”
마몬은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힘주어 내뱉었다.
“스승님께서…대금을 받는 것을…깜빡하셨다고……음.”
그러자 사냥꾼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마몬은 눈보라 소리에 질세라 목청껏 소리쳤다.
“스승님께서 돈 받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칼 값이요!”
그러자 사냥꾼의 표정이 처음으로 바뀐다.
“…허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이다.
사냥꾼의 표정이 변한 것을 보고 옆에 있던 여자아이가 깜짝 놀라는 것을 보면 평소에 표정 변화가 드문 사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사냥꾼은 눈밭 위를 얼마간 걸어와 마몬의 앞에 섰다.
…움찔!
마몬은 사냥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숨을 멈추고 있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아까 오두막에 앉아 감자죽을 먹을 때만 해도 그냥 평범한 아저씨처럼 보였는데 지금 이 기세는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수도 없었기에 마몬은 가슴을 쭉 펴고 짐짓 당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사냥꾼은 피식 웃었다.
“자네 스승이 정말 돈을 받아오라고 했나?”
“…….”
마몬이 식은땀만 흘릴 뿐 대답이 없자 사냥꾼은 한 번 더 건조하게 웃었다.
“알 만하군.”
“…….”
“보다시피, 나는 수중에 가진 돈이 한 푼도 없다네.”
말을 마친 사냥꾼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허리춤에 찬 칼을 풀어 마몬에게 홱 던져 주었다.
“아앗!?”
마몬은 허둥지둥 움직여 스승의 칼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냈다.
존경하는 스승의 칼이 눈밭에 파묻히는 일을 막기 위해서이다.
칼을 돌려받은 마몬은 다시 멀어지는 사냥꾼을 향해 서둘러 말했다.
“워, 원래 한번 사용하신 제품은 반품이 어렵습니다만은… 이번에는 저희 측 과실도 있는지라 눈감아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사냥꾼은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었다.
이내, 그는 눈 언덕 위의 마몬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남에게 우러름을 받을 상이로군.”
“……?”
“자네는 언젠가 왕좌에 앉게 될 거야. 비록 주변에는 아무도 없게 되겠지만 말이야.”
미소 짓던 사냥꾼은 이내 씁쓸한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독할 걸세.”
그것이 끝이었다.
사냥꾼은 아무런 항의도 이견도 표하지 않은 채 피로 물든 눈밭을 걸어갔다.
작은 여자아이의 손을 잡은 채로.
‘무슨 개소리야? 왕좌? 나같이 천한 것이 어떻게.’
마몬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지금 떠돌이의 부언에 귀 기울일 때가 아니다.
칼을 회수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눈발이 더 거세지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
잘려나간 오크의 머리가 그런 마몬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짜악-
오두막에 도착한 마몬의 뺨이 세차게 돌아갔다.
동상에 걸려 검푸르게 변한 발가락보다도 뺨이 더욱 화끈거렸다.
아니, 그보다는 마음이 더.
…와아아앙!
옆에서는 갓난아기 ‘드머프 엘리제 벨럿’이 울고 있다.
마몬이 도로 가져온 칼을 본 아르파공은 한숨을 내쉬었다.
“…옷을 더 두텁게 입거라.”
아르파공은 눈보라를 뚫을 채비를 한 뒤 오두막 바깥으로 나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맹렬한 강행군 끝에, 아르파공과 마몬은 아까 떠난 사냥꾼 부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거의 천 리를 걸어온 뒤였다.
“나는 가진 돈이 없소만.”
다시 만난 사냥꾼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아르파공 역시도 무표정하다.
“늙으니 노망이 와서. 너그러이 이해하시오.”
아르파공은 도로 가져온 칼을 모닥불 가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의 옆에 내려놓았다.
…그게 끝이었다.
아르파공은 칼을 내려놓은 즉시 뒤돌아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뒤에 대고 사냥꾼이 여자아이에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도로시야. 할아버지가 선물 주시는데, 고맙습니다- 해야지.”
“고맙쭙미다.”
코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감사인사.
아르파공은 드물게도 고개를 돌려 여자아이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훗날 용도 잡을 수 있는 용사가 되거라.”
그것이 사냥꾼 부녀와의 마지막이었다. 영원한.
* * *
휘이이이잉-
눈보라가 더욱 심해졌다.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 또다시 고달픈 여정이 시작되었다.
뿍뿍 소리 나는 눈길을 밟던 중 마몬은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스승님. 왜 저 떠돌이에게 칼을 거저 주신 것인지요?”
“…? 무슨 칼 말이냐?”
바로 되묻는 아르파공. 정말 몰라서 되묻는 표정이다.
칼을 넘겨 준 뒤 바로 그 사실을 잊어버린 것일까?
자그마치 30억 골드가 넘어가는 명검을?
마몬은 기가 막혀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칼 말입니다!”
“…음? 으음. 용 사냥꾼에게 판 칼 말이냐?”
“용 사냥꾼이요!? 그자는 그냥 떠돌이입니다! 그리고 팔다니요! 거저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마몬은 답답한 심경으로 계속 외쳤다.
“장인의 신념은 비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또 도구는 자고로 그 가치를 알아보는 이에게 가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아까의 그 떠돌이는 제가 칼 반환을 요구하자 너무도 쉽게 칼을 돌려주었습니다! 만약 그가 정말로 칼의 진가를 알아보는 이였다면 저를 죽이고 가져가거나 아니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와 대금을 지불했어야 옳습니다! 그는 스승님의 노력의 결과물을 거저 얻어간 거라구요!”
그러자 아르파공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껄껄 웃었다.
마몬은 빨개진 얼굴로 되물었다.
“무, 무엇이 그리 우스우십니까!?”
평소의 마몬이었다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아르파공은 제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질문 하나를 했다.
“…채소 가게에서 100골드짜리 채소를 100개 사면 얼마를 지불해야 하느냐?”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다.
마몬은 고개를 갸웃한 뒤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야 1만 골드입니다.”
하지만 아르파공은 고개를 저었다.
“틀렸다. 단골임을 알아본 채소가게 아주머니가 물건 값을 깎아주셨기에 9천 골드이다.”
“…예?”
“그럼 한 문제 더. 손자에게 매월 월수입의 10%를 용돈으로 주시는 할아버지가 있다. 그 할아버지의 이번 달 수입은 80만 골드. 그렇다면 손자가 이번 달에 받게 될 용돈은 얼마냐?”
“그야 8만 골드지요.”
“틀렸다. 이번 달은 할아버지가 기분이 좋으셔서 10만 골드란다.”
“……?”
마몬은 황당한 마음에 입을 딱 벌렸다.
그러자 아르파공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너의 계산에는 ‘마음’이 없구나. 그런 피도 눈물도 없는 계산은 돈놀이꾼들의 연산에나 쓰이는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십니까!”
마몬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반쯤 벌렸다.
세상에 이런 황당한 계산법은 처음 들어본다.
하지만 아르파공은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며 같은 말을 계속했다.
“소망과 염원, 행복, 그릇의 크기는 돈 따위로 감히 잴 수 없다는 말이다.”
“……?”
“내가 손님의 마음속을 직접 들여다봤는데 무엇하러 굳이 돈이라는 불필요한 단계를 거쳐서 그 마음을 재차 확인해야 하느냐는 소리야.”
“아니, 그럼 손님의 마음속을 어찌 압니까?”
“눈을 보면 알지. 어떤 도구가 누구의 짝이 될지.”
그러자 아르파공의 품속에 있던 벨럿이 빵긋빵긋 웃기 시작했다.
아르파공은 벨럿의 웃는 얼굴을 보며 빙긋 마주 웃었다.
“뭐야, 너도 알겠다고? 간난아이인 너도 아는 것을 모르겠다는 네 사형은 바보가 분명하구나. 나중에 네가 잘 가르쳐 주거라.”
날 선 분위기를 농담으로 부드럽게 푸는 아르파공이다.
하지만 정면을 보고 웃는 아르파공은 보지 못했다.
그를 뒤따르고 있는 제자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