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화 이별의 밤 (3)
“당신은 누구요?”
세계 제일의 대장장이 아르파공.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눈앞에 있는 파베누를 내려다보았다.
파베누는 약간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내 자기가 당황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제야 평정심을 되찾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아르파공 선생님.”
“누구냐고 묻지 않소?”
“아,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파베누는 품속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아르파공에게 내밀었다.
<중앙은행의 1급 은행원이자 금화 세공 협회의 명예이사이자 국제통화기금 발전회의 서기관이자 마을발전향우회의 청년회장이자 고르딕사 선거위원회의 홍보부장이자 당신의 친절한 이웃 ‘볼트웰스 파베누’>
검은 광택이 나는 재질, 귀퉁이마저 금박이 덧씌워진 고급스러운 명함이었다.
그 명함을 흘낏 내려다본 아르파공은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그리고는 명함을 받지도 않은 채 퉁명스럽게 물었다.
“당신의 정체가 이 종이조각이라는 거요?”
“아! 아닙니다. 이것은 제 명함입니다. 제 신상이 기록되어 있는.”
파베누의 대답을 들은 아르파공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명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뭐가 이렇게 쓸데없는 글자가 많아. 그러니까 당신이 내 이웃이고 이름이 파베누라는 거잖아.”
“예 뭐 그렇죠. 엄밀히 말하자면 이웃은 아니지만. 저는 저 멀리 떨어진 남쪽의 부촌에 살거든요. 홋홋홋! 이번에 새로 지은 지붕 뾰족한 대저택을 보셨는지요? 그것이 제 집이랍니다. 이런 말씀 드리면 자랑 같이 들리실지도 모르지만… 570억 골드나 주고 지었지요. 아르파공 선생님께서는 장인이시니 그 집의 대단함을 알아주시리라 믿습니다.”
파베누가 조잘거리는 사이 아르파공은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공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아르파공은 문득 구석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제자의 시선을 느꼈다.
“마몬아. 뭘 그리 보고 있느냐?”
마몬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인 아르파공은 이내 파베누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자신의 칼을 보았다.
순간 눈빛이 변한 아르파공은 꾸벅 인사하고 문턱을 넘어가려는 파베누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봐. 그 칼은 파는 게 아니야. 내려놓고 가.”
“엣? 하지만 저는 이미 값을 치렀는데요?”
“…값?”
그러자 파베누는 테이블 위의 수표를 가리켰다.
“선생님의 제자가 책정한 값보다 훨씬 더 큰돈입니다. 방금 전에 거래를 마친 참입니다.”
그러나 아르파공은 고개를 저었다.
“그 칼은 안 파는 거야.”
“하지만 저는 이미 값을 치렀다구요!”
“두 배로 돌려줄 테니 다시 내놓아. 그 칼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러자 마몬도 파베누도 입을 딱 벌렸다.
아무리 봐도 아르파공에게 30억 골드나 되는 거금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랬다면 이런 다 쓰러져 가는 대장간에 살지도 않을 게 아닌가?
상황이 이쯤 되자 파베누로서도 진땀을 뺄 수밖에 없다.
그는 조곤조곤한 어조로 아르파공을 향해 말했다.
“저도 경우가 있는 상인입니다. 금액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두 배, 아니 세 배를 드리죠. 부디 이 칼을 제게…….”
“돈이 문제가 아니야.”
아르파공은 딱 잘라 말했다.
그는 파베누를 내려다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칼은 자네와 어울리지 않네. 그래서 못 팔겠다는 거야.”
“…그것은 어찌 판단하십니까?”
“만든 사람의 마음이지.”
이 세상에서 가장 딱 잘라 떨어지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아르파공의 태도이리라.
그 무섭도록 태연하고 강직한 기세에 파베누는 얼이 빠져 입을 반쯤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서둘러 물었다.
“…그, 그렇다면 만족하실 만큼의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제가 이 칼을 가지려면 얼마를 내야 합니까?”
빅 딜.
상인 파베누가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패다.
부르는 게 값이라는 아르파공의 무기를 얻을 수 있다면야 무얼 감내하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음. 자네의 전 재산을 내놓던가 아니면 그냥 돌아가시게.”
“…예? 저, 전 재산이요?”
“무기의 목적은 살상 아니겠는가? 누군가의 목숨을 가져간다는 것은 그의 것을 다 가져간다는 것이나 다름없지. 그러니 내 무기를 가져가려거든 적어도 가진 것 정도는 다 내어 놔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일세.”
아르파공의 말에 결국 파베누는 양 어깨를 늘어트려야 했다.
“…홋홋홋! 약간 이해가 되지 않는 논리이지만 어쩔 수 없군요. 돈이 부족하다는 말씀으로 알아듣겠습니다. 하기야, 아르파공 님의 손길이 닿은 무구인데 그 정도는 당연하겠지요. 이번 상행으로 돈을 더 많이 벌어 와서 꼭 선생님의 칼을 사고 말 겁니다.”
파베누는 아르파공을 향해 정중하게 목례한 뒤 대장간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아르파공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에잉. 억지 쓰느라 혼났네. 내가 저런 것들 때문에 무기를 안 만들지.”
아르파공은 되돌려 받은 칼을 다시 문 옆에 세워두었다.
그리고는 구석에 서 있는 마몬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움찔!
마몬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스승의 두툼한 손에 몸을 움츠렸다.
스승이 없는 사이 마음대로 칼을 팔았다고 질책을 당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하지만.
터억-
아르파공의 손은 그저 마몬의 머리를 거칠게 한번 쓰다듬었을 뿐이었다.
“저 따위 돈으로는 내가 만든 물건을 살 수 없지. 제자야, 너도 너 자신의 가치를 조금 더 원대하게 매기거라. 장인의 신념은 비싸단다.”
그 말을 들은 마몬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멋지다!’
마을에서 이름난 거부가 몇 번이나 머리를 숙였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명장(明匠).
마몬은 자기 또한 훗날 그런 대단한 대장장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날 밤에 일어났다.
* * *
“스승님! 식사하십시오!”
마몬은 국자로 솥에 담긴 감자와 고기를 뜨며 외쳤다.
아르파공이 등에 포대기를 맨 채 오두막 중앙으로 나왔다.
응애- 응애-
아르파공의 등 뒤에선 간난아이 하나가 우렁차게 울고 있었다.
“거 참, 목청 한번 우렁차구나. 폐허 속에 갇혀 있느라 며칠은 굶었을 텐데.”
아르파공은 간난아이가 기특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번에 재료를 구하러 마을 밖으로 멀리까지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폐허가 된 마을에서 발견한 아이다.
“이름은 뭘로 하실 겁니까?”
마몬이 묻자 아르파공은 잠시 고민하던 끝에 선택권을 넘겼다.
“네가 한번 지어 보려무나. 네 사제가 될 아이이니.”
“사내아이인가요?”
“계집아이란다.”
“…흐음.”
마몬은 한참이나 고심하던 끝에 검지를 들어 올렸다.
“벨럿 어떻습니까?”
“벨럿? ‘투표’라는 뜻이냐?”
“예. 먼 훗날 가이악사 님과 고르딕사 님 사이에 정령왕을 선출하는 투표가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때가 되면 이 아이도 유권자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정령왕 투표 이야기가 나오자 아르파공의 낯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렇지. 가이악사 님과 고르딕사 님은 오랜 시간 우리 마을을 굽어 살펴 주셨지. 하지만 두 분 중 정령왕이 되실 수 있는 쪽은 하나뿐이야. 어느 쪽에 표를 던져야 할지 고민이구나.”
혼자서 나지막이 중얼거린 아르파공은 등에 업혀 있는 간난아이 벨럿을 돌아보며 말했다.
“부디 이 어린 것에게 화가 미치지 않았으면 좋겠는걸.”
“별 일이야 있겠습니까? 두 분 다 좋으신 분이니.”
“그야 그렇지만. 고르딕사 님 쪽이 아무래도 마음이 상대적으로 좁으시니 말이다.”
스승과 제자가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텅텅텅-
오두막 문이 울렸다.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들기고 있는 것 같았다.
“…뉘십니까?”
마몬이 묻자 문 밖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나가는 객이온데 부디 몸을 좀 녹일 수 있겠소? 얼어 죽을 것 같소!”
마침 밖에는 눈발이 거세게 날리고 있었기에 마몬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밖에는 털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마찬가지로 털옷을 입은 여자아이 하나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복장만 놓고 보면 건넛마을의 사냥꾼 부녀처럼 보였다.
아르파공은 그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어. 이 궂은 날씨에 어린 여아까지 데리고 어디를 가시오?”
“…산 건너편에 볼 일이 있어서 급히 가는 중이었다오. 신세 좀 지겠소이다.”
털옷을 입은 사냥꾼, 그는 다소 무례한 감이 있을 정도로 직설적인 사내였다.
하지만 의외로 꼬장꼬장한 아르파공은 사냥꾼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
“…….”
사냥꾼과 대장장이는 커다란 솥을 사이에 두고 한동안 별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뜻밖에도 아르파공이었다.
“…그래. 산 건너편까지는 꽤 먼데, 무슨 일로 가시오?”
스승은 본디 과묵한 성격인지라 낯선 이에게는 먼저 말을 걸지 않는데 의외라고 마몬은 생각했다.
사냥꾼은 선뜻 대답했다.
“제자를 훈련시키러 간다오.”
“제자라 하면, 그 옆에 아이를 말하는 것이오?”
“그렇소.”
말을 마친 사냥꾼은 옆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감자죽과 고기조각을 정신없이 퍼먹고 있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한 7살 정도나 되었을까?
뽀오얀 얼굴에 짙은 눈썹, 주근깨가 살짝 얹힌 오똑한 코. 씩씩하고 용감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아르파공은 혀를 찼다.
“이렇게 작은 아이를 훈련시켜서 무슨 일을 하려 하시오?”
그러자 사냥꾼은 감자를 후후 불며 대답했다.
“용을 죽이는 일을 하지.”
그 말에 옆에 있던 마몬은 몸이 오싹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용을 죽인다니! 이 말의 무게를 알고나 지껄이는 말일까?
하지만 이에 대답하는 아르파공의 대답이 또 걸작이다.
“용을 죽이는 게 어디 훈련만으로 될 일이던가?”
말을 마친 아르파공은 몸을 슬쩍 일으키더니 문 옆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오늘 낮에 은행가 파베누가 사 가려고 했다가 돈이 부족해서 사가지 못한 양손검이 놓여 있었다.
철그럭-
아르파공은 태연한 기색으로 문 옆의 칼을 집어 들더니 그것을 가져와 솥 앞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에게 내밀었다.
“칼이 좋아야 용을 잡지. 허허허허허.”
감자죽을 먹기 바쁜 여자아이는 칼을 본 체도 하지 않는다.
아르파공은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껄껄 웃는다.
“…….”
솥 앞에 앉아 있던 사냥꾼은 숟가락질을 멈추고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여자아이에게 말했다.
“얘야. 할아버지가 선물 주시는데 감사합니다- 해야지.”
“…감사함미다.”
여자아이는 그제야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아르파공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다.
…그게 끝이었다.
감자죽을 한 솥 다 퍼먹은 사냥꾼은 시간이 없다며 일어났고 이내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눈보라 속으로 걸어 나가 버렸다.
“신세를 졌소.”
그 외에 어떠한 감사인사도 작별인사도 따로 없었다.
사냥꾼과 여자아이는 나타났을 때처럼 그저 홀연히 사라져 버렸을 뿐이다.
아르파공이 내준 칼을 들고서.
‘…이, 이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마몬은 시뻘겋게 물든 얼굴로 생각했다.
무려 30억 골드라는 거금 앞에서도 팔지 않았던 칼이다.
그리고 분명 스승은 ‘장인의 신념은 비싸다’라고 했다.
결코 이렇게 처음 만난 나그네에게 대충 줘 버릴 만한 잡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을 제일가는 거부가 건네는 거금을 마다하고 정체도 모를 낯선 떠돌이에게 공짜로 퍼 주는 것이 장인의 신념이란 말인가?
마몬은 그에 동의할 수 없었다.
‘…스승님이 만든 물건은 그 가치를 아는 자에게 주어져야 한다!’
생각을 마친 마몬은 재빨리 코트를 입었다.
“얘야. 어디를 가느냐? 날도 이리 추운데.”
아르파공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마몬은 공손한 태도로 잠시 일이 있어 나간다고 둘러댔다.
스승이 보지 않는 틈을 이용해서 방금 나간 사냥꾼 부녀를 뒤쫓을 계획이다.
‘칼의 가치에 합당한 금액을 받아오거나 적어도 물건을 돌려받기라도 해야…….’
이래저래 마음이 다급한 마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