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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427화 (427/1,000)
  • 428화 이별의 밤 (1)

    “자, 방역합니다.”

    나는 횃불을 들어 식량창고 안의 가축 시체들을 향해 던졌다.

    …쿠르륵!

    썩은 시체들이 모두 불탄다.

    녹색 안개가 눈에 띄게 옅어졌다.

    웨에에에엥!

    미처 도망가지 못한 파리들 역시도 매연에 삼켜져 버렸다.

    [……흐응.]

    쥬딜로페는 팔짱을 낀 채 연기 속에 갇혀 고통스러워하는 파리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 옆에서는 몇 마리인가의 풍뎅이 병사들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소근소근.]

    쥬딜로페와 싸락우박 풍뎅이들은 한 곳에 둘러앉아서 무언가 자기들끼리 토론을 벌인다.

    때론 몇몇 풍뎅이들이 손을 들고 의견을 말했고 때론 쥬딜로페가 작은 주먹으로 풍뎅이들을 쥐어박는다.

    “자기들끼리 잘 노네.”

    나는 쥬딜로페의 행동에서 한동안 신경을 끄기로 했다.

    원래 애들은 적당히 방임해야 잘 크는 법이니까.

    …뭐 아무튼.

    역병의 근원지를 깔끔하게 청소한 나는 발걸음을 돌려 벨럿에게로 향했다.

    이제 보상을 받을 시간이 왔다.

    *       *       *

    [고맙네! 병이 나으니 몸이 좀 움직이는군!]

    아르파공은 망치를 휘두르며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따앙!

    눈앞에 있는 불카노스 주괴를 망치로 한번 두드린 그는 반탄력에 의해 파르르 떨리는 손목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다.

    [그래, 자고로 드워프는 두드려야지. 두드리지 못하면 드워프가 아니지, 암.]

    고르딕사의 저주에 의해 드워프로 변하기 전에도 무기 장인이었던 아르파공이다.

    그는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들이 맡긴 불카노스, 내 책임지고 제련해 주지. 장담컨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걸세.]

    나는 그의 하반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리가 불편하신 것 같은데, 가능할까요?”

    [염려 말게나, 스승님의 옆에는 내가 있으니.]

    그러자 옆에 있던 벨럿이 일어나 아르파공이 앉아 있는 휠체어를 잡았다.

    “좋아. 그럼 맡기지.”

    나는 아르파공의 공방에서 나왔다.

    밖에서 제련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윤솔과 드레이크와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하기로 했다.

    “…예전에 데스나이트가 살던 ‘칼침의 탑’ 기억나지?”

    내 말을 들은 윤솔과 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룡 오즈 레이드에서 함께했던 도로시 원정대의 멤버 중 1人 ‘사자심왕 리차드’, 그를 어찌 잊겠는가?

    조디악과 적폐망령이라는 두 걸림돌 때문에 유난히 고생이 많았던 관문이었다.

    당시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도 S급 몬스터인 ‘인간 지네’에게 꽤나 고전했었던 바 있기에 더더욱 잊지 못할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런 아이템을 얻었었지. 기억나?”

    나는 인간 지네를 잡고 얻은 아이템을 꺼냈다.

    -<‘낮으신 분’의 공문> / 재료 / ?

    죽음룡 오즈가 자기 군단 휘하의 장군들에게 보낸 격서(檄書).

    안에는 엄청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예전에 인터넷에 공개했던 아이템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토마몬격문(討Mammon檄文)>

    -나 흑룡족의 수장이자 모든 죽은 자들의 왕 ‘오즈(Odd’s)’가 너 하잘 것 없는 철장이에게 알리니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고집하여 여우같은 의심을 갖지 않도록 하라.

    미천한 지하의 미물 출신으로 주제를 모르고 오만방자하기가 극에 이르러 결국 지엄하기 그지없는 용의 영토를 침범하메 그 무엄하기가 하늘을 찌르고 다시 바닥에 닿는도다.

    너의 죄는 모든 종족이 모두 알아 백일하에 죽이고자 할 뿐 아니라 땅 속의 귀신들과 광물들도 벌써 암암리에 너를 없애고자 의논하고 있도다.

    이 격문을 읽게 된다면 그때라도 주제를 깨달아 조속히 자결하여 천하에 폐를 끼치지 않게끔 하라.

    나는 이 편지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대격변 이후 제 7분쟁지역이 용과 악마의 전쟁터로 변했어야 했어. 죽음룡 오즈와 대악마 마몬이 여기에서 전쟁을 벌였겠지.”

    하지만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우리가 리치 왕에 이어 데스나이트까지 꺾은 뒤 죽음룡 오즈마저 거꾸러트렸으니 불사의 군단이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와해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불타는 군단의 지휘자인 마몬은 전쟁 상대를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목표를 잃고 당황하고 있는 마몬에게로 곧장 가서 놈을 잡아먹을 생각이야.”

    마몬이 어디에 있을지는 뻔하다.

    죽음룡 오즈가 몸을 숨기고 있는 죽음길 나락의 대척점에 있겠지.

    그곳은 제 7분쟁지역으로부터 그리 멀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아까 식량창고에서 구더기를 죽였더라면 이 계획은 실패했을 거야. 벨제붑이 끼어들기라도 하면 일이 무지하게 곤란해지니까.”

    파리 대왕은 지금의 나로서도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할 만한 강적이다.

    내 말을 들은 윤솔과 드레이크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이크가 물었다.

    “마몬이 있는 정확한 위치는 아나?”

    “…몰라. 하지만 몰라도 갈 수 있어.”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언제나 그렇듯, 드레이크는 내게 ‘이 정보는 어디서 얻었냐’, ‘믿을만 한 정보냐’ 등의 시시콜콜한 질문들 따위는 늘어놓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를 중얼거렸을 뿐이다.

    “좋아. 파란만장하겠군. 오즈 때처럼.”

    …음, 아마도 그렇겠지?

    그때, 윤솔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오즈 때보다는 레이드 시간이 훨씬 단축되겠네! 우리는 오즈 전을 겪기 전보다 더 강해졌잖아. 레벨도 많이 올랐고. 장비도 좋아질 것이고.”

    “그야 당연하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그 말이 맞다고 맞장구라도 치듯 공방의 문이 열렸다.

    [다 되었네, 친구들.]

    벨럿이 작업 완료를 알려 온 것이다.

    “오오오!”

    나는 명장과 명재료에 의해 새롭게 탈바꿈한 아이템들을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먼저 윤솔의 하프가 선보여졌다.

    -<대천사의 랩소디> / 양손무기 / A+

    멸족(滅族)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결함을 잃지 않았던 한 대천사의 유품.

    -공격력 +12

    -귀속 (특수)

    -융합 (특수)

    -특성 ‘힐’ 사용 가능 (특수)

    -특성 ‘신성불가침’ 사용 가능 (특수)

    윤솔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아기천사의 쿠잉’이 불카노스에 의해 새롭게 진화했다.

    흰 불꽃에 의해 타오르는 듯한 외형의 하프.

    크기는 커졌지만 무게는 더욱 가벼워졌다.

    사용 가능한 특성은 그대로였고 스텟 역시도 변한 게 없었지만…딱 하나가 변했다.

    ‘신성불가침’ 특성으로 인한 상태이상 확률이 모두 두 배로 상승한 것이다.

    기존에 무조건 100% 들어가던 ‘마비’ 상태이상은 그대로였지만 50%의 확률로 들어가던 ‘공포’ 상태이상의 발동확률이 100%로 상승했다.

    그 외 25%로 들어가던 ‘환각’의 발동확률이 50%, 12%로 들어가던 ‘실명’의 발동확률이 24%, 6%의 확률로 들어가던 ‘과부하’의 발동확률이 12%, 3%로 들어가던 ‘영구저하’의 발동확률이 6%, 1%로 들어가던 ‘즉사’의 발동확률이 2%로 대폭 상향 조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드레이크 역시 불카노스로 제작된 마름쇠와 화살촉을 갖게 되었다.

    배드엔딩의 외골격을 깎아 만든 화살대에 불카노스 화살촉을 달자 드레이크의 쇠뇌가 가진 위력들이 몇 배로 상승했다.

    “후후후. 마음 같아서는 내 쇠뇌들과 마름쇠들과 화살들의 업그레이드 된 스펙을 모조리 나열해서 보여 주고 싶지만……시간이 없으니 이만 하지.”

    드레이크는 평소 자랑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아이템 소개는 이쯤해서 끝내기로 한다.

    아르파공은 땀을 닦으며 말했다.

    […휴, 예전이었으면 더 잘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구먼. 다리가 이 모양이라.]

    그는 휠체어에 탄 채 두 발을 들어올렸다.

    무릎 아래부터 텅 비어 있는 그의 두 다리.

    나는 아르파공에게 물었다.

    “…다리는 어쩌다 그렇게 되신 겁니까?”

    내가 묻자 아르파공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것은 옆에 서 있던 벨럿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다소 무례한 질문일 수는 있지만 드워프를 상대로는 차라리 이렇게 직설적으로 묻는 것이 낫다.

    아르파공은 나직한 어조로 한숨을 쉬었다.

    [제자를 잘못 두었기에 벌어진 비극일세. …아니, 내 잘못이라고 해야 옳겠군.]

    그는 이 이야기가 나온 것이 마치 큰 실수라도 되는 양 많이 움츠러들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이 화제로 이야기를 계속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야 있나? 나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나 다름없는데.

    ‘…사실 불카노스 제련은 핑계일 뿐이었지.’

    내가 이곳 데린쿠유를 찾아온 ‘진짜’ 목적은 지금부터였다.

    “아르파공 씨. 이 아이템을 알아보시겠습니까?”

    나는 인벤토리 저 깊숙한 곳에 숨겨 놨던 것을 끄집어냈다.

    그것은 내가 전 재산을 탕진해가면서 얻은 히든 피스.

    -<불완전한 황금만능주의자> / 의자 / A+

    세계 제일의 대장장이 몰리에르 아르파공이 만들어낸 귀물(鬼物).

    화려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 의자로 한번 앉으면 빈털터리가 될 때까지는 일어날 수 없다.

    자신의 부유함을 자랑하기에 이만한 의자가 또 없을 것이다.

    -어둠 속성 저항력 -50%

    -‘수전노’ 특성 사용 가능

    이 화려한 의자를 얻기 위해 나는 시작의 마을 유토러스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었었다.

    그리고 전 세계 최고의 갑부 스크루지 후작에게서 이 의자를 넘겨받았다.

    마몬이 전 세계 부자들의 재산을 강탈하기 위해 뿌렸던 흉물스러운 아이템.

    이 의자를 본 아르파공의 표정이 참담함으로 물들었다.

    […알지, 알다마다. 어떻게 몰라볼 수 있겠나. 내가 만든 물건인 것을.]

    그는 떨리는 손으로 황금만능주의자를 쓰다듬었다.

    [젊었던 시절 고르딕사를 퇴치하기 위해 만든 도구였지. 그때까지만 해도 유순했던 고르딕사였지만… 혹시 폭주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예방책으로 만든 것이었어.]

    이 의자는 가이악사와 고르딕사의 총투표가 벌어지기 전부터 아르파공이 제작하던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만약 이 의자가 결전의 날 당시에 제 자리에 있었더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드워프가 되는 일도 없었으리라.

    […하지만 내 제자가 이 의자를 가지고 사라져 버렸기에 결국 고르딕사의 폭주는 막을 수 없었네. 그 때문에 괜히 이 아이가 고생길을 겪게 되었어.]

    아르파공은 눈을 감은 채 옆에 있던 벨럿의 손을 잡았다.

    벨럿이 혼자서 황천의 유극에 남아 겪었던 고독을 생각하면 참으로 기구한 일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물었다.

    “누굽니까? 스승의 다리를 그렇게 만들고 의자를 훔쳐 달아났으며 사제까지 고생길로 몰아 넣은 못된 제자가.”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도 궁금한 모양인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이윽고, 바짝 마른 아르파공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무얼 더 숨기겠는가? 한때 내 제자이자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던, 지금은 그 어떤 사악한 존재보다도 더욱 더 심각하게 타락해 버린 존재…….]

    옆에 서 있던 벨럿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린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가운데, 아르파공은 힘겹게 말을 끝마쳤다.

    […그 이름은 바로 ‘마몬’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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