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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426화 (426/1,000)
  • 427화 지하도시의 역병 (5)

    나는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지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보스 몬스터는 참으로 기괴하게 생긴 외형을 가지고 있다,

    (※식사 전 레이드라면 필히 주의할 것!)

    <벨제붑의 아들 ‘구더기 살점토막’> -등급: A+ / 특성: 맹독, 하수인, 어둠, 과식, 하찮음, 앙버팀, 질긴목숨, 오염된 피, 혈족전생

    -서식지: 데린쿠유 식량창고, 설원 북동지대, 구더기 언덕

    -크기: 10m.

    -모든 욕망과 본능이 거세된 채, 오로지 폭식(暴食)에 대한 갈망으로만 움직이는 살덩어리.

    먹고 싸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놈의 외형은 ‘어보미네이션(Abomination)’ 그 자체였다.

    하얗고 또 어느 정도는 투명한 살덩어리 한 토막으로 이루어진 바디, 쭈글쭈글 주름진 피부와 그 위로 빼곡하게 뚫린 숨구멍.

    불쾌할 정도로 팽창한 복부와 그 주변을 덕지덕지 휘감고 있는 튼살 자국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구더기의 외형에서 더 새로울 것도 없는 모습이었지만 놈의 압도적인 사이즈에서 오는 그로테스크함은 가히 새롭고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놈은 말라비틀어진 소의 사체를 젖병마냥 쭉쭉 빨아댔고 그럴 때마다 꽁무니의 커다란 항문에서 검푸른 설사를 쭉쭉 짜 밀어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똥 만드는 기계가 아닐 수 없군.”

    나는 살점토막 구더기의 비대한 몸과 그것이 빚어내는 왕성한 생리현상에 감탄하고 말았다.

    한편,

    …웨에에에에엥!

    수없이 많은 파리들이 구더기의 항문에서 밀려나온 역겨운 배설물들을 온몸에 묻힌 채 허공을 수놓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말라붙은 배설물 가루들이 분진처럼 뿌옇게 일어나 녹색 안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렇다.

    지금 우리의 눈앞에 퍼져 있는 저 거대한 구더기와 놈의 작은 형제들이 데린쿠유에 역병을 퍼트린 장본인들인 것이다!

    “어진. 죽이면 되나?”

    “…….”

    드레이크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어왔다. 그답지 않게 약간은 서두르는 듯한 모양새.

    옆에 있는 윤솔도 아무 말 없는 걸로 보아하니 악취 때문에 힘겨운 듯하다.

    “음, 일단 다들 싱크로율 센서를 조금 내리는 것이 좋을 거야.”

    게임 속이라서 악취를 걸러 맡을 수 있어 다행이다.

    늘 동화율을 최상으로 설정하고 게임을 돌리던 내가 스스로 동화율을 낮추는 것은 오랜만이다.

    한때 악마의 만찬 호의 어창에 탔을 때도 생선 비린내를 참으며 버텼었는데… 이번 것은 아무리 나라도 조금 힘들다.

    마스크를 쓰고, 센서 민감도를 하향 조정하고, 가능한 입으로만 숨을 쉬는 동시에 후각도 어느 정도 적응시켰지만 기분 나쁜 냄새는 여전했다.

    “한 일주일 정도 양치를 안 한 사람의 아침 입냄새를 맡는 느낌이야. 아니면 침이 말라붙은 냄새라거나.”

    필터를 했는데도 이 정도다.

    윤솔의 비유를 들은 나와 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 품속의 쥬딜로페 역시도 크게 불쾌한 표정으로 눈앞의 살점토막 구더기를 노려본다.

    -띠링!

    <기분 나쁜 것을 구경한 여왕이 불쾌감을 토로합니다>

    <당신과의 호감도가 약간 하락했습니다>

    아니, 이게 내 냄새냐고요?

    왜 나와의 호감도가 떨어지는 건데.

    황당한 마음에 시선을 내리자 쥬딜로페가 뾰로통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팩 돌리는 것이 보인다.

    그녀는 이내 내 품 속으로 쏙 들어가 숨어 버렸다.

    “아, 나 진짜 황당하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누구? 저요?]

    이내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놀랍게도 말을 한 것은 눈앞에 있는 살점토막 구더기였다!

    놈은 거대한 몸을 꾸물거리며 우리를 향해 외쳤다.

    [나는 당신들을 발견하고야 말았습니다!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도처에 살육과 강탈, 광란이 벌어질 것입니다!]

    생긴 것과 다르게 의외로 정중한 말투였다.

    “저 자식, 말을 할 줄 알잖아?”

    “엥? 그것도 꽤나 젠틀한데요?”

    드레이크와 윤솔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손사래쳤다.

    “번역 오류야 저거. 원래는 ‘누구? 나 말이냐?’, ‘나는 봤다’, ‘도망 못 간다!’, ‘살육! 학살! 포식!’ 정도로 번역되어야 하는데…….”

    살점토막 구더기의 대사를 번역할 때 일손이 부족해 잠시 외주를 맡겼다가 벌어진 참사로 기억하고 있다.

    ‘꽤 오래 이어졌던 오류로 기억하는데, 아마 나에게 사냥당하고 난 뒤부터는 패치가 되든가 하겠지 뭐.’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바로 레이드에 돌입했다.

    살점토막 구더기는 생긴 그대로의 단순한 공격패턴을 가지고 있다.

    1. 데미지를 주면 그 데미지의 10%를 10초에 걸쳐 회복함.

    2. 데미지를 입으면 1초간 방어력이 1% 증가함. 중첩 가능.

    3. 파리를 잡아먹을 때마다 HP를 회복함.

    4. 주 공격은 시독을 토해 놓으며 돌진 후 좌우로 구르기.

    ‘하찮음’ 특성과 ‘질긴목숨’ 특성을 이용해 아쉬운 HP를 최대한 연장하고 ‘맹독’ 특성을 응용해 공격해 온다.

    덩치가 있어서 단순 피격 시 물리 데미지는 꽤나 아픈 편이었다.

    “너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 녀석에게 딱 좋은 것이 있지.”

    드레이크는 유치원을 방문한 산타클로스처럼 인자하게 웃으며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수많은 마름쇠들이 바닥에 뿌려졌다.

    살점토막 구더기는 가뜩이나 바닥과 접촉하는 면적이 넓어 마름쇠 류를 이용한 공략이 효과적이다.

    피픽! 피피픽! 뿍!

    마름쇠의 날카로운 가시들이 살점토막 구더기의 두꺼운 가죽을 뚫고 안쪽의 연한 살점을 푹푹 파고든다.

    [고통스럽습니다! 이런 고통은 알에서 깨어난 이래 처음이네요! 아버지! 저를 보고 계시다면 정답을 알려 주십시오!]

    살점토막 구더기는 고통에 신음하며 젠틀하게 포효했다.

    …드드드드!

    놈은 주변을 날아다니는 파리 떼를 한 입 집어삼킨 뒤 HP를 어느 정도 회복했고 다시 돌진 준비를 끝마쳤다.

    [나는 구웨에에엑! 하고 포효합니다! 그리고 달려서 당신에게 갑니다! 너에게 닿기를!]

    살점토막 구더기가 맹독 돌진을 감행해 왔다.

    추악하게 흘러내린 살점들이 비대한 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툭툭 터져나간다.

    그렇게 생겨난 튼살 자국이 뜯어지며 내장과 내장 사이에 흐르는 역겨운 즙이 줄줄 새어나오고 있었다.

    “…음, 더러운 비주얼 때문에 공략 난이도가 한 랭크 높게 평가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살점토막 구더기는 단순한 공격패턴과 그리 강하지 않은 스탯, 죽였을 때 얻는 빵빵한 아이템 보상 등 좋은 조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아쉽게도 이런 비주얼 때문에 몇몇 변태 고인물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는 비운의 보스 몬스터이다.

    (참고로 훗날 여자 플레이어들의 기피대상 1순위 후보에 오르게 되는 몬스터이기도 하다)

    “데린쿠유의 정화를 위해 죽어줘야겠다.”

    어린애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지만 그것이 파리의 유체일 경우에는 제외다.

    퍼억!

    나는 두 개의 깎단을 들어 살점토막 구더기의 튼살 자국을 헤집었다.

    상대적으로 얇은 가죽이 북- 소리를 내며 찢어졌고 그 안쪽의 연한 살점들이 뭉텅 으깨진다.

    역한 냄새가 나는 내장 즙과 혈액들이 펑펑 뿜어져 나왔다.

    [도움! 내 후라이드 치킨 가게! 파리 대왕!(Help! My papa is Beelzebub!)]

    살점토막 구더기는 고통에 몸부림친다.

    …웨에에에에엥!

    수많은 체체파리들이 나를 향해 몰려들었지만.

    [후웁-!]

    악취 때문에 화가 난 쥬딜로페가 파리들의 접근을 일절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싸락우박 풍뎅이들이 얼음벽처럼 포진한 채 주변의 파리들을 막아내고 있는 덕분에 우리는 파리 떼에 방해받지 않고 살점토막 구더기를 처치할 수 있었다.

    퍼억!

    마지막은 죽음룡 오즈의 비늘을 이용한 반사 데미지다.

    최후의 돌진을 그대로 돌려받은 살점토막 구더기는 전신이 터져나간 채 바닥에 퍼져 버렸다.

    묽은 죽처럼 흘러내린 구더기 살점이 온 바닥을 뒤덮었다.

    “…잡았나?”

    드레이크는 재빨리 상태창을 켜 스탯을 점검했다.

    경험치가 꽤 오른 것을 보니 레이드가 순조롭게 끝난 모양.

    하지만.

    …꿈틀!

    아직 이 흉물스러운 거체 속 맥(脈)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I'm still alive)!]

    살점토막 구더기는 누더기가 된 몸을 움직여 최후미의 환기구를 향해 도망치고 있었다.

    휘이이이잉…

    그 구멍만은 바람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상과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어딜 도망가려고?”

    드레이크는 천공섬에서 가챠로 얻은 단검을 뽑아들고 살점토막 구더기에게 다가갔다.

    이번 공격으로 일격에 즉사시킬 심산인 듯싶다.

    하지만.

    “우왓! 진정해, 진정해.”

    나는 드레이크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이번 레이드는 여기서 끝! 이만 접자고.”

    “왜 그러나 어진? 이제 다 잡은 바닥인데.”

    드레이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봐. 예전에 부유섬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잖아?”

    “……?”

    “동굴 속의 거미 말야. 함부로 건드렸다가 어떻게 됐었지?”

    내 말을 들은 드레이크는 그제야 말뜻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드레이크는 죽이면 안 되는 어그로 몬스터를 건드렸다가 낭패를 본 바 있었다.

    부유섬의 철거미, 천공섬의 막둥이, 데린쿠유 식량창고의 살점토막 구더기… 다 비슷하다.

    건드리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위 몬스터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바로 그렇다.

    “…지금 저놈을 죽이면 바로 ‘벨제붑’이 나타날 거야.”

    그렇게 되면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이 무저갱을 살아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결국. 우리는 누더기가 된 구더기가 환기구를 통해서 도망치는 것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역병만큼이나 찝찝한 승리였다.

    “그래도 역병 정화에는 성공했네.”

    윤솔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녀가 신성불가침 특성과 힐 마법을 곳곳에 뿌린 결과 시독은 많이 사라졌다.

    미친 듯이 끓던 파리 떼도 전부 다 얼어붙거나 살점토막 구더기를 따라 도망쳐 버렸다.

    “자, 이제 벨럿에게 돌아가자고.”

    나는 레이드 종료를 선언했다.

    찜찜하지만 어쩔 수 없다.

    벨제붑의 분노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역병 정화를 무사히 마쳤다는 것에 의의를 둘 수밖에.

    한편 윤솔은 걱정스러운 듯 묻는다.

    “저 구더기가 벨제붑에게 가서 다 이르지 않을까? 자기를 다치게 했다고.”

    “별 일 없을 거야. 악마는 자기 새끼가 다친 것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거든. 오히려 무능한 놈이 살아 돌아왔다며 혀를 차겠지. 뭐, 죽였다면 문제가 되었겠지만 살려 보냈으니 괜찮아.”

    “가다가 깎단 때문에 죽으면 어떻게 해?”

    “그럴 줄 알고 파리 떼를 다 죽이지 않고 남겨 놨잖아. 가는 도중에 파리 떼를 잡아먹어 가면서 HP를 회복하겠지 뭐.”

    다 철저하게 계산한 뒤 벌인 행동이다.

    윤솔과 드레이크가 내 철두철미함에 혀를 내두르는 동안 나는 머릿속에 다음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자, 역병 문제를 해결했으니 이제 돌아가서 보상을 받을 차례야.”

    나는 벨럿과 그녀의 스승 아르파공에게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불카노스를 이용한 전력 상승을 꾀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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