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24화 (424/1,000)
  • 425화 지하도시의 역병 (3)

    드머프 몰리에르 아르파공.

    드머프 벨럿의 스승이자 이 시대 최고의 대장장이라는 설정을 가진 NPC이다.

    […쿨럭! …쿨럭!]

    하지만 세계 최고의 대장장이라는 이름답지 않게 지금의 그는 너무나도 약해 보였다.

    병색이 완연한 모습, 심지어 두 다리는 무릎 아래부터 사라져 있었다.

    그는 뿌연 녹안개를 헤치고 지하도시 한켠에 있는 자신의 공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보게들! 벨럿! 벨럿이 왔네!]

    아르파공이 외치자 골목 곳곳에 있던 드워프들이 하나둘씩 얼굴을 내밀었다.

    하나같이 다 무쇠로 된 얼굴가죽과 보석으로 된 눈,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드워프들이다.

    [오오 벨럿! 이게 꿈이냐!]

    [돌아왔구나, 이 녀석!]

    [벨럿 언니! 보고 싶었어!]

    수백 살이나 된 벨럿도 이곳에서는 꼬맹이 취급이다.

    하지만 벨럿은 수많은 사람들의 환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나아지지 않았다.

    […세상에 다들 상태가 왜!?]

    그도 그럴것이, 드워프들은 하나같이 다 역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녹빛으로 물든 몸은 극도로 굼떠져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몸이 광물로 되어 있었기에 역병의 효과가 거의 듣지 않아 망정이지 일반 사람이었다면 죽어도 벌써 죽었을 것이다.

    “윽! 여기는 거의 역병지대 수준인데!?”

    “…어진. HP 깎이는 속도가 심각하다.”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 해독 포션을 연신 들이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바실리스크를 죽이고 맹독 특성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체력이 깎일 정도라면 정말 심각한 역병인 것이다.

    한편.

    “역병 때문에 불카노스 제련이 힘들 수도 있겠군.”

    나는 손수건으로 입을 막은 채 데린쿠유 전체를 둘러보고 있었다.

    역병이 창궐하고 있는 지하도시, 아래 깊은 무저갱 속부터 피어오르는 독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나는 아르파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제자인 벨럿과 회포를 풀고 있었다.

    [너와 생이별한 뒤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단다. 이제 죄책감을 갖지 말거라, 너는 그 당시 최선의 투표를 한 것이니. 마을 사람들 그 누구도 너를 원망하지 않는단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저 친구들이 고르딕사를 물리쳐 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스승님.]

    벨럿의 발을 들은 아르파공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내 가여운 제자를 돌보아 주어 정말 고맙소. 거기에 우리 드워프 족의 오랜 숙적인 고르딕사까지 처치해 주었다니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딱히 은혜를 갚으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꼭 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정말 따악히 보답을 바라거나 해서 그러는 건 아니구요.”

    [오오, 아무렴.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오.]

    아르파공은 우리를 자신의 공방 안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모든 드워프들의 환대를 받으며 데린쿠유 안쪽 깊은 곳에 있는 아르파공의 작업실로 향했다.

    [이곳은 밀실인지라 역병 안개도 미치지 못하지.]

    아르파공은 몇 중으로 된 황토문을 열고는 우리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어스름한 버섯 불빛이 어두운 석실 안을 비춘다.

    우리는 벨럿과 아르파공을 중심으로 약간씩 떨어져 앉았다.

    나는 바닥, 윤솔은 푹신하게 생긴 버섯의 갓, 드레이크는 아직 물렁한 점토 덩어리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드워프 사제의 해후를 감상했다.

    [스승님! 와아앙!]

    벨럿은 스승과 둘이 남게 되자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소녀처럼 울며 스승의 몸 전체를 살핀다.

    아르파공은 힘없이 웃었다.

    [허허허, 괜찮아 이 녀석아. 드워프가 병 걸려 죽기야 하겠니.]

    […그치만!]

    [걱정 말거라. 그냥 힘이 줄어들고 시력과 청력이 약해지며 밤마다 찾아오는 끔찍한 격통과 함께 악몽에 몸서리치면서 잠 못 드는 것도 모자라 몸 전체가 조금씩 바스라져 내리는 동시에 모든 일상 행동이 극도로 굼떠졌을 뿐이지 다들 수명에는 지장이 없단다.]

    …그쯤 되면 그냥 죽겠다고 말하는 거나 다를 바 없지 않나?

    하지만 말 그대로다.

    드워프는 몸이 광물로 되어 있어서 역병 때문에 죽거나 하지는 않지만 행동에 이런저런 제약이 심해진다.

    인간의 역병은 드워프에게 있어 저주에 가까운 디버프 증상으로 발병하는 것 같았다.

    차라리 인간은 죽어서 썩기라도 하지, 드워프들은 죽지도 못한 채 이 지하도시 안에서 영원한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아르파공은 우리를 향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식사라도 좀 들겠나?]

    “…음. 저희는 밥 먹고 왔어요.”

    나는 또 수은이나 불에 달군 주괴가 나올까 봐 짐짓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렇게 사양하지 말게. 은인에게 식사 한 끼 대접 못해서야.]

    아르파공은 석실 구석의 항아리를 뒤지더니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와 검은 빵을 꺼내들었다.

    역병에 오염되지 않은 식량이었다.

    의외의 먹거리에 모두가 놀라자 아르파공은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도 껄껄 웃는다.

    [우리들도 다 한때는 인간이었는데 설마 드워프들이 먹는 걸 내주겠나?]

    그러자 벨럿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 나는 너무 어린 나이에 드워프가 되어서 인간 시절의 식문화가 잘 기억이 안 난다네. 그래서 그런 거야!]

    벨럿의 말투는 다시 점잖아졌다.

    스승을 대할 때와 우리를 대할 때의 말투가 너무 차이나서 괴리감이 들 정도다.

    우리는 조악한 먹거리로나마 식사를 해 HP를 채웠다.

    “슬슬 본론을 꺼내도 될까요?”

    나는 아르파공에게 말을 걸었다.

    밥 먹을 때 일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 조금 머쓱했지만 시간이 별로 없으니 서둘러야 한다.

    턱-

    내가 버섯으로 된 테이블 위로 주괴 몇 개를 올려놓자 아르파공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흐음, 뭐지 이건? 오리하르콘인가? 아니야, 그렇다기엔 너무 단단해. 미스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볍군. 마치 용비늘과 비슷한 물질 같은데.]

    역시 명장은 명장이다. 불과 몇 초 뒤, 아르파공은 이 주괴들의 정체를 간파했다.

    [……불카노스로군.]

    복잡한 상념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벨럿이 두 손 드는 바람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흐음. 그럴 만도 하지.]

    “이것으로 하프의 부속품과 화살촉을 제작하고 싶습니다.”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겠군.]

    말을 마친 아르파공은 한참 동안이나 불카노스 주괴들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는 몇 번인가의 기침을 토해 낸 끝에 판단을 내렸다.

    [나로서도 무리라네.]

    “……!?”

    윤솔과 드레이크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벨럿의 추천이 있어 기껏 이 먼 지하도시까지 내려왔거늘!

    하지만 아르파공은 이미 판단을 내린 듯싶었다.

    [몸이 멀쩡했었다면 모르겠지만, 이런 상태로는 망치조차 제대로 들 수 없으이. 몸이 이렇게 굼떠서야 무얼 하겠나?]

    한 마디로 역병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나는 앞으로 상체를 조금 기울였다.

    “데린쿠유의 역병을 없애드린다면 불카노스 무기 제작이 가능하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다면야 해 볼 만하겠지. 하지만 이 역병은 굉장히 오래된 것일세. 또한 강력하기 그지없지. 도처에 자욱한 독안개 때문에 우리도 발원지를 아직 찾지 못했어.]

    “그 점은 걱정 마십시오.”

    나는 불카노스 주괴를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럿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따라 몸을 일으킨다.

    […어쩔 생각인가?]

    “지하도시의 역병을 없애 주지. 스승님이나 잘 모시고 있으라고.”

    [그, 그게 가능하겠나?]

    “고르딕사를 죽이러 갈 때도 그렇게 물었었지?”

    내가 씩 웃자 벨럿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       *       *

    나는 녹색 안개가 창궐하는 데린쿠유의 외곽으로 향했다.

    안내인이 없다면 바로 길을 잃어버릴 지하굴.

    몇몇 드워프들이 극도로 굼뜨고 무기력한 기색으로 버섯바위 밑에 주저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아마 이곳이 인간들의 마을이었다면 훨씬 더 상황이 끔찍했으리라.

    “으음, 어진. 죽음룡 오즈와 겨룰 때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겪은 적이 있는데…….”

    드레이크가 하는 말이 맞다.

    우리는 수많은 언데드들과 싸워 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살아 있는 무언가가 부패하면서 나는 악취와 독이다.

    “흙과 광물의 몸을 아프게 만들 정도면 심각한 시독이지. 자연적인 것은 절대 아니야. 부자연 그 자체에 가깝지. 아주 부자연스러워.”

    나는 녹색 안개로 몸을 묻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자연의 섭리에 정면으로 거스르려고 하는 존재는 하나뿐이야.”

    윤솔과 드레이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로군.”

    “맞아.”

    나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합리적 의심을 넘어 킹리적 갓심이다.

    “최소 악마성좌급의 무언가가 이 역병에 관여하고 있어.”

    “설마 마몬인가?”

    “아니, 놈의 전공분야는 ‘지하광물’이지. ‘역병’이 아니야.”

    “그럼 다른 대악마겠군.”

    “내 생각은 그래.”

    마몬을 잡으려고 온 데린쿠유에서 전혀 다른 악마성좌와 얽혀들었다.

    ‘아마 그 상대는…….’

    애초에 일곱, 마몬을 제외하면 여섯 밖에 안 되는 용의자들이다.

    나는 머릿속에 거대한 파리의 흉상(凶狀)을 떠올렸다.

    마몬이라는 초강적을 적으로 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절대 얽혀들면 안 되는 존재.

    ‘…지금은 마몬 하나로도 벅차다. 조심해야겠어.’

    나는 숨을 참은 채 녹안개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내 확신을 굳혀주는 광경이 보인다.

    왱왱왱왱왱-

    굴 저 안쪽에서 녹색 안개들이 한층 더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기괴하게 꿈틀거리며 날뛴다.

    “꺄아아아악!”

    윤솔이 비명을 질렀다.

    녹색 안개가 뱀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

    드레이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녹색 안개들 속에서 미친 듯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거대한 파리 떼였다.

    통통하게 살찐 녹색의 몸뚱이, 붉게 번들거리는 두 개의 눈, 시커먼 털투성이의 다리.

    엄청난 수의 파리들이 우리를 향해서 더러운 몸을 부딪쳐오기 시작했다.

    <역병파리 ‘체체’> -등급: D / 특성: 벌레, 맹독, 어둠, 하수인

    -서식지: 데린쿠유 외곽, 설원 북동지대, 구더기 언덕

    -크기: 0.01m.

    -사람의 기름과 피로 살을 불린 파리.

    악취도 악취지만 지독한 병균을 옮기는 것으로 악명 높다.

    “독충이라.”

    나는 눈앞에 쫙 깔린 파리떼를 바라보며 침음성을 삼켰다.

    이놈들이 도처에 창궐하는 역병의 원인인 모양.

    “그렇다면 어딘가에 부화장이 있다는 소린데…….”

    나는 어둠과 녹색 안개에 가로막혀있는 지하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럴 때 가장 유용한 방식은 히드라를 소환해 파리 떼를 퇴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히드라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던데. 가능할까?’

    파리떼의 수가 너무 많은지라 곤란할 것도 같다.

    아무리 D급 몬스터라도 저렇게 많은 수가 모인다면 누구라도 질려 버리겠지.

    팟-

    윤솔이 방어막을 펼쳐 파리떼의 접근을 막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닥에 우수수 떨어져 쌓이는 파리들의 머릿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지하이기 때문에 불화살을 쓸 수도 없어 드레이크는 답답한 기색.

    그때.

    의외의 돌파구가 열렸다.

    [뿌우-]

    내 품 속에서 들려오는 볼 부푸는 소리.

    이 세상 모든 충왕종을 지배하는 자! (장래희망)

    와두두 여왕 쥬딜로페가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역병 파리들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