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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423화 (423/1,000)
  • 424화 지하도시의 역병 (2)

    우리는 벨럿을 따라 황천의 유극 1층으로 올라갔다.

    [먼 옛날,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타락한 고르딕사를 피해 이주할 때 오로지 나만은 이곳에 남았지. 내가 마지막으로 던진 표 때문에 고르딕사가 정령왕이 되지 못했으니까. 스승님은 나와 함께 남겠다고 하셨지만… 그것은 내가 거부했어.]

    어비스 터미널 북쪽으로 가는 지하통로.

    벨럿은 정과 망치로 암벽을 두드려 깨 바위문을 열었다.

    쩌억-

    두 조각 난 바위 너머에는 오래 전 피난민들이 걸어갔던 깊고 좁은 동굴이 있었다.

    [이제 고르딕사도 사라졌으니 다들 여기로 돌아와도 될 것 같아. 나도 스승님을 찾아뵙고 싶던 참이야.]

    황천의 유극 1층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어두운 암굴. 이곳은 전혀 다른 곳으로 통하는 히든 던전의 입구이다.

    -띠링!

    <히든 던전 ‘지하도시 데린쿠유 진입로’에 입장 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고인물>

    내가 암굴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알림음이 뜬다.

    “…히든 던전?”

    “…지하도시?”

    내 뒤에 있던 윤솔과 드레이크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던전의 끝에 불카노스를 제련할 수 있는 대장장이가 있어.”

    그리고 불카노스를 제련하여 무기를 강화해야만 마몬 레이드를 뛰기 수월할 것이다.

    나는 말을 마친 뒤 벨럿의 뒤를 따라 암굴로 진입했다.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       *       *

    지하도시 데린쿠유로 가는 길.

    그것은 지상에서 어비스 터미널로 내려오는 거리만큼이나 먼 길이었다.

    서늘하고 눅눅하며 좁고 구불구불한 암굴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벨럿이 눈에서 내뿜는 보석빛이 아니었더라면 감히 이 캄캄한 지하미로에 진입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벨럿의 이동속도가 너무 빨라서 자칫하면 그녀를 놓칠 수도 있다는 것 정도?

    ‘그나마 0세대 캡슐이 있어서 다행이네.’

    혹시나 해서 써 봤는데 먹혔다.

    천공섬의 메이즈를 공략할 때 유용하게 쓰였던 0세대 캡슐의 길찾기 버그가 데린쿠유에서도 똑같이 발생하고 있었다.

    치직… 치지직…

    하얀 실선으로 표시되고 있는 네비게이션 버그 덕분에 벨럿을 놓친다고 해도 길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모두들 축축한 동굴 벽에 볼을 대고 좁은 틈 사이로 몸을 우겨넣고 있을 때.

    푸드드드득!

    한 떼의 박쥐들이 공동 천장을 향해 요란하게 솟구친다.

    동굴이라면 어디든지 서식하는 D급 몬스터.

    “아앗!?”

    뒤를 따라오던 윤솔이 박쥐를 피하려다가 몸을 휘청했다.

    탁!

    나는 잽싸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후두둑… 후두둑…

    아래에 있는 심연으로 돌 부스러기가 굴러가는 소리.

    [조심해라. 이 동굴은 피난로이기 때문에 추격자를 빠트리기 위한 함정이 많아. 내가 밟은 곳만 밟으면서 와야 한다.]

    벨럿이 눈빛을 뿜으며 말했다.

    빛이 닿자 윤솔이 빠질 뻔 했던 구덩이가 드러난다.

    깊이 수십 미터의 커다란 구덩이가 예고도 없이 훅 자리잡고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자 구덩이 속에 무언가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멸망한 고대문명의 수호자> -등급: A / 특성: 암석, 팔랑귀. 하수인

    -서식지: 무통증 협곡 폐광지대, 지하도시 데린쿠유 진입로

    -크기: ?m.

    -영원한 심연 속에서 침입자를 경계하는 수문장.

    장인의 의지가 깃들어 있는 광물 주먹으로 침입자를 격퇴한다.

    “간만에 보네.”

    나는 대격변 이후 한층 더 위풍당당해진 골렘의 육체를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구덩이 속에는 몇 기의 골렘들이 어기적어기적 걸어 다니고 있었다.

    저 안에 떨어진다면 아마 좋은 꼴을 보기는 힘들겠지.

    벨럿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저 골렘들 역시도 한때 내 스승님이 제작하신 것들이지. 먼 나라의 여왕이 직접 의뢰했던 것들이야.]

    “혹시 그 여왕이 ‘이름 없는 여왕’인가?”

    […그때는 그녀도 이름이 있었지. 지금은 그렇게 불리나 보군.]

    벨럿은 계속해서 암굴 속을 기어갔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용암의 기운 때문에 무덥던 황천의 유극과는 달리 데린쿠유로 가는 길은 서늘하다.

    암굴 전체가 매우 어둡고 습하여 마치 묘지를 도굴하러 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어떤 곳은 사람 하나가 몸을 웅크리고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고 어떤 곳은 8차선 도로만큼이나 넓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사람 한 명 정도가 딱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다.

    “으아! 어지간한 사람은 폐소공포증 오겠다. 정신 건강에 너무 안 좋은데?”

    윤솔이 지친 기색으로 외쳤다.

    우리들 중 가장 한계에 빨리 부딪친 사람이 그녀다.

    그 바로 직후가 나, 그 다음이 드레이크였다.

    “어쩔 수 없지. 로그아웃한 뒤 좀 쉬었다가 다시 접속하는 수밖에.”

    나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데린쿠유는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갈 수 없는 곳이니 차근차근 진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       *       *

    그렇게 몇 번의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반복했을까?

    우리가 없을 동안 친절하게 기다려 준 벨럿 덕분에 결국 암굴행은 끝이 났다.

    네 번의 거대 공동, 두 번의 지하수 강, 그리고 서른 두 번의 골렘 구덩이 함정들을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갱도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띠링!

    <‘지하도시 데린쿠유’에 입장 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고인물>

    나는 암굴을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다.

    한 눈에는 절대 그 크기를 다 짐작할 수 없는 거대 지하도시 ‘데린쿠유’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컴컴한 공동 곳곳에 반짝이는 빛을 뿜어내는 버섯들의 군락이 보인다.

    그리고 그 빛무리에 비친 좁고 가파른 회랑, 막다른 길처럼 느껴지는 수많은 방, 검게 그을린 부엌과 수없이 뚫려 있는 지하통로들.

    거대한 공동들이 개미굴처럼 연결되어 있고 중간중간 교각들도 보인다.

    마치 흰개미 군락을 보는 듯한 엄청난 크기였다.

    광물을 파먹고 사는 드워프족의 식문화가 빚어낸 거대한 지하공동.

    그 누가 지하 수만 미터 아래에 이런 거대 도시가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헉!?]

    좁디좁은 암굴을 빠져나온 벨럿은 데린쿠유의 모습을 보고 헛바람을 집어삼켜야 했다.

    “……!”

    나 역시도 눈을 가늘게 뜰 수밖에 없었다.

    내 뒤를 따라 굴 밖으로 나온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 데린쿠유의 장엄한 풍경에 감탄하기에 앞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녹색 안개.

    한눈에 보기에도 역겨운 독안개가 데린쿠유의 공동 내부를 뿌옇게 부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솔이 역한 냄새에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 도시 공기가 원래 이렇게…탁해?”

    착한 성격 때문에 차마 역겹다는 말은 못하고 에둘러 말하는 그녀였다.

    츠츠츠츠…

    녹색 안개는 끈적하게 부유하며 우리에게로 다가온다.

    드레이크가 손을 휘둘러 녹색 안개를 흩어내며 중얼거렸다.

    “흠. 지하도시이니 공기가 탁한 것도 이해가 가는군.”

    하지만 벨럿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펄쩍 뛰었다.

    [데린쿠유는 지상과 수많은 환기구를 연결해 놓았기에 언제나 맑은 공기를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이곳을 이루고 있는 흙조차 숨을 쉬며 지상과 소통하지. 결코 이럴 리가 없는데…….]

    그녀의 말은 사실이다.

    이 거대도시의 모티프가 된 터키의 지하도시 ‘데린쿠유(Derinkuyu)’ 역시도 깊은 지하에 위치해 있지만 수많은 환기구와 기타 과학적인 시설 덕분에 늘 지상의 맑은 공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도시는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일까?

    나는 녹색 안개에 잠긴 지하도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역병이 돌고 있군.”

    HP가 천천히 줄어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기분 나쁜 독이 도처에 가득하다.

    ‘드워프들이 사는 지하도시에 역병이 돌 리가 없는데. 뭔가 이상하다.’

    역병이라는 것은 본디 살아 있는 것이 죽어 부패함에서 기인한다.

    몸이 흙과 광물로 이루어져 있는 드워프들이 사는 곳에서 이런 역병이 창궐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외부세력이 개입한 것이 아니라면 도저히…….”

    내가 턱을 쓰다듬고 있을 때.

    바로 그때.

    [그어어어어어…]

    녹색 안개를 헤치고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언데드인가!?”

    드레이크와 윤솔은 황급히 경계태세를 취했다.

    악의 고성 레이드를 한번 거쳐 봤기에 으레 이런 구역에서는 언데드가 출몰할 것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녹색 안개를 헤치고 튀어나온 것은 긴 수염을 가진 한 노인이었다.

    바짝 마른 몰골에 바들바들 떨리는 몸, 덥수룩하게 자란 흰 눈썹과 수염 때문에 얼굴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흐어어어어…]

    노인은 흐느적거리는 모양새로 우리를 향해 기어왔다.

    두 다리가 없어 두 팔로 바닥을 짚으며 오는 모양새가 실로 그로테스크하다.

    “꺄악! 좀비다!”

    “이런 너무 가깝군! 어쩔 수 없지, 근접전이다!”

    윤솔과 드레이크는 팔을 걷어붙이며 눈앞의 좀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딱!

    드레이크가 화살을 꺼내 가까이 다가온 노인의 머리를 때리는 순간.

    [아악! 왜 때리는 게야 이눔아!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이 병든 노인 잡네…!]

    좀비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

    윤솔과 드레이크가 화들짝 놀라 물러선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좀비가 아니라 그냥 늙은 거야. 이래 뵈어도 NPC지.”

    “아니. 누가 봐도 언데드, 누가 봐도 좀비인데!?”

    “겉보기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좋지 않아.”

    드레이크가 항의를 하는 동시에, 데린쿠유 저편을 정찰하고 있던 벨럿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스승님! 무사하셨군요!]

    우리의 무기를 제련해 줄 명장 ‘아르파공’의 등장이었다.

    …상태가 좀 별로이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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