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지하도시의 역병 (1)
나는 윤솔과 드레이크를 데리고 레이드를 뛰러 왔다.
스크루지 후작의 집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며칠 간 낙타를 타고 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곳.
이제는 친숙하게까지 느껴지는 지저의 균열 ‘어비스 터미널’이다.
부슬부슬…
비인지 지하수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뿌옇게 떨어지는 무저갱 속.
여기서 사냥할 수 있을 정도로 레벨이 높은 유저들은 아직까지는 거의 없는 듯싶다.
내려오는 동안 이빨곡괭이 아귀를 잡는 리자드맨 유저들은 몇몇 봤지만 그 밑의 지하종 몬스터들을 사냥하려는 유저들은 전무했다.
“뭐, 덕분에 편하게 내려올 수 있어서 좋네.”
이번에는 방해할 금은동 자매나 카렐린 강 파티, 조디악 파티도 없으니 걱정할 일이 없다.
햇빛이 전혀 비치지 않았지만 저 위 유황층에서 넘실거리는 불빛 때문에 서로의 얼굴을 식별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자, 그럼 또 들어가 보자고.”
나는 든든한 지원군들을 향해 손짓했다.
“여기 진짜 오랜만에 온다, 어진아.”
“옛날 생각 나는군. 고르딕사 레이드였지?”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 던전 안으로 다이브할 채비를 끝냈다.
<황천의 유극(遊隙)> -등급: A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요란하다.
우리는 누런 빛이 뿜어져 나오는 균열로 몸을 던졌다.
-띠링!
<‘황천의 유극 1층’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 고인물>
이 던전을 제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나다.
아카식 레코드의 기록 덕분에 뒤에 오게 될 수많은 사람들은 내 닉네임을 싫어도 외우게 될 것이다.
“풍경은 그대로네.”
나는 고개를 들어 던전 안을 살폈다.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대낮처럼 밝은 갱도, 벽면을 타고 흐르는 용암이 굽이굽이 꺾인 동굴길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금맥(金脈)도 여전하고.”
검붉은 지층 사이사이로 누런 흙들이 보인다.
예전에는 번쩍번쩍 빛도 내뿜고 그랬는데 이제는 고르딕사가 죽은 뒤라서 그런가 예전처럼 찬란하게 빛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금맥에는 여전히 낯익은 몬스터들이 꼬여 있었다.
<거꾸로 타는 귀뚜라미> -등급: B+ / 특성: 맹독, 유폭, 변온, 반전
-서식지: 분쟁지대 ‘썩고 불타는 땅’ 전역
-크기: 1m.
-좀 깊다 싶은 금광에는 널리고 널린 곤충이다.
금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본 적이 없는데 금광 밖으로 기어 나오는 것은 무수하게 많다.
금모래를 갉아먹고 사는 귀뚜라미.
검은 광택이 반짝이는 등에 통통하게 살찐 배때기는 황금색으로 빛난다.
이 귀뚜라미들 역시 여전하다.
금광 벽이나 천장에 붙어 사금을 갉아먹는 것 말고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먹이활동을 방해하지만 않으면 먼저 공격해 오지 않는 비선공 몬스터였기에 우리들은 옆으로 비선슬쩍 피해 이동했다.
그때.
윤솔이 손가락을 들어 동굴 저편을 가리켰다.
“앗, 어진아. 쟤 또 나왔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쩝- 쩝쩝- 우걱우걱…
중간 보스가 등장한다.
지하 2층으로 가는 지하계단 앞에 낯익은 얼굴이 걸터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황금광 청개구리> -등급: A / 특성: 맹독, 어둠, 절약, 과식, 역류성 식도염, 변온, 반전, 용오름
-서식지: 어비스 터미널 ‘황천의 유극 1층’
-크기: 4m.
-한평생 부모가 한 말을 반대로만 들어온 청개구리가 있었다. 부모는 죽기 전 산에 묻히고 싶었기에 자신을 물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부모를 잃은 슬픔에 겨운 청개구리는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모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다.
그리고 어느 비 오는 날, 부모의 묘지가 불어난 물에 쓸려 내려가자 청개구리는 구슬프게 울었다.
떠내려 가는 부모의 묘를 보며 청개구리는 독한 마음을 먹었다.
‘그래 이제 믿을 것은 돈뿐이야!’
청개구리라기보다는 두꺼비에 가까운 저 외형도 여전하다.
“…흐음.”
드레이크는 한때 이 몬스터를 향해 냅다 화살을 발사했다가 된통 당한 경험이 있는지라 눈살만 찌푸릴 뿐이다.
질긴 가죽과 육중한 덩치, 거기에 입은 데미지를 반사하는 패시브 스킬과 반쯤 소화시키다 만 귀뚜라미들을 뱉어내는 엑티브 스킬 때문에 약간은 성가신 중간 보스.
이런 녀석을 상대하는 데에 적합한 녀석이 있다.
“나와라.”
나는 손가락의 반지를 문질러 히드라를 소환했다.
…펑!
연막탄이 터지는 듯한 요란한 소음과 함께.
[쉬이익!]
내 반지 속에서 기어 나온 히드라는 눈치 빠르게 나의 오더대로 움직였다.
자고로 개구리의 천적은 뱀 아니던가?
히드라는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 있는 황금광 청개구리를 집어삼켜 버렸다.
개구리는 독을 뿜어내며 저항했으나 거의 모든 독에 면역이 있는 히드라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그때.
“…응?”
나는 히드라의 몸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 히드라의 몸이 조금 빵빵해진 것 같다.
방금 전에 커다란 개구리를 잡아먹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몸이 부풀어 올라 있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
‘이 녀석, 살이 쪘나?’
나는 히드라의 통통한 몸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예전 ‘죽음길 나락’을 공략할 당시, 나는 히드라에게 바실리스크를 먹이로 준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히드라는 몸이 부쩍 커지고 식욕이 적어졌다.
원래 뱀은 큰 먹이를 먹은 이후 한동안은 금식을 하며 쉰다고 하던데…히드라 역시 비슷한 경우일까?
“너무 센 먹이를 줘서 그런가 보네. 앞으로는 식단관리를 시켜야겠어.”
나는 히드라를 반지 속으로 역소환시켰다.
데굴데굴…
귀뚜라미와 개구리가 사라지며 ‘거꾸로 정수’들이 우수수 드랍되었다.
그러나 죽음룡 오즈를 거꾸러트린 지금은 별 필요가 없는 아이템들이었기에 굳이 일일이 수집하지 않았다.
다만 민첩 옵션이 붙은 아이템들은 쥬딜로페가 꼼꼼하게 수집해 내게로 가져왔다.
[꾸꾸! 꺄아-]
“그래 잘했다.”
나에게 민첩 옵션이 붙은 아이템들을 내밀며 거드름을 피우는 여왕님.
그 모습을 본 윤솔이 생긋 웃으며 쥬딜로페를 껴안아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 준다.
“오늘도 우리 쥬딜로페는 귀엽습니다.”
하지만.
포르르-
쥬딜로페는 날개를 파닥여 윤솔의 손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굳이 내 어깨로 날아들었다.
나와의 호감도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어깨를 나름 아지트처럼 여기는 것 같다.
여기에 앉아 있지 않으면 불안한 모양.
“…에엥, 이거 괜히 섭섭한데?”
“어쩔 수 없겠지. 태어났을 때 제일 먼저 본 게 어진이니까.”
윤솔의 볼멘소리에 어깨를 으쓱하는 드레이크다.
한편.
우리는 황천의 유극 1층을 지나 2층에 도달했다.
-띠링!
<‘황천의 유극 2층’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 고인물>
카타콤(Catacomb).
황금 해골로 이루어진 지하묘지 네트워크.
수없이 많은 해골들이 늘어져 뼈의 벽, 유골의 미궁을 이루고 있다.
여전히 장엄하고도 살풍경한 광경이었다.
나는 황금 묘지 저편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 벨럿!”
그러자.
[오오, 이게 누구신가? 은인들이 오셨군.]
묘지 저편의 벽 너머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후의 드워프 ‘벨럿’, 그녀가 커다란 망치를 빗겨 맨 채 등장한 것이다.
* * *
황금묘지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벨럿의 거처.
작은 방처럼 움푹 파인 구덩이는 톱밥으로 가득 차 있어 의외로 아늑하게 보인다.
하지만 가득 쌓인 톱밥은 사실 차갑고 까끌까끌한 금속 부스러기였다.
이곳은 황금으로 된 묘지답게 모든 것이 다 딱딱하고 차갑다.
포근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장소였다.
NPC라서 그런가, 벨럿의 행동은 전과 비슷했다.
그녀는 굴의 구석을 뒤지더니 몇 가지 물건을 황금 쟁반에 담아 내왔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고 있는 그릇.
안에는 유황이 녹아든 지하수와 막 담금질해 뻘겋게 보이는 금괴가 올라가 있다.
[오랜만이야. 여전히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시게. 인간들은 금을 좋아하니…….]
드워프는 황금과 다이아몬드를 먹고 유황과 수은을 마시며 사는 종족.
때문에 이런 것을 권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나는 예전에 했던 대로 그녀가 권하는 식사를 정중히 거절했다.
“아. 나는 식사라는 것을 끊어서.”
[식사가 술이나 담배도 아니고 어떻게 끊나?]
“금연, 금주, 금식. 다 있는 단어들이잖아.”
[…그런가? 그게 그런 개념인가?]
예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자기도 한때 인간이었던 적이 있었으면서 왜 이런 걸 먹으라고 주는 건지 모르겠다.
너무 오래 전이라서 인간일 적의 기억이 안 나는 건가?
‘…하긴 뭐,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나는 바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벨럿. 이것들을 좀 제련해 주면 좋겠는데. 가능한가?”
나는 벨럿의 앞에 상당한 양의 재료 아이템들을 꺼내놓았다.
-<불카노스> / 재료 / ?
용비늘에 견줄 정도로 가볍고 단단한 물질.
불카노스.
죽음룡 오즈를 죽이고 빼앗은 재료 아이템이다.
예전에 계획했던 대로, 나는 이것으로 윤솔의 하프를 업그레이드하고 드레이크가 쓸 화살촉도 제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흐음. 이건 불카노스로군. 그것도 이렇게 엄청난 양이라니.]
벨럿은 풍성한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침음성을 삼킬 뿐이다.
좋은 재료를 눈앞에 둔 드워프답지 않게 회의적인 모습.
한참 동안이나 불카노스 주괴들을 만지작거리던 벨럿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게 됐네.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이것들을 다룰 수 없어.]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잠자코 기다리자 벨럿은 고민 끝에 다른 답을 건넸다.
[하지만 내 사부님이라면 가능하실지도 몰라.]
한 차원 위의 기술력, 한 세대 위의 NPC.
벨럿은 정들었던 아지트를 한번 흘끗 돌아보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게. 사부님께 안내해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