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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419화 (419/1,000)
  • 420화 돈지랄 (1)

    […자네가 보기에는 내 재산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인간이 내게 던지는 질문.

    한없이 추상적이며 또한 천문학적인 액수를 상정할 수밖에 없는 물음이 아니던가?

    하지만 나의 대답은 명확했다.

    “한 푼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스크루지 번즈 후작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는가?]

    “한 푼도 없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한 푼도?]

    “네. 한 푼도요.”

    그러자 스크루지 후작은 당혹스럽다는 듯 등을 의자에 기댔다.

    그리고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기세로 몇 번 기침을 토해 냈다.

    나는 그가 기침을 할 때마다 입에서 희미한 녹색 물안개가 번져 나오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윽고, 스크루지 후작은 자세를 바로잡은 채 의자의 팔걸이에 두 팔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짐짓 위엄 있는 태도로 내게 물었다.

    [지금 나랑 장난을 하자는 건가?]

    “그럴 리가요. 한때 세계 제일의 갑부이셨던 분에게 어찌 감히.”

    유토러스의 땅값은 모든 대륙을 통틀어 가장 비싸다.

    그런 곳에 이렇게 크고 화려한 대저택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아닌가!

    ‘…뭐, 그것도 2차 대격변 전까지의 이야기지만 말이야.’

    나는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스크루지 후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

    낡고 오래된 먼지들이 부유하는 서재.

    우리 사이에는 탁하고 희뿌연 침묵이 흐른다.

    이내, 스크루지 후작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자네. 애송이가 아니었군.]

    나는 그저 싱긋 웃을 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스크루지 후작의 대화는 자동 페이즈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스크루지 후작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으이. 나는 지금 돈이 없다네.]

    속이 텅 비어 버린 거목(巨木).

    그는 녹색 기침을 몇 번 토해 낸 뒤 힘없는 어조로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이 저택을 자네에게 대여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야. 다 돈이 부족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내렸던 결정이지.]

    스크루지 후작은 고개를 떨군 채 침통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대격변이 일어나고 난 뒤 많은 인간들이 죽거나 마을을 떠났어. 당연히 세수가 부족해졌지. 부자들이 내야 하는 세금은 늘어났고 들어오는 수입은 크게 줄었으니 방도가 있나? 수많은 사업들을 정리해야 했어. 나조차도 대공황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네. 사실…이제 당장 내일의 끼니조차 걱정해야 할 처지야.]

    스크루지 후작이 처한 상황은 내 생각보다 더 심각한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향해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켜보니 알 수 있었어. 자네가 요즘 떠오르는 신흥 부자들 중에서도 가장 힘 있고 팔팔한 젊은이라는 것을. 그리고 가치를 판별하고 미래를 넘겨짚는 데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칭찬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나의 판단을 말하는 것일세. 그래서 하는 말인데…….]

    스크루지 후작은 깊은 고뇌가 묻어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이 집을 사 주지 않겠나?]

    그의 제안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 저택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저택이었으며 스크루지 후작은 이런 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평생의 영예와 자부심으로 생각하던 사람이니까.

    스크루지 후작은 탄식했다.

    [그동안 부자를 자처하는 수많은 뜨내기들이 이 집을 어떻게 해 보겠다며 달라붙었지. 나는 굳이 그들을 막지 않았다네. …왜겠나?]

    “어차피 그들은 살 돈도 없을 테니까요.”

    [맞아. 이웃 나라의 왕도, 다른 도시의 시장도, 한 지역의 제후나 패자들도 모두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만 했지. 그만큼 이 집은 비싸다네.]

    말을 마친 스크루지 후작은 껄껄 웃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은 채로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여 나에게 가깝게 붙었다.

    [하지만 자네라면 이 집을 살 자격이 있어. 배짱도 실력도 돈도 모두 갖춘 유일한 남자지. 젊고 부유하며 섹시해.]

    하지만 그의 판단은 틀렸다.

    내가 가진 돈은 그저 스크루지 후작의 관심을 살짝 끄는 정도일 뿐이었으니까.

    ‘…파티하느라 돈 다 썼다고 하면 뭐라고 할까?’

    아마 미친놈이라고 욕하며 당장 쫓아내겠지.

    하지만 내가 저택을 빌리느라 준 돈마저 다 써 버리고 당장 내일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인 스크루지 후작이 훨씬 더 미친놈이다.

    아무리 대격변 이후 수입이 줄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막대한 금액이 통장에 꽂히고 있을 텐데… 대체 그 많은 돈을 다 어디다 써서 지금 이런 처지에 놓였단 말인가?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떤가? 사겠나? 돈이 있다 해도 만나기 쉽지 않은 기회일세.]

    스크루지 후작은 나를 유혹하듯 중얼거렸다.

    이내 그의 입에서 나온 매매가를 들은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친, 더럽게 비싸네!’

    이 돈을 주고 누가 여기를 산단 말인가!

    하여간 부동산 거품이란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니까.

    뭐, 재벌가의 총수라면 몰라도 일반 게이머들 중에 이 집을 살 만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설령 재벌가의 총수가 이 집을 사려고 해도 까다로운 조건들에 걸러져 여기까지 오지도 못하겠지만.

    그러나.

    “흐음. 흥미롭군요.”

    나는 짐짓 구매의사가 있는 척 서재를 한번 쭉 돌아 보았다.

    저벅… 저벅… 저벅…

    고민하는 척 하며 천천히 원을 그리며 걷는다.

    미묘하게, 서서히, 아주 조금씩 조금씩, 나는 스크루지 후작이 있는 곳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한편. 내가 구매의사를 살짝살짝 내비치자 스크루지 후작은 마음이 바싹 다급해진 듯하다.

    그는 우리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는 것도 모른 채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스크루지 후작의 주의를 흐리며 살 듯 말 듯 교묘한 언사를 지껄였다.

    “음, 허위매물은 아니겠죠? 물은 잘 나오나요? 채광은 어떻죠? 층간소음은 없나요? 예전에 살던 집에서는 위층 사는 김창식 씨가 오후 8시부터 11시까지 정말 미친 듯이 쿵쾅거렸거든요. 조용히 하라고 항의했더니 모욕죄로 고소한다고 길길이 날뛰질 않나… 또 이웃집 식당에서 풍겨오는 양파 볶는 냄새는 정말 고역이죠, 빨래도 못 널고 환기도 못 시키고. 또 근처에 개 키우는 집이 있으면 짖는 소리 때문에 아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편의시설이 가까이 있는지도 따져 봐야 하고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역이 근처에 있는지도…….”

    [???]

    내 말을 들은 스크루지 후작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살 거야 말 거야!?]

    산다? 만다?

    두 가지 선택지가 떴다.

    양자택일의 상황, 나는 데스나이트의 ‘선택’ 특성을 발동했다.

    사자심왕 리차드.

    극한의 순간에서 눈을 가린 채 아비와 적의 목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용자.

    그의 판단과 나의 판단은 서로 정확히 일치하는 답을 내놓았다.

    “안 사요.”

    나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선 채 대답했다.

    내 말을 들은 스크루지 후작은 황당하다는 듯한 어조로 반문했다.

    [왜!? 왜 안 사!? 이 저택을 살 수 있는 기회가 흔한 줄 알아!? 다시는 없을 기회라고!]

    확실히 이것은 스크루지 후작의 말이 맞다.

    내가 이 대저택을 살 정도의 돈이 있었다면 한 번쯤 고민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남은 돈이 한 푼도 없는 상황으로 스크루지 후작에 비해 딱히 더 나을 것도 없는 처지.

    그런 내 마음을 간파한 것일까?

    스크루지 후작은 은근한 목소리로 차선책을 제시했다.

    [금액이 부담된다면 할부로 받아도 되네. 정말 사정 많이 봐 주는 거야.]

    스크루지 후작은 정말로 이 집을 팔고 싶은 것 같았다.

    아니, 집을 팔고 싶다기보다는 급전이 필요한 듯싶다.

    하지만.

    “그럼 전세나 월세도 되나요?”

    나는 슬쩍 한 걸음을 추가로 옮겨 놓으며 말했다.

    이제 스크루지 후작과 나의 사이는 무척이나 가깝게 좁혀졌다.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하지만 스크루지 후작은 그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손에 들어올락 말락한 급전 때문에 처음에 경계하던 것은 모두 잊어버린 모양.

    [으음, 전세? 월세? 그것도 생각해 보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조금 없어 보이지 않을까? 뭐 자네가 굳이 원한다면야 그런 방식으로도 나는 좋네만…….]

    “아니다. 그래도 안 살래요.”

    내 말에 스크루지 후작의 자세가 또다시 허물어졌다.

    [왜! 대체 왜 안 산다는 거야! 이 집이 얼마나 살기 좋은 집인데!]

    “사실 금액이나 집의 문제는 아니에요.”

    [……?]

    스크루지 후작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파악!

    나는 쏜살같이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무방비 상태의 스크루지 후작에게로 손을 뻗어 그의 팔목을 낚아채는 것에 성공했다.

    [……!?]

    스크루지 후작은 부지불식간에 나에게 손을 잡혔다.

    그리고는 극도로 놀란 채 앉은 자리에서 활어처럼 파닥거린다.

    하지만 나는 단단히 붙잡은 스크루지 후작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내가 이 집을 사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알아?”

    검은 로브 아래로 단단한 근육과 굵은 뼈가 잡힌다.

    다 죽어가는 노인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잘 단련된 손목.

    내게 손을 잡힌 순간, 검은 로브 속 스크루지 후작의 두 눈동자가 공포로 물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스크루지 후작을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악마와는 거래하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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