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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418화 (418/1,000)
  • 419화 위대한 쇼맨(The Greatest Showman) (5)

    시작의 마을 유토러스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대저택.

    방의 개수만 해도 수천 개, 마당의 넓이만 해도 수만 헥타르에 이르는, 명실 공히 이 세계관 최고의 호화 저택이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금액을 지불하고 이 저택을 하루 간 전세 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빌리지 못했던 구역이 딱 한 곳 있었다.

    <대저택 서재> -등급: A+

    대저택의 가장 높은 공간, NPC들이 활보하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던전 표시가 떠올라 있는 비밀구역.

    -띠링!

    <‘대저택 서재’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지금껏 봉인되어 있던 미지의 구역이 해금되었다.

    끼기기기긱…

    나는 오래된 나무 문을 열고 미개방구역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보유금 얼마 이상, 하루에 쓴 돈 얼마 이상, 백작 이상의 작위, 그리고 의문의 조건 하나.’

    총 4개의 조건을 만족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까다로운 공간.

    이윽고, 나는 차가운 어둠이 부유하고 있는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장서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낡고 오래된 책들, 위에는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검지가 완전히 박힐 정도다.

    바닥에도 먼지가 수북하게 뒤덮여 있어 지나가고 나면 발자국이 남는다.

    발자국은 오로지 내 것 하나뿐이었다.

    피부에 와 닿는 싸늘한 공기 때문에 안에 오랫동안 사람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분명 나를 불렀던 스크루지 후작의 목소리는 이곳에서 들려왔다.

    나는 수없이 나 있는 사다리를 타고 서재의 위로 올라갔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대한 구조의 서재.

    수없이 쌓여 있는 책들은 마치 바짝 말라비틀어진 괴물의 이빨 같다.

    사다리를 번갈아 올라 위로 갈 때마다 고서들의 미로가 나를 가로막았다.

    오래된 먼지가 희미한 남포불빛에 실려 어스름하게 부유한다.

    나는 그 사이를 헤집고는 차분한 마음으로 촛불을 들어 도서관의 위를 비추었다.

    저벅… 저벅… 저벅…

    이윽고. 나는 이 크고 오래된 서재의 가장 상층부까지 올라왔다.

    사다리를 딛고 바닥에 발을 디디자 어둠 속 저 깊은 곳에서 아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과 재물.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나니. 오오…….]

    스크루지 번즈 후작!

    그가 서재 깊은 곳의 어둠 속에 홀로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그는 검은 천으로 덮여 있는 거대한 의자에 앉아 있었으며 전신을 칠흑과도 같은 망토와 후드로 뒤덮고 있어 외형을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죽음의 문턱 앞에서 달달 떨고 있는 폐병환자처럼 간헐적으로 토해 내는 숨소리만이 그가 아직 살아 있고 또 그것이 매우 간신히, 힘겹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흐음.’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앞으로 걸어가 스크루지 후작이 앉아 있는 의자 앞에 섰다.

    내가 알기로 스크루지 후작은 엄청나게 고령의 노인이다.

    내 상식을 뒷받침하듯, 어둠에 잠겨있는 서재 구석에는 스크루지 후작의 초상화가 삐딱하게 걸려 있었다.

    쭈글쭈글한 주름과 날카로운 눈매, 매부리코, 피부 곳곳에 난 검버섯.

    두뇌 명석하고 위엄 있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인간적으로 호감이 가는 관상은 아니었다.

    ‘스크루지 번즈. 유토러스의 명예 후작이자 각종 길드와 조합의 수장. 숙박업과 대장간 사업을 필두로 수많은 사업들을 일으켜 떼돈을 번 남자.’

    나는 스크루지 후작의 설정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그는 유토러스 전반에 있는 여인숙과 대장간의 실소유자이자 대주주이다.

    매년 스크루지 후작에게 돌아가는 영업이익과 배당금만 해도 천문학적인 액수, 왜 세상이 그를 세계 최고의 대부호라고 일컫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인간 종족이 사고 팔고 쓰고 버리는 그 모든 것들의 수수료가 다 스크루지 후작에게도 향한다.

    내가 하루 빌리는 데에도 엄청난 금액을 지불해야 했던 이 화려한 대저택이 아예 그의 영구 소유일 정도이니 그 부의 끝이 어디까지일지 감히 짐작도 되지 않는 마당인 것이다.

    [으으으음… 아아! 흐윽… 오오오!]

    하지만 그렇게 많은 부를 쌓은 사람도 괴로움에 몸부림칠 때가 있는 모양이었다.

    스크루지 후작은 나를 이곳으로 불러낸 사실조차 잊고 시름과 번뇌에 빠져 있었다.

    그는 검은 로브 속의 얼굴을 두 손으로 짚은 채 한숨 쉬고, 흐느끼고, 비애를 겨누지 못해 비틀거린다.

    풀썩이는 먼지 구덩이 속에서 괴로워하는 그 모습은 마치 무언가에 사로잡힌 망령처럼 보였다.

    나는 헛기침을 한번 한 뒤 스크루지 후작에게 말을 걸었다.

    “스크루지 씨. 나를 부르셨습니까?”

    내 말을 듣자 스크루지 후작은 잠깐 놀라는 듯 하더니 이내 상체를 일으켜 나를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 묻혀 있어서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 그래. 누군가 했더니 고인물 백작이로군. 잘 와 주었어. …그런데 어떻게 들어왔지? 하인들이 들여보내 주던가?]

    “방금 스크루지 씨께서 직접 부르셨습니다. 문도 손수 열어 주셨고요.”

    […내가? …그랬던가? …아무튼 잘 된 일이네. 보게 되어 반가워.]

    스크루지 후작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려는가 싶더니 다시 의자로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오래된 철옹성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는 의자에 눕듯 기대어 나를 바라보았다.

    [서재 창문으로 보았네. 자네의 파티.]

    “…부끄럽습니다.”

    [부끄럽긴. 자네의 자비심 덕에 오랜만에 도시에 활기가 도는 것 같아. 최근 이 도시는 너무 쓸쓸하지 않았던가? 다들 죽거나 떠나 버렸으니 말이야.]

    스크루지 후작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이건 오히려 내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지. 저택을 자네에게 하루 빌려 준 것만으로도 하인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아. 그들이 저렇게 밝게 웃을 줄 아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내 지금까지 몰랐어. 하긴, 저들도 인간일지언데 말이야. 고용주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괜한 상념이십니다.”

    [늙어서 그렇지. 죽을 때가 다 되니 감수성이 사춘기 소녀보다도 더 여려져.]

    스크루지 후작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파티가 끝난 뒤 동전을 챙겨 돌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밝다.

    그들에게 나뉘어진 적은 양의 부(富).

    스크루지 후작은 기묘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저 정도의 푼돈으로도 저리들 기뻐하는구먼. 어쩌면 저때가 가장 행복할 때인지도 몰라. 한 푼 두 푼에 울고 웃고 할 때가 말이야.]

    “돈을 많이 벌면 기쁘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렇게 생각하며 지난 수십여 년을 살아왔지.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던 믿음이었어.]

    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부를 쌓은 노인.

    하지만 천하의 스크루지 후작조차도 노년에 흔들리는 감수성은 미처 어찌할 길이 없는 모양이다.

    그때.

    문득 스크루지 후작의 로브 속에서 그의 눈빛이 반짝인다.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자네에게서 익숙한 향기가 나는군.]

    그는 내 목을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게 그 목걸이를 한번 보여 줄 수 있겠나?]

    나는 기꺼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 목에서 늘어진 목걸이 하나가 흑빛을 내뿜는다.

    -<솔로몬의 목걸이> / 목걸이 / ?

    어둠 대왕 솔로몬이 최후의 결전 직전에 잠시 빼 놓았던 목걸이다.

    만약 솔로몬이 이것을 목에 걸고 있었다면 당신은 절대로 그를 쓰러트리지 못했을 것이다.

    -어둠 속성 저항력 +10% (특수)

    -? (특수)

    이 목걸이는 예전에 어둠 대왕을 쓰러트리고 얻은 히든 피스, 오로지 첫 클리어 대상자에게만 주어지는 특전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 나만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라 이거지.’

    내가 싱긋 웃으며 목걸이를 품 안으로 감추자 스크루지 후작이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자네는 역시 솔로몬 대왕님과 인연이 있는 자였어.]

    “그를 아십니까?”

    [알다마다. 내 조부님과 연이 깊으신 분이셨지. 나를 많이 귀여워 해 주셨었어. 참 지혜로우신 분이었는데…….]

    의심 많은 스크루지 후작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사실 내가 이 서재에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네 번째 조건이 바로 ‘이 목걸이를 소지하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이다.

    이후 스크루지 후작은 한층 더 너그러워진 기색으로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솔로몬 대왕에 관한 내용이었다.

    [하여간 악마 놈들이 문제지. 그 역겨운 ‘파리 대왕’ 때문에 솔로몬 대왕께서…….]

    스크루지 후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순간, 그의 목이 옆으로 우둑 소리를 내며 꺾였다.

    […우욱! …으으윽! …으웩!]

    자신의 몸을 긁으며 괴로워하던 스크루지 후작은 의자에 앉은 채로 고개를 앞으로 푹 숙였다.

    그리고는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검은 천으로 덮인 의자 앞에 토사물이 끼얹어진다.

    전에도 몇 번 있었던 일인 듯, 의자의 밑에는 말라붙은 토사물 자국들이 몇 개 더 나 있었다.

    이내, 구토를 끝낸 스크루지 후작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활력 넘치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지. 그래, 그만하자고.]

    그는 약간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대화는 바로 본론으로 진입한다.

    [자네가 돈 쓰는 것 인상 깊게 봤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돈을 폭죽에 매달아 뿌리겠다는 사치스러운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지. 예전에 카리브 쪽으로 무역행을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상선 가득 싣고 온 후추 열매를 돈처럼 뿌린 적은 있었다만…뭐, 그건 오래 전의 과거니까. 아참, 특히나 동화, 은화, 금화의 순으로 순서를 정해 쏜 것이 감명 깊었다네. 멋진 연출이야.]

    “칭찬 감사합니다.”

    나는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내가 겸양의 표현 없이 칭찬을 넙죽 받아먹자 스크루지 후작은 손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긁었다.

    그리고는 다소 도발적인 어조로 물었다.

    […자네 돈이 많나?]

    “네.”

    […내 앞에서 감히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을 정도로?]

    “그럼요.”

    나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대답했다.

    물론 뻥이지만 말이다.

    한편, 나의 당당한 태도를 본 스크루지 후작은 낮은 소리로 낄낄 웃었다.

    실로 가소롭다는 태도였다.

    [내가 보기에는 자네는 아직 애송이야. 부를 적당히 숨기고 드러낼 줄을 몰라.]

    “…….”

    [자고로 부자는 자기의 부를 7할 정도 숨기고 살아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온갖 것들에게 노려지기 십상이야. 삶이 피곤해진다네.]

    이 바닥의 한참 선배로서 막 물이 올라 기세등등한 새파란 후배에게 던지는 충고.

    말을 마친 스크루지 후작은 더욱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는 재미있다는 듯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자네가 보기에는 내 재산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나이.

    시작의 도시 유토러스에 있는 모든 숙박업과 대장간업을 주름잡고 있으며 그 영향력이 온갖 사업장 곳곳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유지.

    마음만 먹으면 유토러스뿐만이 아니라 전 대륙에 있는 모든 인간 구역의 땅을 사 버릴 수도 있다는 소문마저 돌 정도로 엄청난 거부.

    그의 재산이 얼마나 될까?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지경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온 나의 대답은 명확할 수밖에 없었다.

    “한 푼도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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