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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415화 (415/1,000)
  • 416화 위대한 쇼맨(The Greatest Showman) (2)

    유토러스(Utorus).

    ‘시작의 도시’, ‘모든 플레이어의 고향’, ‘태초의 마을’, ‘어머니의 도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거대 도시이다.

    튜토리얼의 탑이 있는 뉴비 존(10레벨 이상 입장불가)을 중심으로 거대한 초보자 구역이 펼쳐져 있는 도시이며 가장 많은 인구들이 몰려 있는 땅.

    모든 망자들이 새 생명을 얻는 ‘신전’부터 시작해서 대장간, 도서관, 잡화점, 시장, 목욕탕, 여인숙, 훈련소, 각종 상점이나 NPC들의 집 등 다양한 시설들이 밀집되어 있다.

    지금은 오크의 구역, 리자드맨의 구역, 인간의 구역으로 쪼개져 있었지만 여전히 이 마을은 종족불문, 모든 유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공간인 것이다.

    하지만 대격변 이후 유토러스의 풍경은 많이 변했다.

    …적어도 인간들이 사는 구역은 그랬다.

    웅장하고 정교한 건축양식.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은 우아미와 숭고미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이다.

    하지만 대격변 이후 인구수가 적어지다보니 어딘가 황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한때 이곳을 북적북적하게 만들었던 플레이어들과 NPC들은 세상의 혼탁한 기운에 오염되어 오크와 리자드맨으로 변해 버렸고 그들이 떠난 뒤 대부분의 건물들은 텅 비게 되었다.

    쇠퇴해 가는 고대문명의 끝자락. 그 어딘가쯤에 인간이 서 있으리라.

    쏴아아아…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유령도시.

    불 꺼진 집집마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다.

    “…휴.”

    ‘지나가던 평범한 유저 1’은 한 가정집의 현관 계단 앞에 주저앉았다.

    김준솔. 평범한 인간 유저인 그는 지금 무기력한 자세로 계단에 걸터앉은 채 비를 맞고 있다.

    “포션 살 돈도 다 떨어졌고 쉴 곳도 없고. 아주 죽겠구만.”

    김준솔은 유리병 바닥에 얕게 찰랑거릴 정도밖에 남지 않은 포션을 바라보며 한숨 쉬었다.

    대격변 이후 인간들의 개체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래서일까? NPC들도 대부분 무기력하고 나태해졌다.

    무기나 잡화를 팔던 장사꾼들도 장사를 접고 쉬는 날이 많아졌다.

    식당의 음식은 거칠어졌으며 여관의 방 온도도 쌀쌀해졌다.

    도시가 텅 비어 허무함과 쓸쓸함을 느끼게 된 것은 플레이어들뿐만 아니라 NPC들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방금도 여인숙 세 개를 돌아다녀 보았지만 영업을 하는 집이 없어서 숙박을 하지 못했다.

    추적추적, 비는 내린다. 이대로 계속 비를 맞다가는 체력이 많이 떨어질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길거리에서 동사할 수도 있었다.

    잡화점에서 하급 포션이라도 한 잔 하거나 어디 싸구려 여인숙이라도 잡고 방에 누워 체력을 회복해야 할 텐데.

    최소한 주점에라도 들어가 데운 술이라도 한 잔 해야 체력을 채울 것 아닌가!

    “젠장. NPC들이 영업을 해야 뭘 하든 하지. 이건 뭐 대공황도 아니고…….”

    김준솔은 계단에 앉아 뒤를 돌아보았다.

    보통 여행자가 이렇게 집 계단에 앉아 쉬고 있으면 집 문이 열리고 안에서 NPC들이 나와 따듯한 우유라도 한 잔 대접했던 것이 유토러스 인심이었다.

    하지만 지금 불 꺼진 가정집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 조용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너머로 저 멀리, 까마득히 떨어진 곳에서 아스라이 빛나는 불빛들만이 따스해 보일 뿐이다.

    오크와 리자드맨의 도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들 말이다.

    바로 그때.

    [어이! ‘zl존검사123’!]

    누군가 김준솔의 아이디를 부른다.

    고개를 들자 갈색 수염을 길게 기른 거한 하나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 주점 NPC ‘봉그비어’씨.”

    김준솔은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봉그비어는 평소 민소매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고 다니던 털털한 사내, 거친 아저씨들만 모이는 뒷골목 간이주점의 마스터이다.

    하지만 그는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멋진 정장을 빼 입었다. 깔끔한 가죽구두에 앙증맞은 나비넥타이로 포인트까지 준 채로!

    봉그비어는 껄껄 웃으며 김준솔에게 물었다.

    [자네 여기서 뭘 하고 앉아 있나?]

    그의 말을 들은 김준솔은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주점 NPC가 이런 대사도 쳤던가?’

    뭐, 워낙 자유도가 높고 인공지능이 뛰어난 게임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김준솔은 그냥 멋쩍게 웃었다.

    “밤은 깊었고 비는 오고. 어디 쉴 데가 없어서요. 아저씨 주점 열었나요? 거기 가서 한 잔 하면서 체력 좀 채우게요.”

    여인숙이고 단골 주점이고 죄다 문을 닫았으니 평소에 좁고 시끄러워서 잘 가지 않았던 간이주점에라도 가고 싶은 것이 김준솔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얼간이 같은 친구를 봤나! 오늘 같은 날에 누가 장사를 해!]

    그 말에 김준솔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무슨 날인가?’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하다.

    평소에 불이 켜져 있던 가정집들도 싹 불이 꺼졌다.

    골목길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닥에 뒹굴고 있는 노숙자나 거렁뱅이 NPC들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NPC고 플레이어고 모두 싹 사라진 도시.

    아무리 인간의 개체수가 줄었다고 해도 뉴비가 계속 유입되고 있는 유토러스에서 이런 한산함이 느껴진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봉그비어는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자네 오늘 파티가 열린다는 공고 못 봤는가!?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다 거기에 가 있다고!]

    그 말에 김준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티라고?

    *       *       *

    밤이 한층 더 본격적으로 깊어갈 무렵.

    성가시게 내리던 부슬비가 멎을 때쯤 김준솔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야! 오늘 파티가 열리는 곳이!]

    봉그비어 씨는 나비넥타이를 매만지고는 거침없이 정면을 향해 걸어갔다.

    김준솔은 오늘 파티가 열리는 곳의 풍경을 눈앞에 두고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거의 성에 필적할 규모를 가진 호화 저택.

    유토러스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크다는 설정의 대저택이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대저택의 로비와 정원, 안에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NPC와 플레이어를 가리지 않고 유토러스의 모든 이들이 먹고 마시는 파티!

    오크나 리자드맨은 제외, 인간이라면 누구나 술과 음식을 즐길 수 있다.

    도시의 고관대작부터 골목의 노숙자까지 모두가 대저택의 화려한 불빛에 취해 있었다.

    만취할 때까지 먹고 쓰러져 버리는 것.

    오늘만 사는 것이 유행이었고 그것은 이제 개개인의 일탈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사조(思潮)가 되어 있다.

    값비싼 마차들이 대저택 앞의 거리들을 꽉꽉 메웠다.

    하늘에 폭죽이 그려지고 화려하고 값비싼 쓰레기들이 넘쳐난다.

    아무도 윤리, 절제, 검소, 도덕 따위의 단어를 찾지 않았다.

    홀과 정원은 젊음과 흥겨움으로 녹고 끓어오르길 반복한다.

    반라의 남녀들이 춤추는 정열적인 파티, 삼중건반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쾌한 재즈 가락이 인간 구역을 넘어 저 멀리 오크나 리자드맨의 땅까지 흔들어 재끼고 있었다.

    정원에 미로처럼 선, 오색 빛의 전구를 둘둘 감은 정원수들.

    그리고 작은 호수라고 연상될 정도로 큰 수영장.

    수영장 바닥은 통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그 아래의 격리공간에는 커다란 상어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규모가 어찌나 큰지 그 위로 일곱 개가 넘는 다리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긴 갈기를 지닌 백마들이 승마용 마구를 찬 채 정원을 뛰논다.

    김준솔은 입을 딱 벌렸다.

    가뜩이나 인구수도 없는 인간 구역에서 이런 거대한 파티가 개최되다니!

    “세상에! 이 저택은 하루 대관료가 너무 비싸서 어지간한 대형 길드들도 송년회 같은 큰 회식을 할 때 두어 시간 빌리는 게 고작이라던데……. 저택 주인이 엄청난 구두쇠에 돈벌레라서 어지간한 값으로는 절대 빌릴 수가 없다고……. 그런데 어떻게…….”

    김준솔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봉그비어에게 물었다.

    “…대체 이런 파티는 누가 주관한 겁니까!?”

    그러자 봉그비어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누구긴 누구야! 바로 ‘고 백작님’이지!]

    그는 마치 ‘고 백작’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위대해지기라도 한 듯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하지만 김준솔은 생전 처음 듣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고 백작? 그게 누구지? 그런 NPC가 있었던가? 전혀 못 들어본 이름인데, 혹시 플레이어인가? 고씨 성을 가진 플레이어?’

    김준솔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

    고 백작은 단순히 파티 장소를 마련한 것으로 그의 넘치는 부와 자비심을 한계 짓지 않았다.

    파티에 필요한 모든 것이 여기에 다 있었다. 모든 것이 공짜! 무료였다!

    술, 음식, 폭죽, 음악, 풍선, 광대, 무용수, 모델, 사회자…….

    세상의 모든 흥겨운 것들이 고 백작의 넘쳐흐르는 자비심에서 비롯되었다.

    밤하늘의 절반을 대낮처럼 만들어 버리는 폭죽들.

    플라밍고처럼 크고 화려한 깃털로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무용수들이 연일 아슬아슬한 쇼를 벌인다.

    입담 하나로 좌중을 들었다 놨다 하는 파티의 기술자들이 반쯤은 성희롱에 가까운 농담들을 질펀하게 외쳤고 그들에게 질세라 재즈 오케스트라들이 고막을 통해 심장까지 때려 박는 유쾌한 음악들을 뿜어낸다.

    미친 듯이 돌아가는 미러볼, 90년대 디스코 곡들부터 어제 나온 따끈따끈한 EDM 신곡들이 창궐하고 있었다.

    수영장의 다리 위에서 춤을 추던 이들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고 난 뒤에도 술을 계속 이어서 마실 수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생크림과 시럽, 위스키를 흘리는 바람에 수영장 물이 어느새 칵테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여관주인 NPC, 고위관료 NPC, 플레이보이 NPC, 잡화점 NPC, 대장장이 NPC, 신관 NPC, 그림쟁이 NPC, 요리사 NPC, 경비병 NPC 등등이 모여들어 저마다 자신의 솜씨를 뽐내기에 여념이 없다.

    …풍덩!

    한 취객 NPC가 발을 헛디뎌 분수대에 빠졌다.

    하지만 분수대 속의 물은 이미 축제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기에 춥지 않았다.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분장 광대, 최신 유행하는 디자인의 명품들을 걸치고 워킹하는 모델들.

    그들의 위로 수만 개나 되는 풍선이 올라가고 폭죽들이 연이어 터진다.

    이것이 바로 고 백작의 파티였다.

    유토러스 전체의, 아니 이 게임 세계관 전체의 돈푼께나 있고 좀 놀 줄 안다는 유쾌한 이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여드는 파티.

    초대장도 따로 필요 없이, 그 누구라도 올 수 있는 축제.

    그리고 이 모든 성대한 연회를 기획하고 설계하고 완성한 ‘위대한 쇼맨(The Greatest Showman)’이 홀의 중앙 무대로 등장한다.

    바로 나.

    ‘고인물 백작’의 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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