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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413화 (413/1,000)
  • 414화 진짜가 나타났다 (3)

    “나 몰라요?”

    일 잘하기로 소문난 처리 2반의 반장 남세나.

    그녀는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속으면 안 된다.

    남세나는 리그가 열리기 전 맵 전체에 서식하는 강력한 몬스터들을 ‘지우고’ 다니는 존재.

    게임 속에서는 그야말로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는 위험분자다.

    나는 마동왕으로 활동할 때 딱 한 번 그녀와 마주한 적이 있었다.

    …과거 프로리그 시상식이 열렸을 당시가 떠오른다.

    내가 MVP로얄스타 트로피를 수상 받던 그날, 앙신 조디악이 수많은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켜 테러를 감행해 왔다.

    그때 남세나는 조디악을 죽이느냐 일반 유저들을 대피시키느냐의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일반 유저들의 대피를 돕기 위해 물러났었다.

    GM으로서는 테러범을 잡기보다는 테러에 노출된 일반 유저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먼저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남세나와 그녀가 이끄는 GM처리반을 대신해 조디악과 맞서 싸웠던 것이 바로 나였다.

    나는 마동왕 모드로 조디악의 앞을 막아섰고 그와 몇 수를 팽팽하게 겨루었다.

    결국 마동왕 모드로는 역부족임을 느끼고 고인물 모드로 변신해 간신히 조디악을 쓰러트렸고 그 이후 다시 마동왕 모드로 돌아와 남은 잔몹들을 싹 쓸어버림으로서 앙신 조디악의 테러는 막을 내렸다.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아마 한국 프로리그는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남세나는 그때 전장에서 나와 마주쳤던 때를 회상하는 듯 건조하게 미소 지었다.

    “그때는 빚을 졌어요.”

    “……빚 갚으러 온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요.”

    내가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남세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옅은 미소는 언제 있었느냐는 듯 자취를 감췄다.

    “대격변을 일으키신 분 얼굴이나 한번 봐 두려고 왔어요.”

    “처리반에서 게임 스토리에도 관심을 가지다니, 별일이네요.”

    “아시다시피 대격변 업데이트 발표를 했던 게 저라서 흥미가 조금 있거든요. 뭐, 스토리 팀이 하도 찡찡거리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그렇다.

    대격변이 처음 일어났을 때 그것을 일반 대중들에게 상세히 설명했던 이가 바로 남세나다.

    ‘속을 알 수 없는 여자. 위험하다.’

    나는 그녀와 말을 더 섞어 봤자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막 돌아서려는 순간, 남세나가 입을 열었다.

    “조디악 번디베일.”

    “……!”

    내가 움직임을 멈추자 남세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남자에 대해 아는 것 있나요?”

    “그 테러범을 말하는 것이라면 게임 안에서 한두 번 만난 게 다입니다. PK범 같기에 조금 혼내 줬었죠.”

    내 대답을 들은 남세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지금 ‘그레이 시티’에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나요?”

    “…….”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예전에 리자드맨 랭커 카렐린 강에게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의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

    “그 이야기를 왜 저에게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흐음. 고인물 씨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조디악 그 남자랑 꽤나 얽혀 있는 것 같아서요. 우리도 그를 주의 깊게 보고 있거든요. 적의 적은 친구라잖아요?”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의도가 제법 명백해 보인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세상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죠.”

    “…보기보다 의뭉스러우시네요.”

    “괜히 가면 덮어쓰고 살겠습니까.”

    내 대답에 남세나는 끙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름대로 심계를 걸어 보려는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나는 보이는 것 이상으로 나이가 많다.

    헛으로 먹은 나이지만 그래도 이럴 때는 조금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그때.

    “어머, 처리반장 님이시네!”

    타이밍 좋게 윤솔이 나와 남세나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윤솔은 붙임성 좋은 태도로 샴페인 잔을 들어 남세나에게 권했다.

    “파티 오셨으면 파티를 즐기셔야죠!”

    “아, 아니… 난…….”

    “자. 쭉! 파티잖아요!”

    윤솔은 남세나에게 샴페인을 권했다.

    그리고 나를 살짝 돌아보며 웃어보였다.

    ‘굿 타이밍.’

    나는 윤솔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고개를 돌려 비어퐁을 하고 있는 드레이크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짐짓 관심 있는 척 말을 걸었다.

    “이봐, 드레이크. 궁수가 비어퐁 하는 건 반칙 아냐?”

    “으음, 아무래도 세희는 눈이 보이는 것 같다. 벌써 세 판 째 지고 있어. 그녀의 잔은 콜라이기 때문에 내가 유독 더 불리하다.”

    나는 공을 든 유세희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슬쩍 자리를 떴다.

    휘장 너머를 슬쩍 들여다보니 남세나가 붙임성 좋은 윤솔, 홍영화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루고 있는 것이 보인다.

    “…휴, 한숨 돌렸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남세나, 그녀는 아무래도 나에게 어떤 수상한 감정을 품고 접근하는 것 같았다.

    난데없이 조디악과 싸움을 붙이려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조디악 놈의 본거지가 그레이 시티라는 사실은 좋은 정보다. 그곳에는 전부터 신경 쓰였던 ‘살인자들의 탑’도 있고…….’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조디악은 아주 만날 때마다 죽여 놔야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찾아가서 죽여 놓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더 중요한 것이 있지.’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진아!”

    내 어깨를 팡 치는 손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흥분한 표정의 엄재영 감독이 보인다.

    그는 대뜸 내 손목을 잡고 휘장을 넘어 어두운 밀실로 향했다.

    “어맛, 엄 감독님! 야외에서는 좀……!”

    “후후, 오늘은 아내에게 외박할거라고 말했으니 괜찮아. 이리 오라구!”

    “…뭐예요, 더럽게.”

    “니가 먼저 장난쳤잖아.”

    “누가 동생 장난을 그렇게 더럽게 받아요.”

    “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자… 뭐라구요?”

    “더러운 장난 그만 치고. 들어보라고!”

    엄재영 감독은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대진표가 벌써 나온 것 같다.”

    “네? 벌써?”

    “…쉿, 비공식적인 것이지만 일단 확실하다고 보면 돼.”

    엄재영 감독은 내게 서류 한 장을 보여주었다.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1차 ‘리틀리그’의 대진표였다.

    총 12개국.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몽골, 대만, 베트남, 필리핀, 인도,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내가 회귀하기 전 봤던 엔트리와 완벽하게 똑같았다.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는 ‘리틀리그’와 ‘빅리그’라는 두 번의 거대한 리그로 이루어지는데 ‘리틀리그’에서 세 나라가 한 개 조가 되어 1차 승점제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르고 2차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 경기를 치르게 된다.

    하나의 나라만이 이 리틀리그를 통과할 수 있고 총 4개의 나라가 빅리그로 진출하게 된다.

    리틀리그를 통과한 4개국은 빅리그를 통해 1, 2, 3위를 정하게 되며 이때 1위를 선출하는 방식은 토너먼트이다.

    엄재영 감독은 매직으로 12개국을 4개조로 나눴다.

    한국 / 일본 / 중국

    우즈베키스탄 / 인도 / 파키스탄

    러시아 / 몽골 / 투르크메니스탄

    대만 / 필리핀 / 베트남

    이 4개의 조에서 각각 하나의 나라가 빅리그로 진출하게 될 것이다.

    엄재영 감독은 매직 뚜껑을 닫은 뒤 그것으로 옆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래도 우리 조가 죽음의 조인 것 같다.”

    딱 봐도 한국이 속해 있는 조가 제일 박 터지는 조처럼 보인다.

    아시아권 나라들 중에서도 가장 게임 경쟁력이 강한 일본과 중국 틈바구니에 끼게 될 줄이야.

    하지만 이는 내가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회귀 전 세상하고 똑같네.’

    나는 내가 알고 있던 대로 착착 진행되는 미래에 약간 안도했다.

    ‘아마 조 추점이 이렇게까지 똑같이 배석된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모종의 알력이 있다는 것이겠지만…어느 나라든 협회들은 참 더럽군. 하지만, 뭐 괜찮아. 오히려 잘 됐어.’

    죽음의 조에 속하게 된 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다행이다.

    일말의 변수조차 없애 버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내가 원래 살았던 회귀 전의 세상에서 한국은 1차전에서 바로 광속 탈락하여 세계리그의 문턱도 넘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나는 눈앞에 있는 대진표를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엄재영 감독은 내게 말했다.

    “시간은 그렇게 촉박하지 않으니 계획을 철저히 세워 보자고.”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계획은 필요 없어요.”

    “…응?”

    엄재영 감독은 ‘또 시작됐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듯 팔짱을 낀다.

    “어진아. 자신감이 넘치는 건 알겠는데…그래도 계획은 있어야지.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잖아.”

    “그럼 몸이 좋으면 머리가 안 좋아도 되겠군요.”

    “…….”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엄재영 감독의 팔을 툭툭 쳤다.

    “걱정 마세요 형님. 아주 아무 계획이 없는 건 아니에요.”

    “…정말? 무슨 계획 있어?”

    내 말에 급격히 표정이 밝아지는 엄재영 감독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 오버에서 제 건틀릿 두 개가 부서졌어요. 아시죠?”

    그렇다.

    죽음룡 오즈를 잡고 얻은 칠흑 갑옷을 처음으로 시운전해 본 결과, A+등급 아이템의 내구도로는 그 힘을 제대로 서포트해 줄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수리를 해서 어떻게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죽음룡 오즈의 ‘기운’을 얻었으니 그것을 컨트롤하고 다룰 수 있는 ‘힘’도 있어야지.’

    나는 엄재영 감독에게 말했다.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전까지 S+등급 아이템 하나를 더 얻어 올 생각이에요.”

    내 말을 들은 엄재영 감독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 어떤 몬스터를 잡으려고?”

    나는 눈을 빛냈다.

    “악마성좌요.”

    고정 S+등급 몬스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는 열일곱 절대자. 아니, 이제는 열여섯 절대자.

    일곱 용군주 중 하나인 죽음룡 오즈를 쓰러트렸으니 이제 다음 차례는 일곱 악마성좌들 중 하나이다.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S+등급 아이템.

    ‘근력’의 상징.

    내게 죽음룡 오즈의 기운마저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을 안겨 줄 신물(神物).

    마동왕을 상징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아이템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편.

    “…….”

    내 말을 듣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엄재영 감독, 하지만 놀라기에는 아직 이르다.

    어두운 밀실. 나는 엄재영 감독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지.’

    그때가 아마 1차 대격변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마동왕의 가면을 벗고 정체를 공개했을 때였던가.

    하긴 뭐, 과거야 아무려면 어떤가?

    나는 얼떨떨한 표정의 엄재영 감독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함께 준비합시다. ‘2차 대격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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