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02화 (402/1,000)

403화 쌍마(雙魔) (2)

한창 선수단 소개가 이어지고 있을 무렵.

나는 간만에 마스크와 음성변조기를 벗은 채 관객석 구석에 앉아 있었다.

고인물. 오늘은 마동왕이 아닌 원래 모습으로 경기 직관을 온 것이다.

윤솔이나 드레이크, 마태강, 유세희는 각자 다른 구역에 정체를 감춘 채 홀로 조용히 경기를 지켜볼 것이다.

한편 전용진 캐스터의 소개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현 시점에서 가장 ‘마동왕’과 가깝다고 평가되는 선수! 한국 오크 랭킹 1위! 마동섭 선수입니다!]

리틀 마동왕, 마동왕 주니어, 보급형 마동왕, 마동왕 하위호환, 마동왕 다운그레이드 버전, 마동왕 너프 버전, 제 2의 마동왕, 언럭키 마동왕, 짭동왕 등… 다양한 별명으로 불리는 선수.

한때 ‘본좌’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었던 비운의 랭커이자 프로게이머.

마동섭이 무대 위로 등장했다.

현 오크 종족 랭킹 1위이자 딜도 탱도 모두 수준급인 플레이어, 그의 등장에 엘리트즈 전원이 바짝 긴장하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인다.

마동섭은 마이크를 잡고 경기 전 소감을 짤막하게 밝혔다.

[자꾸 마동왕, 마동왕 하시는데… 오늘 그 그늘에서 벗어나 보겠습니다.]

그러자 관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팀 바스터즈의 훌리건들이었다.

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무대를 바라보았다.

쌍마(雙馬)의 시대.

‘돌부처’, ‘매머드’, ‘황제’ 등의 별명으로 군림했던 임요셉의 뒤를 잇는 두 명의 초엘리트가 바로 마태강과 마동왕(현 마동섭)이다.

한국 프로리그를 견인하던 두 마리의 말.

이번 시간대에서 그들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거 모르는 일이겠는데?’

놈이 승부조작 브로커라는 현실과는 별개인 다른 감정.

그 시대를 살아 본 유일한 사람으로서 기대가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바로 그때.

“…어? 저거 고인물 아니야?”

저 밑에서 나를 알아보는 여자 관중 하나가 있었다.

‘이런. 팬에게 들킨 건가? 이것 참, 인기는 어쩔 수가 없네.’

답답해서 잠시 마스크를 벗는 순간 바로 들킨 모양이다.

별 수 없이 팬 서비스용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내 인사를 본 여자 팬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꺄악! 고인물 오빠! 사인해 주세요!”

나 참 이거 사인까지? 정말 연예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네.

내가 주머니의 펜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씨익-

여자 팬이 무시무시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사인(死因) 말이다!”

동시에.

“어!? 진짜 고인물이다!”

“…뭐라고? 그 망할 놈이?”

“이 자식이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 여자를 중심으로 수많은 여자 관중들이 도끼눈을 뜬 채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 맨 앞에는 낯익은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다희!

그렇다, 이곳은 바로 마교의 응원구역이었던 것이다!

‘…헉!? 하필!’

그냥 남는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왔는데 그곳이 딱 용담호혈이었을 줄이야.

나는 등을 축축하게 적시는 식은땀을 느끼며 살며시 뒤돌아섰다.

하지만 마교 팬클럽 전원은 나를 그냥 놓아 보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이오이! 우리 마동왕 오빠를 죽였던 대가를 치러라!”

“너도 죽어! 죽어서 죄를 씻어!”

“울 오빠를 게임 세계에서 죽였으니 너는 현실 세계에서 죽어라!”

마동왕 사랑 종교. 줄여서 마교.

대부분이 여자로 이루어져 있는 이 집단은 각자 주머니에서 마동왕을 상징하는 하얀 마스크를 꺼내 쓰더니 나를 향해 우- 몰려들었다.

이런 식으로 여자 팬들에게 쫓겨보기는 난생 처음이다.

…격렬한 안티팬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으아아아아!”

나는 기겁을 하며 앞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게임 속에서 빠르다고 현실에서까지 빠를 수는 없다.

뛰어난 전투력을 가진 몇몇 여고생들이 어느새 나를 따라잡았다.

“…큭큭, 이 쥐새끼. 목을 내놓고 가거라.”

“껄껄껄, 뼈와 고기를 발라내 주마!”

“불바다는! 피바다로! 지켜내자! 우리오빠! 완소명예! 고인물은! 목을딴다!”

하얀 마스크를 쓴, 대적관 확실한 여고생 군단에게 포위당하자 눈앞이 아득해진다.

나는 이대로 찢겨 죽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던가?

“그만둬!”

나를 여고생 군단으로부터 구해 내는 손이 있었다.

살색. 알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근육질 사내가 여고생 군단의 마수로부터 나를 지켜낸 것이다.

“크윽!?”

나를 덮치려던 마교 팬클럽의 기세가 잠시 주춤했다.

그 실낱같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알몸으로 나타난 수많은 남자들.

그들이 나를 둥글게 감싼 채 마교와 대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인물 님! 어서 이리로!”

그중 한 알몸 사내가 외쳤다.

나는 그가 가리키고 있는 탈출구로 서둘러 빠져나갔다.

우르르르…

알몸 사내들은 나를 호위하며 일제히 마교의 포위망을 빠져나간다.

“…쳇!”

약간 뒤늦게 이 자리에 도착한 유다희는 혀를 찼다.

여고생 하나가 유다희의 앞에 부복하며 묻는다.

“끝까지 추격해 잡을까요? 분부만!”

하지만 유다희는 고개를 저었다.

“…으음. ‘저 세력’과 지금 맞붙어서 좋을 것은 없지. 피를 흘리기엔 보는 눈이 많다.”

“하읏? 그러시다면?”

“…분하지만 여기까지만 하고 물러나지. 오늘은 ‘본업’에 집중한다!”

말을 마친 유다희는 고개를 돌려 다시 팬클럽 좌석으로 돌아가 피켓을 잡는다.

<마♥동♡왕♥사♡랑♥교>

그녀들의 본업은 마동왕을 응원하고 널리 알리는 것이었으니까.

“…따르겠습니다!”

수많은 여자 팬들은 유다희의 뒤를 따라 다시 좌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뭐, 뭐야? 뭐야 진짜? 누구세요?”

나는 당황한 채 어두운 비상통로로 끌려왔다.

어둠. 비상구를 알리는 녹색 불빛만이 존재하는 곳에 수십 명의 알몸 사내들이 나를 포위하고 서 있다.

새롭게 마주한 공포스러운 광경에 내가 잔뜩 얼어 있을 때.

꾸벅-

맨 앞에 있던 알몸 사내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고인물 님.”

아무래도 이 변태 군단은 나에게 적대적인 것 같지 않았다.

“……?”

나는 실눈을 뜬 채 눈앞의 알몸 사내들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근육질 아저씨, 배불뜩이 아저씨, 깡마른 아저씨, 키 큰 아저씨, 키 작은 아저씨, 수염 덥수룩한 아저씨, 술 취한(?) 아저씨…… 죄다 아저씨들뿐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자 그들은 알몸이 아니었다.

다만 알몸으로 착각할 만한 살색 쫄쫄이 타이즈를 입고 있을 뿐이다.

“아니 왜 이런 옷을 입고 다니세요들…….”

정체에 앞서 궁금한 건 패션의 이유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고인물 님! 또 뵙는군요!”

저 뒤의 한 사내가 나를 보며 반가운 티를 낸다.

42살 곽희은 아저씨.

예전에 니아의 박보연과 함께 장을 볼 당시 나에게 기습 포옹을 시도했던 팬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예전에 고인물 정모에 나가서 봤던 딸기겅듀나 별님두개짱, 존예보스 등등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원양어선 선장님, 육군 장성, 외국인 격투기선수, 보디빌더 등등… 다양한 아저씨들이 모여 나를 향해 얼굴을 붉히고 있다.

이들은 바로 고인물 팬클럽, 통칭 ‘덜렁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가 바로 덜렁교의 헤드입니다.”

맨 처음 내 손을 잡고 도망쳤던 알몸… 아니 살색 타이즈의 남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입을 반쯤 벌릴 수밖에 없었다.

임요셉!

현 프로랭킹 1위에 군림하고 있는 ‘황제’가 아니던가!

너무 뜻밖의 얼굴이라 하마터면 아는 척을 할 뻔했다.

고인물로서는 임요셉과 초면이니 실수하면 안 될 노릇.

내가 입만 뻐끔뻐끔 거리고 있자 임요셉은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와 내 손을 잡았다.

“개인적으로는 마동왕 형님과 친하지만…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적인 관계, 직장 동료로서의 친분입니다. 사적으로는 늘 고인물 님을 존경하고 또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오싹-

옅은 소름이 전신에 돋아난다. 얘가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내 손을 잡은 임요셉은 얼굴을 붉히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맨 처음부터 고인물 님을 국K-1구단으로 영입하고 싶어 했었는데 당시 엄재영 감독님이 고인물 님보다는 마동왕 선수에게 집중하자고 하시는 바람에…….”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예전에 엄재영 감독이 마동왕 스카웃 비화를 말해 줄 때 들었다.

당시 엄재영 감독과 임요셉의 대화를 종합해 보면…….

‘…감독님.’

‘왜?’

‘혹시 BJ고인물…그 사람은 컨택 안 하시나요?’

‘컨택하려고 했는데 연락을 당최 안 받더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어필해 보시지.’

‘관두려고. 그 사람은 잘하긴 잘하는데 흥행성은 별로 없을 것 같아. 얄밉게 도망 다니는 것만 잘하잖아. 그리고 알몸으로 다닌다는 점에서도 조금…아니 뭐, 와준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인데. 도통 답장이 없으니까.’

‘에이, 그래도 저 마동왕이라는 놈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얌마. 너는 가서 연습이나 더 해. 신인 컨택은 감독한테 맡기고.’

이처럼 임요셉은 고인물을 구단으로 영입하고 싶어 했단다.

‘…그게 이것 때문이었나.’

나는 끙 소리를 냈다.

현 프로랭킹 공식 1위가 알고 보니 나의 사생팬이었을 줄이야.

심지어 예전에 정모에서 봤던 아저씨들은 전부 덜렁교의 고위간부이다.

뭐 아무튼.

우리는 안전한 통로로 빠져나가서 인적 드문 한적한 곳에서 경기를 직관하기로 했다.

덜렁교의 호위 덕에 우리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임요셉은 내게 물었다.

“이번 경기 어떻게 보십니까?”

……일단 알몸으로는 안 볼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성실하게 대답해 주기로 했다.

“비슷비슷. 하지만 바스터즈가 조금 우세하다고 봐요.”

“그렇군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요셉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존경이 묻어나는 동작이었다.

한편 나 역시 임요셉을 상당히 좋게 보고 있었다.

저번 배그옵 경기 당시 임요셉은 나를 다구리하는 32명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점을 나는 아직도 고맙게 생각한다)

당시 임요셉은 배그옵에서 만난 마태강에게 패배했었다.

아마 자기 랭킹을 넘겨 줄 후계자를 마태강으로 점찍고 있는 듯하다.

“바스터즈의 마동섭이란 신예가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지요. 현 오크 랭킹 1위이니 인간 랭킹 1위인 저쯤은 순식간에 타이틀을 빼앗길 겁니다.”

임요셉은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마태강, 그 녀석이 인간이 아니라 오크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마동섭을 견제하기도 좋을 것이고….”

임요셉은 마동섭을 상당히 싫어하는 듯하다.

‘그렇겠지. 마동섭 인성은 나쁘기로 유명하니까.’

내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임요셉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연호도 걱정입니다. 왜 하필 바스터즈로 가서는.”

이연호. 전 국K-1의 에이스.

계약 문제가 어지럽게 꼬여 바스터즈에 몸담고 있다.

다만 원래 성격이 정직하고 곧은 녀석인 만큼 바스터즈 같은 썩은 구단에서는 마음고생이 심할 것이다.

임요셉은 두 주먹을 꽉 쥐고 중얼거렸다.

“이번 경기가 끝나면 연호에게 바스터즈와 한 계약을 파기하라고 할 생각입니다. 위약금을 물어주는 한이 있더라도요. 벌써 변호사도 구해 놨어요.”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그 외에 임요셉은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지금은 버티고 있지만 인간 종족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 나중에 은퇴 후 코치가 되고 싶다는 것 등등…….

그는 비교적 현 시류를 정확히 짚고 있었다.

심지어 근미래까지도 어느 정도 맞게 예측하고 있다.

‘……우리 쪽 코치로 스카웃할까?’

나는 임요셉을 조금 더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한편 임요셉은 나를 찬양하기에 여념이 없다.

“대격변 이후 오크와 리자드맨이 판치는 세상에서 이렇게 고인물 님께서 인간의 희망을 열어주고 계시니 너무 좋습니다. 고인물 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진즉에 인간은 망캐라고 아이디 지우고 새로 키웠을 겁니다. 아니면 아예 게임을 접었거나요.”

100% 순수한 팬심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그리고 그것은 임요셉이 아닌 다른 덜렁교 멤버들 역시 모두 동일했다.

한편.

덜렁교 멤버들은 흥분한 어조로 이번 리그의 우승후보를 묻는다.

“고인물 님. 마동왕이랑 마동섭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요?”

“그 둘의 승패를 어떻게 보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마동섭의 상승세가 무서운데, 마동왕도 조금은 부담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마동왕도 배그옵에서 마동섭이랑 정면으로 안 싸우고 화물을 민 게 아닐는지…”

심지어 임요셉마저도 정확한 확신이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덜렁교 멤버들의 질문에 나는 픽 웃을 뿐이다.

“다들 전 재산 현금으로 바꿔서 인출하세요.”

“……?”

“그리고 토토복권 사서 거세요. 마동왕에.”

이 말보다 더한 확실함이 어디 있을까!

모두의 표정이 확신으로 변해가는 순간, 나는 그들의 믿음에 쐐기를 박았다.

“공룡잠옷 입은 어린애하고 진짜 티라노하고 싸우는 꼴이죠.”

게임이 안 된다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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