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99화 (399/1,000)

400화 참교육 (2)

2위 결정전 당일.

전장이 개방되기 5시간 전.

세상은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빛에 잠겨 있었다.

쌀쌀한 바람이 일어 텅 빈 도시를 깨운다.

차규엽은 레드문 본사의 회장실에 앉아 커다란 TV화면을 보고 있었다.

“아마 잠자리가 조금 힘들었을 것이다.”

음흉한 미소를 띤 채 지난날을 회상하는 차규엽이다.

근방 호텔, 교통편, 휴게시설, 연습시설, 집회 신청, 협회 안내부서 등등.

차규엽은 산하의 조직원들을 풀어서 근방 호텔을 모조리 예약했다.

사내 워크숍이든 단합대회든 뭐든 상관없으니 지방에서 올라온 선수들이 단체로 묵을 만한 근교 호텔은 모조리 선점해버린 것이다.

자금이 너무 많이 든다 싶으면 사원들의 성과급이나 각종 다른 수당을 호텔 투숙권으로 강제변경 해 제공하거나 더 나아가 ‘노쇼’를 하는 꼼수까지 저질렀다.

그뿐만이 아니다.

엘리트즈 구단 측에서 대절해 놓은 개인버스 기사를 매수해 길을 돌아가게 만들었고 또 조직원들이 탄 각종 차량들이 동원되어 경기장까지 가는 길 동안 주행을 방해하거나 사소한 접촉사고를 낼 계획이었다.

연습을 할 만한 캡슐방이나 기타 캡슐 시설들의 기기를 조작해 적응을 어렵게 하거나 협회의 안내부서를 사칭하여 각종 필수서류들이 누락되었다며 귀찮게 하는 전략도 세웠다.

이후 선수들이 투숙할 숙박업체가 정해진 이후에는 그 근처 장소에서 실시간으로 밤새 계속 집회를 열어 선수들의 밤잠을 설치게 했던 것이다.

심지어 선수들이 투숙해 있는 방마다 몰래카메라로 의심되는 카메라 ‘모형’을 설치해 두어 선수들의 불안감까지 증폭시켜 두었다.

모형이라고 하면 불안감은 불안감대로 줄 수 있고 경찰에 신고를 해도 별다른 처벌이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해외 선수들이 왔을 때 그들의 적응을 방해하는 홈 팀의 저열한 전략으로 으레 사용되는 것들이지만 차규엽은 이 모든 것들을 국내리그에서 사용하길 개의치 않아 했다.

“이제 외부에서 개입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했지. 이제 정정당당히들 붙어 보시라고. 큭큭큭.”

차규엽은 소파에 기댔다.

현재시간 7시 반. 오후 2시에 있을 경기를 준비해야 하려면 이제 슬슬 잠에서 깨어나 씻고 기타 등등 준비를 마쳐야 한다.

차규엽은 엘리트즈가 묵기로 한 모텔의 로비에 진짜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두고 선수들이 일어났는지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한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선수들이 카메라에 잡히질 않는다.

느지막이 일어난 다른 투숙객들이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하는데도 선수단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허허, 사람들 참. 아직도 자나? 아무리 지난밤에 잠을 잘 못 잤더라도 이러면 안 되지.”

꺼삐딴 차.

차규엽은 껄껄 웃으며 품 안의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일곱 시 사십 분!’

대회까지는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다.

그는 심호흡을 한 뒤 다시 TV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뒷골목 양아치로 시작한 그가 지금은 국내의 내로라하는 우량기업의 회장이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지금 집요하게 TV 화면을 통해 적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그의 치밀함 덕분이리라.

‘이제 여덟 시!’

하지만 아직도 모텔 로비에 엘리트즈 선수들의 모습은 잡히지 않는다.

…심지어 감독 등의 실무진들까지도.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는가?

물론이다. 먼 해외에서 기껏 와놓고 선수단 전원과 실무진 전원이 늦잠을 자는 바람에 대회 당일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한 어이없는 사례는 심심찮게 존재한다.

대학입시나 입사면접, 공무원 시험이나 토익 응시 때도 오지 않는 인원이 많은 것과 비슷한 느낌.

물론 철두철미한 차규엽의 상식선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쯧쯧, 무능한 것들. 이 중요한 날에 몸 좀 피곤하다고 아직까지 자빠져 쳐 자? 그러니 네놈들이 평생 위로 올라갈 수가 없는 것이야.”

차규엽은 담배를 한 대 입에 물고는 또다시 회중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금으로 만들어진 회중시계.

레드문이 뎀 산하의 기관으로 고개 숙여 들어갈 당시 기념품으로 받았던 영예로운 수상품이다.

그 후 수년간 다른 기업들의 적대적 M&A, 국세청의 세무조사, 불량품에 성난 대중들의 불매운동, 타 폭력조직들의 야습 등 몇 차례 아슬아슬한 위기를 맞아 넘겼다.

이제 닳고 닳을 만큼 닳은 그는 어지간한 위기나 변수에는 초연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든 된다’라는 기묘한 믿음이 마음 속 기저에 늘 깔려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 유다희, 그년이 옆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차규엽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오래 전 사소한 일 하나로 경찰에 출두할 일이 있었다.

레드문 출발을 앞두고 있던 때였기에 몸을 사리고자 꽤 아끼던 동생 하나를 대신 보냈다.

오래 전부터 짝사랑했던 여자가 결혼할 사람이라며 소개시켜 줘 만났던 사이였기에 고마움과 죄책감, 그리고 시원함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는 매사에 써먹기 좋은 핑계다. 그리고 차규엽은 정말로 일이 바빴다.

차규엽은 동생이 출소하기까지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쩌면 일부러 더.

오랜 시간이 지나 폐인이 된 동생과 그런 아버지를 먹여 살리고 있던 삼남매를 발견했을 때, 차규엽은 가슴 속을 탁 건드리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것은 운명 비스무리한 것이었다.

‘나와 함께 살자.’

차규엽은 유다희를 거뒀다.

객관적으로도 뛰어난 미모였지만 첫사랑의 외모와 닮았다는 것도 큰 몫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남자를 그것 이상으로 집착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아버지와 딸 사이보다는 많고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보다는 적은 나이 차였지만 차규엽은 유다희에게 최선을 다했다.

갖고 싶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뭐든지 해줬다. 건물. 차. 집. 옷. 각종 사치품들.

하지만 그것들은 전부 바닥이 없는 늪에 무언가를 채우는 것에 불과했다.

던져 넣으면 던져 넣을수록 골은 차는 게 아니라 패였다. 점점 더 크게.

그러더니 이제는 아예 그녀와 연락도 닿지 않는 시점에 이르렀다.

“…실수였어. …나만을 의지할 수 있게, …나만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애비뿐만이 아니라 그 밑의 동생들까지 제거했어야 했다.

차규엽은 분노에 몸을 한번 가늘게 떨었다.

“내 믿음을 배신한 대가는 무거울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TV 화면을 쳐다보았다.

현재시간 오전 8시 반. 아직도 엘리트즈 구성원들은 모텔 로비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그런데 너무 안 일어나는데?”

차규엽은 처음으로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적들이 지각으로 인해 허둥대는 모습을 7시 반 정도에는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시간으로부터 1시간이 지난 지금도 실무진 하나 얼쩡거리지 않는다는 것은 무언가 이상했다.

“전부 다 기권패 당하고 싶은 건가? 머저리 같은 것들.”

차규엽은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시계의 작은 바늘이 이제 9를 넘겼을 무렵.

[턱-]

TV화면 속에 등장한 사람이 있었다.

“……!”

차규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안경을 올려 썼다.

TV화면에 고개를 가까이 대자 화면에 잡힌 이의 복장이 눈에 들어온다.

흰색 원피스에 큰 플로피 햇.

‘이 복장은 분명…….’

어제 로비에 들어갈 때 이은비라는 선수가 이런 복장으로 들어갔었다.

인간 족 마법사 유저. 엘리트즈 안에서 에이스로 군림하는 선수여서 주목하고는 있었다.

“이제야 일어나다니. 요즘 것들은 당최!”

차규엽은 혀를 찼다.

이은비의 뒤를 이어 이금비, 이동비가 나온다. 전부 다 치렁치렁한 원피스를 입은 채다.

그들은 한가로운 태도로 복도 저편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차규엽은 어이가 없이 픽 웃었다.

“어린 것들이라 그런가 개념이 없구먼. 늦게 일어났는데도 저렇게 여유롭다고? 복장은 또 저게 뭐야. 원피스라니. 대회 나가는 선수가…에잉 쯧쯧.”

…하지만.

차규엽은 마냥 혀를 찰 수가 없게 되었다.

금은동 자매가 점점 걸어와 카메라 화면으로 다가올수록 차규엽의 두 눈이 벌어졌다.

“…좀 큰데?”

뭐가 크다는 걸까?

…그것은 바로 ‘덩치’이다!

이윽고, 큰 체구를 가진 금은동 자매가 로비에 설치된 카메라 앞에 섰다.

키 190cm, 몸무게 90킬로그램이 넘는 피지컬의 금은동 자매.

[하이.]

그중 이은비가 손을 들어 차규엽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유창.

그리고 그를 따르는 가출 청소년 몇몇이 원피스를 입은 채 차규엽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주르륵…

차규엽은 입에 머금고 있던 오렌지쥬스를 흘려 버리고 말았다.

[부욱-]

유창은 껄껄 웃으며 입고 있던 원피스를 찢어 버렸다.

세 개의 덜렁덜렁이 카메라에 확 확대되어 잡혔다.

“으악!”

차규엽은 눈이 썩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안경을 벗었다.

대낮부터 남자 셋이 칠칠치 못하게 덜렁거리는 것을 봐야 하다니!

우연일까?

빠직-

그때쯤 해서 소중하게 쥐고 있던 회중시계의 화면에 커다란 금 하나가 가 버렸다.

기계 노후라고 하기에는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보고 있냐? 규엽아? 이제 같은 식구도 아니니 말 좀 깔게? 나는 똥꼬로 먹은 나이는 대접 안 해 줘서~]

유창은 TV화면에 대고 빈정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이러고 다니냐 너? 이런 데서 몰카나 찍고, 동네 똥양아치 근성 어디 안 가죠?]

“……! ……! ……!”

[뭐 아무튼 간에. 우리 가족들은 정말 믿을 수 있는 좋은 ‘후견인’을 만나서 짐 쌌고, 너랑은 이제 다시는 볼 일 없을 것 같다. 찾지 마. 뭐, 찾을 수도 없을 테지만.]

말을 마친 유창은 화면에서 사라졌다가 잠시 뒤에 다시 나타났다.

까먹고 하지 못한 말이 있다는 눈치였다.

[참, 앞으로 눈에 띄면 뒤진다?]

차규엽은 입을 딱 벌렸다.

손자뻘인 젊은 놈에게 반말과 쌍욕을 듣자 전신이 와들와들 떨려온다.

온몸의 피가 발바닥을 통해 쫙 빠져나가는 느낌.

놀람과 분노보다 앞선 것은 자괴감과 슬픔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타오른 것은 지옥불보다 더 뜨거운 증오!

하지만 차규엽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 대표님!”

문 밖에 있던 비서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차규엽이 고개를 돌리자, 비서는 사색이 된 표정으로 외쳤다.

“엘리트즈 선수들 지금 용산 경기장 선수 대기실에 입장해 있답니다!”

……!

이게 무슨 소리인가! 설마 선수 대기실에서 밤이라도 샜다는 이야기인가!?

“개소리! 협회로부터 그런 보고 없었는데!”

“그, 그게… 협회에서 제공한 차량과 안내 서비스를 다 거절하고 아침 7시 30분쯤에 전용차량으로 바로 경기장 뒷문을 통해 입장했답니다. 그 직후 바로 선수 대기실로 가서 지금껏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기에 파악이 늦었다고…….”

차규엽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제 그토록 북 치고 장구치고 난리 부르스를 피웠는데, 심지어 몰래카메라로 호텔 로비를 계속 찍고 있었는데도 몰랐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얏!”

분노한 차규엽의 목소리가 레드문의 꼭대기,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를 향해 울려 퍼진다.

엘리트즈 선수들은 언제 어떻게 모텔을 빠져나갔고 지난밤에는 대체 어디에서 묵었단 말인가!?

차규엽으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미래가 조금씩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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