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97화 (397/1,000)
  • 398화 나쁜 놈 (4)

    차규엽.

    흰 올백머리에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상석에 앉아 있다.

    동그란 안경 때문에 인상이 순해 보이지만 사실 그 밑으로는 뱀 같은 눈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몇몇 중년인들이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요즘 잘 나가는 여당의 젊은 피, 메이저 신문사의 주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서 근무하는 이, 거대 노동조합의 고위간부, 모 대기업 이사, 유명 연예기획사 사장, 대형병원의 원장, 군 장성…….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 불리는 쟁쟁한 인물들이 한 방 안에 모두 모여 있었다.

    심지어 외국인들도 다수 보인다.

    “레드문의 무한한 번영을 위하여!”

    “차규엽 대표님 만수무강 하십쇼!”

    “붉은 달이여 영원하라!”

    “건배!”

    모든 이들은 입을 모아 차규엽과 레드문의 무사안녕과 영원한 번영을 축원한다.

    “허허허. 거 사람 민망하게.”

    차규엽은 손사래를 치면서도 이 모든 찬양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다국적기업 ‘레드문’의 대표이자 오늘 이 사교모임을 주최한 모임장이다.

    그럼 레드문(Redmoon)이란 어떤 기업이냐?

    국내 1위 캡슐제조사이자 갓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개발한 초국적기업인 뎀의 산하 협력기업으로 다양한 버전의 게임 캡슐 장비를 제작하는 것을 주 사업 분야로 삼고 있다.

    (최근에는 뎀 전용 캡슐이 생산량의 99%에 달하며 사실상 자회사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공식적인 매출액은 1조 원에 이르며 직원 수만 해도 3천 명이 넘는다.

    비정규직 직원들이나 자회사, 협력업체들까지 추산하면 그 배도 넘을 것이다.

    코스피 상장을 비교적 최근에 한 중견기업이지만 그 암부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자본력만은 어지간한 대기업에 비벼 볼 정도로 대단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 자본력을 통해 정치, 경제, 군 등 다양한 곳에 시커먼 로비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레드문’인 것이다.

    “자, 듭시다. 들어요.”

    차규엽은 몰트위스키가 든 잔을 들어 건배를 제안했다.

    쨍!

    얼음이 잔에 부딪치는 소리.

    샹들리에의 조명을 받은 호박색 위스키가 잔에 부딪쳐 끈적하게 흘러내린다.

    쨍! 쨍! 쨍! 쨍!

    다들 차규엽의 지시에 따라 잔을 들어 말리기 시작했다.

    술 한 잔을 기분 좋게 털어 삼킨 차규엽은 불콰해진 표정으로 씩 웃었다.

    “자, 동업자 여러분들. 우리의 밥줄을 지켜 주고 있는 ‘뎀’을 위해 다들 파이팅 한번 합시다,”

    회사 ‘뎀’, 21세기 최고의 게임회사.

    국적불명의 개발자이자 회장인 ‘윌리엄 윌슨’의 경영 아래 2020년대 이후 매년 10~20%의 폭발적인 성장률을 꾸준히 기록하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초국적기업으로 성장했다

    세계 16개 지부, 107개 국가에서 약 9만 명의 직원이 근무하며, 매출은 약 2천억 달러 이상.

    전 세계 가상현실게임 시장의 98%를 장악하고 있으며 1억 명이 넘는 동시접속자 수를 가지고 있는 실정이다.

    차규엽은 한 국회의원이 따라 주는 술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요즘은 뎀이 대세지. 뎀을 거역하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거야. 안 그렇소?”

    “그렇습니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차규엽의 술과 말을 받아 잔과 입에 담는다.

    뎀이라는 회사가 날개를 펴는 순간 차규엽은 재빠르게 고개를 숙이고 그 거대한 날개의 밑으로 들어갔다.

    어찌 보면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전략일 수도 있겠다.

    시대의 흐름을 읽는 눈으로 약삭빠르게 행동한 결과, 차규엽은 지역구 양아치에서 전국구 거물로 탈바꿈했고 이제는 어지간한 사회 지도층들쯤은 산하에 거느리게 되었다.

    심지어 미국의 의원들과도 긴밀한 연줄이 닿아 있다는 그이다.

    차규엽은 턱수염에 붙은 술방울을 털어내며 말했다.

    “미국의 상원의원들도 ‘윌리엄 윌슨’이라는 해외 큰손의 비위를 맞추느라 정신없더군. 나는 운이 좋았지. 일찌감치 그 밑으로 들어가 한국 게임계를 주무를 수 있는 권한을 받았으니 말이야.”

    그는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영웅과 악당의 차이를 아나?”

    그러자 다들 의아한 기색이다.

    “…아뇨. 잘 모르겠습니다, 어르신.”

    “가르침을 주십시오.”

    “새겨듣겠습니다!”

    국회의원도, 대기업 이사도, 군 장성도 모두 고개를 숙인다.

    차규엽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영웅은 자기 자신의 미래를 위한 구체적인 목표가 없지. 언제나 타인의 꿈이나 계획을 방해하고 좌절시키는 것이 삶의 보람이야. 누군가와 힘을 합치지도 않고 항상 단독으로 행동해. 또 매번 일이 벌어진 이후에야 움직여. 아주 수동적이지. 늘 사회에 불평, 불만이 많고 화가 나 있다고.”

    말을 마친 차규엽은 눈을 부릅뜨고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악당은 어때? 그에겐 큰 꿈과 야망이 있어. 목표 달성을 위해 언제나 연구와 개발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자료를 모으고 데이터를 축적해. 조력자와 연대하고 체계적, 조직적으로 행동하지. 한번 실패해도 절대 기죽지 않고 다시 도전하며 늘 이번에야말로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감을 잃지 않아. ……그리고 또 잘 웃지 않나.”

    “우하하하하!”

    차규엽의 말에 좌중 사이에 웃음보가 터진다.

    그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 사회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네. 그런 것들이 많아 봐야 패배자들로 가득 찬 이 세상만 더욱 혼란스러워질 뿐!”

    “옳소!”

    “캬!”

    좌중의 리액션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모두가 술잔을 내려놓고 박수를 치기에 바빴다.

    바로 그때.

    “…저, 큰형님.”

    차규엽의 연설을 중간에 끊는 이가 있었다.

    레드문의 직원 하나가 룸의 문을 조금 열고는 작은 목소리로 차규엽을 부른 것이다.

    “음, 일단 재밌게들 놀고 계시게.”

    차규엽은 좌중을 향해 손짓하고는 몸을 움직여 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직원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회의 중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뭐야?”

    “……그게, 보고드릴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직원은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유다희 양과 유창희 군, 그리고 유세희 양 모두 위치추적이 안 됩니다.”

    “뭐야? 그것들이 하늘로 솟았어 땅으로 꺼졌어? 왜 못 찾아?”

    “그게… 병원에서 퇴원수속을 밟은 뒤부터는 좀처럼 찾을 길이 없습니다. 유다희 양이 개인방송을 하는 것을 몇 번이나 돌려봐도 장소를 추측할 길이 없어요.”

    “이런 무능한 새끼들을 봤나!”

    차규엽은 콧수염을 떨며 직원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찼다.

    유다희의 얼굴을 떠올리자 차규엽의 눈에 기묘한 열기 같은 것이 어린다.

    “반드시 찾아내. 나는 그년의 후견인이야. 진정한 ‘어른’이 될 때까지 보살펴 줄 의무가 있단 말이야.”

    “으윽! …예. 흥신소 쪽 애들을 좀 더 조여 보겠습니다.”

    직원은 한쪽 다리를 절며 고개를 다시 한번 숙였다.

    아직 보고할 것이 하나 더 남았다는 부담 때문에 잔뜩 썩은 표정이었다.

    “저 그리고….”

    “또 뭐?”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 오버…있지 않습니까?”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국가대표 선발전 이야기가 나오자 차규엽이 또다시 눈을 부릅떴다.

    직원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닳고닳은 뉴비’ 구단이 최종 우승했습니다.”

    그러자 차규엽의 이마에 실뱀 같은 핏줄이 곤두섰다.

    “요즘 여기저기 숟가락 얹고 다니는 유튜뷰 외에 제대로 된 스폰도 없는 신입구단 따위가…!”

    “프, 플레이 영상 보여드릴까요?”

    “필요 없어! 게임? 그런 현실 패배자들이 하는 자기위로 같은 걸 내가 왜 봐!?”

    차규엽은 게임으로 돈을 벌고 있으면서도 게임을 싫어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명색이 뎀의 협력업체이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캡슐 제조사인데 그런 자기들이 후원하는 프로구단이 프로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것은 기업 이미지 홍보 차원에서도 큰 마이너스였다.

    더군다나 이번 선발전에서 레드문의 스폰 기업인 ‘바스터즈’가 우승하지 못한다면 승부조작을 해서 보던 쏠쏠한 재미들도 더는 볼 수 없게 되어 버린다.

    하위랭킹 구단들을 가지고 놀기에는 자존심도 안 살고 파이도 너무 적지 않은가? 적어도 아시아 정도는 주물러야지.

    “…전국구도 너무 작아. 남자라면 세계 급으로 놀아야지. 한국이라는 고인 우물 안에만 있으면 개구리도 못 돼.”

    차규엽은 눈에 핏발을 곤두세웠다.

    “정부도 막을 생각 못하는 나를 고작 신인구단, 한낱 게임쟁이 나부랭이들이 막아서? 하, 참. 어이가 없어서…….”

    차규엽은 턱수염을 쓸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직원을 향해 물었다.

    “곧 2위, 3위 결정전 다시 할 거야. 그때 우리 애들 관리 잘 하라 그래.”

    “…예!”

    “근방 호텔, 교통편, 휴게시설, 연습시설, 집회 신청, 협회 안내부서… 다 점검했어?”

    “예! 전부 다 손을 써 뒀습니다.”

    직원의 대답에 그제야 차규엽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는다.

    “어디 한번 보여 주지. 세상이 이토록 무섭다는 걸 말야. 후후후후…….”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차규엽의 목소리가 달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       *       *

    “…흠. 오늘은 달이 빨갛네?”

    이태원. 나는 17층 건물의 꼭대기에서 유리창 너머 하늘을 바라보며 운동을 하던 중이다.

    런닝머신에서 내려온 나는 땀을 닦은 뒤 벤치프레스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덤벨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근방 호텔, 교통편, 휴게시설, 연습시설, 집회 신청, 협회 안내부서… 다 점검했다고 생각하겠지?”

    나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어디 한번 보여 주지. 세상이 이토록 무섭다는 걸 말야. 후후후후…….”

    그리고 지금쯤 어둠 속에서 흉계를 꾸미고 있을 적에게 조소를 보내주었다.

    악당은 늘 자기를 과신하는 경향이 있는데 꼭 그러다가 망하는 법이다.

    “…일단 가볍게 야코부터 죽여 놓을까?”

    지금부터 참교육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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