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91화 (391/1,000)
  • 392화 홀인원 (2)

    전용진 캐스터의 말에 관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돔구장 지붕을 날려버릴 듯한 함성!

    그 뜨거운 열기에 힘입은 캐스터들은 열띤 목소리로 바뀐 룰에 대해 설명했다.

    [서서히 좁혀 오는 ‘레드 존’을 피해서 최후까지 살아남는 것이 가장 명확한 우승 방법이지만 이렇게 각 구역에 있는 화물을 밀어서 중앙 지점까지 옮겨 놓는 것 역시도 우승의 방법입니다!]

    [종족이나 직업 간 밸런스를 조정하기 위해 도입한, 기존의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를 넘는 신개념 시스템!]

    [일명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 오버(Battle Royale Ground Zero Over)’! 줄여서 ‘배그옵’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생존경쟁이죠!]

    무언가를 밀어 특정 위치에 가져다 놓음으로서 승리하거나, 히든 피스를 발견하거나, 상대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히는 시스템은 FPS, RPG, AOS 등, 장르를 불문하고 오래 전부터 널리 선호되어 온 방식이다.

    특히나 ‘화물’을 미는 개념은 **워치, **딘스, **맨, **몬스터, **아케이드 등 많은 게임들에서 즐겨 다뤄지던 소재이기에 게이머들에게는 이미 친숙하다.

    전용진 캐스터는 스크린에 있는 화물을 상세히 설명했다.

    [가로 8미터, 세로 8미터, 높이 8미터!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비밀! 파괴불가 오브젝트이기에 다소 험하게 다루셔도 상관없습니다! 이 화물을 맵 중앙에 있는 커다란 격납고 안에 밀어 넣는다면 무조건적인 우승이죠! 다만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꽤 무겁거든요!]

    그러자 다른 캐스터들 역시 화물을 미는 개념에 대해 추가적인 코멘트를 남겼다.

    [아, 저번에 보니까 어지간한 딜러 유저들이 밀어도 거의 꿈쩍을 안 하던데……. 화물 무게가 정말 미친 듯이 무겁더라구요. 뭐 우리 선수들이라면야 근력 스탯들이 다들 높을 테니 밀 수야 있겠지만…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는 무게입니다. 진짜 겁.나.무.겁.습.니.다!]

    [화물이 그렇게나 무겁다면 밀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습격당하겠는데요? 괜히 다른 선수들에게 어그로 끌려서 집중포격 당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남이 밀던 화물을 빼앗거나 아니면 애초에 화물은 신경 쓰지 말고 평소처럼 생존에만 주력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아무튼 이 화물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큰 변수가 될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대회가 제 1회이니까요.]

    다들 바뀐 시스템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전용진 캐스터는 흩어지려는 주의를 다시 하나로 끌어 모았다.

    [네! 다음은 맵 설명으로 이어지겠습니다! 오늘 생존경쟁이 펼쳐질 곳은 공중도시 ‘마그버드’! 지상 위 200미터 상공에 떠 있는 공중섬 맵인데요. 천공섬의 몰락 후 남아있는 부유석 잔해들이 모여 만들어졌다는 설정이죠? 페루의 공중도시 ‘마추픽추’를 모티프로 만들어진 맵이니만큼 그 높이가 상당한 고지대입니다. 거의 50층 빌딩의 높이쯤 되니 떨어지면 제아무리 단단한 탱커라도 한 방에 갈 수 있겠죠? 다들 낙하 데미지를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맵 설명을 간략히 끝낸 전용진 캐스터는 카메라 화면을 좌측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검은 후드를 쓰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차분한 자세로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맨 앞에 있는 검은 후드가 일어나 화면에 대고 꾸벅 인사를 했다.

    전용진 캐스터는 밝은 표정으로 꾸벅 마주 인사를 한 뒤 입술을 뗐다.

    [이번에도 맵에 있는 몬스터나 기타 함정들 정리를 도와주신 GM 처리반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윽고, 전광판에 떠 있던 초시계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다운. 거의 다 타들어 간 도화선처럼 보기에 긴급하다.

    [경기! 시~작합니드아아아!]

    전용진 캐스터의 우렁찬 외침과 동시에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 오버(Battle Royale Ground Zero Over)’가 시작되었다.

    *       *       *

    10개 구단, 50명의 선수들이 공중도시 마그버드에 무작위로 떨어져 내렸다.

    선수들은 이내 바로 주변 지형을 파악한 뒤 각자의 전략에 따라 움직였다.

    바로 동료부터 찾으러 가는 이도 있고 거점을 점령해 아지트나 은신처를 만드는 이도 있다.

    시작하자마자 옆에 떨어진 적과 싸우는 이도 있었고 냅다 도망가 숨는 이도 보인다.

    캐스터들은 50명 전원의 움직임을 각각의 화면에 띄운 채 차분하게 중계를 시작했다.

    [네, 선수들! 대체로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역시 늘 그랬던 대로 초반 은신처 형성 및 회복 아이템 파밍에 들어가나요.]

    [화물을 발견한 선수들이 몇 있습니다만은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제정신이면 저 미친 듯이 무거운 화물에 혼자 달라붙지는 않겠죠. 거기에 혼자 화물을 밀고 있으면 적들의 집중포격 대상이 될 텐데…….]

    바로 그때.

    전용진 캐스터가 마이크를 잡았다.

    […아앗!? 이게 뭔가요! 주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50개의 작은 화면 중 하나를 크게 클로즈업했다.

    모든 관중들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전용진 캐스터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외쳤다.

    [마동왕! 마동왕 선수입니다! 세상에! 혼자서 화물을 밀고 있어요!]

    그 말에 다른 캐스터들 역시 놀란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내 모든 캐스터들은 황당함에 입을 딱 벌려야 했다.

    그것은 캐스터들이 클로즈업한 화면을 보고 있는 십 수만의 관중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내, 전용진 캐스터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겨우 움직여 한 마디를 떼어 놓았다.

    [……아니 그런데, 저걸 ‘밀고’ 있다고 봐야 하나요?]

    *       *       *

    “접속.”

    [음성 인식으로 보안 해제]

    .

    [동기화 중입니다……]

    .

    [동기화 완료!]

    나는 환한 빛기둥과 함께 공중 도시 마그버드의 위로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원반형의 도시. 토목으로 만들어진 건물들이 아름답게 늘어져 있다.

    당연히 지나다니는 NPC나 몬스터는 하나도 없었다.

    “오, 이것 봐라?”

    나는 접속하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녹색 십자가를 보고 감탄했다.

    이것은 ‘힐팩’이란 것으로 맵마다 일정한 위치에 생성되는 포션 같은 것이다.

    소형 힐팩은 녹십자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HP 1.000을 즉시 회복시키며 한번 쓰면 재사용 대기시간은 약 1분.

    대형 힐팩은 녹십자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HP 3.000을 즉시 회복시키며 한번 쓰면 재사용 대기시간은 약 3분.

    이런 힐팩들이 맵 곳곳에 랜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 또한 바뀐 시스템의 일부이다.

    “배그옵이라. 그리운 시스템이군. 이제야 만나 보게 됐구나.”

    나는 회귀 전 기억을 더듬으며 눈앞에 있는 소형 힐팩을 지나쳤다.

    눈앞을 가로지르는 철길을 따라 흙벽돌 무더기와 넝쿨식물 군락 사이를 지나자 이내 내가 찾던 것이 보였다.

    화물!

    가로, 세로, 높이 8미터의 커다란 나무궤짝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두 손을 쓱쓱 비볐다.

    “화물을 미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게이머의 미덕, 팀 기둥의 역할이지.”

    화려하게 날뛰고 싶은 것은 모두가 똑같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공동체의 승리에 기여하는 것이 바로 어른의 참된 모습이 아닐까?

    참고로 화물은 파괴불가이며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오브젝트이다.

    일반 유저들은 5명이 모여야 겨우 낑낑거리며 밀 수 있는 것이다.

    한데?

    “……호오.”

    내 눈에 이채를 비추는 장면이 있었다.

    내가 발견한 화물은 이미 먼저 밀고 있는 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아아아앗!]

    오크 유저 하나가 온 힘을 다해 화물을 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전신의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신박’ 이근형. 근력과 체력이라면 어디 가서 절대 뒤지지 않는 국내 정상 급 탱커였다.

    그는 대격변 이후 오크가 된 모양이다.

    인간 시절에도 힘 하나는 알아주던 그답게 오크가 된 뒤 자신의 특기였던 힘을 극한까지 갈고닦은 듯했다.

    꾸구구국…

    이근형이 온몸에 힘을 주자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녹색 근육들이 힘차게 약동한다.

    1cm, 2cm, 3cm……

    육중한 화물이 천천히 앞으로 밀리고 있었다.

    오크의 종족 특성이 더해진 결과일까? 실로 놀라운 힘이다.

    바로 그때.

    […!]

    화물을 밀던 이근형이 나를 알아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거꾸로 툭 튀어나온 송곳니를 드러내며 뒤로 물러나 경계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와 신경전을 벌이려 하지 않았다.

    다만.

    “비켜.”

    소매를 걷어붙이며 짧게 한 마디를 건넸을 뿐이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있는 이근형의 앞을 지나갔다.

    [……!]

    내가 무방비 상태인 것을 본 이근형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나를 향해 달려들 준비를 한다.

    ……하지만.

    뒤이어진 내 행동을 본 이근형은 달려들기는커녕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서야 했다.

    콰-쾅!

    나는 손바닥을 들어 화물을 그대로 후려갈겨 버린 것이다!

    …콰지지지지지직! 쿵! 우르릉!

    화물은 내 눈앞에서 허공에 붕 떠올랐고 그렇게 십 수 미터 앞으로 나가 떨어졌다.

    고오오오오…

    화물이 떨어진 자리에는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주변의 흙은 왕창 패였고 충격파 때문에 대량의 모래가 날려 바닥에 커다란 원이 생겼다.

    마치 핵탄두에라도 맞은 듯한 광경.

    “…생각보다 무겁네.”

    손목을 까딱거리며 중얼거리는 나를 보며 이근형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다.

    밖에서 관객들과 캐스터들이 뭐라 외치고 있을지 안 봐도 알겠다.

    “그럼 다시 밀어 볼까?”

    나는 또다시 화물을 향해 손바닥을 들었다.

    …펑! …콰쾅! …콰지지지지직! …퍼펑! …우르릉! …쿵!

    내가 손바닥을 휘두를 때마다 화물이 쭉쭉 밀려나간다.

    …사실 민다기보다는 날려버리는 것에 가까운 행동이었지만.

    나는 화물을 쭉쭉 밀어 어느새 맵 중앙부에 접어들었다.

    저 멀리 격납고가 보인다.

    저 구덩이 안에 화물을 밀어 넣기만 하면 게임은 끝난다.

    하지만.

    그걸 손 놓고 바라보고만 있을 만큼 다른 선수들이 바보는 아니었다.

    목조 건물의 창 안, 흙벽돌 무더기의 위, 넝쿨식물 무더기의 속.

    곳곳에서 수많은 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 오크, 리자드맨.

    종족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나와 내 화물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 수가 거의 서른을 넘어가고 있다.

    하나같이 나를 향해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는 눈빛들.

    나는 피식 웃었다.

    “어이쿠. 아주 작정하고들 왔구나?”

    대격변으로 인해 강해진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 그것은 대격변 이전 프로리그의 최강자였던 나를 공개처형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나 역시 이번 대회에 아주 작정을 하고 나왔다는 사실을.

    대격변 이후에도 최강임을 자랑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 그것은 대격변 이후에 날뛰고 있는 강자들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이리라.

    나는 눈앞에 있는 프로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까닥 당겼다.

    “판 깔렸다.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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