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90화 (390/1,000)
  • 391화 홀인원 (1)

    국가대표 선발전 당일.

    용산 E스포츠 스타디움 앞에 역대급 인파가 몰려들었다.

    자그마치 15만 명이나 되는 팬들이 한날한시에 모여 있는 장면은 가히 장관이었다.

    E스포츠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대기록.

    홀은 물론이요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시설들이 죄다 마비될 정도로 엄청난 성황이다.

    제 1회 뎀 프로리그 당시 10만 관중이 몰려들었을 때보다도 더욱 더 뜨거운 열기가 온 세상에 요동치고 있었다.

    곳곳에서 축제가 벌어졌고 커다란 전광판과 홀로그램 기계로 경기 홍보 영상들이 재생된다.

    이내.

    부우웅-

    몇 대의 벤이 인파를 가르며 전용 도로로 진입했다.

    벤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나온다.

    오늘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가한 50명의 선수들이었다.

    우-와아아아아!

    경기장이 날아가 버릴 정도로 엄청난 함성.

    “오크! 오크! 오크! 오크!”

    “리자드! 리자드! 리자드! 리자드!”

    예전에는 선수들의 개별 이름이나 팀 단위의 응원이 주로 들려왔던 것을 감안하면 큰 변화였다.

    대격변 이후 팬들의 최고 관심사는 바로 ‘종족’이었다.

    종족 킬 수치가 높아야 생기는 최강 종족 버프는 일반 플레이어들에게도 주어지기 때문에 팬들 입장에서도 같은 종족 선수가 흥행하면 그 여파를 나눠받을 수 있다.

    현실에서는 다 같은 인간이지만 게임에 들어가면 종족은 셋으로 갈라진다.

    한 오크 선수가 벤에서 내려 주먹을 높게 들어올렸다.

    “우오오오오오! 오크! 오크! 오크!”

    수많은 사람들이 발을 구르고 가슴을 치며, 마치 현실에서도 오크가 된 듯 우렁찬 고함소리를 내질러 선수의 퍼포먼스에 화답한다.

    그러자 리자드맨 플레이어도 질 수 없다는 듯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 리자드! 리자드! 리자드! 리자드!”

    그러자 벤에서 내린 리자드맨 선수들도 양 주먹을 들어 올리며 이에 화답했다.

    오크와 리자드맨.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끼리 불붙은 이 신경전은 수만 관중들의 마음에도 불을 당겨 놓는다.

    하지만.

    이 많은 인파들 중 ‘인간’을 연호하는 이들의 수는 극히 적었다.

    인간 진영을 고른 유저들은 어쩐지 기죽은 표정으로 오크 유저들과 리자드맨 유저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바로 그때.

    마지막으로 도착한 검은 벤 하나가 멈춰 섰다.

    그 안에서 내린 것은 바로 나. 마동왕이다.

    내가 등장하자 인간 진영 팬들의 표정이 약간이나마 밝아졌다.

    “와아아! 인간! 인간! 인간!”

    작은 함성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꺄아아악! 마동왕 파이팅!”

    “사! 랑! 해! 요! 마! 동! 왕!”

    “우! 윳! 빛! 깔! 마! 동! 왕!”

    유다희가 이끄는 마교 팬클럽의 응원소리가 따라오는 것은 이제 거의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팬들의 사랑에 화답하여 손을 흔들자 팬들 사이에서 아쉬움에 가득 찬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어디서 뭐했어요, 마왕님!”

    “오늘 보여 주세요! 인간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걸!”

    “좋은 성적 기대할게요!”

    하지만 마냥 좋은 소리만 들려오는 것은 아니었다.

    “뭐야? 마동왕 종족이 인간이야?”

    “인간 종족이면 우승은 글렀겠네.”

    “우우 퇴물! 한물갔다!”

    “대격변 전에 은퇴했어야지!”

    “박수칠 때 떠나라! 뒷방 늙은이!”

    “과거의 영광! 추하다!”

    팬클럽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나를 향해 야유를 보낸다.

    대부분 내가 퇴물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는데 주로 오크 유저들이나 리자드맨 유저들 사이에 그런 생각이 만연해 보였다.

    내가 경호업체 직원들이 만든 라인 사이로 걸어가고 있을 때.

    “퇴물 자식아! 그만 은퇴해!”

    “쎈 척 하지 마라! 인간 주제에!”

    몇몇 과격한 종족주의자 훌리건들이 테러를 감행해 왔다.

    온몸에 녹색 바디페인팅을 한 근육질 남자, 키가 1미터 90센티미터는 되겠다.

    다른 하나는 팔과 목을 비늘 문신으로 뒤덮은 근육질 남자였고 덩치는 방금 달려든 남자와 비슷해 보였다.

    각각 오크와 리자드맨 유저로 보이는 그들은 인간 종족 프로게이머를 대표하는 내게 엄청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이 막 경호업체 직원들을 헤치고 내 앞까지 다가왔을 때.

    “뭐야 이 귀여운 것들은.”

    내 뒤에서 확 튀어나온 손이 하나 있었다.

    유창. 유창희.

    얼마 전부터 내 운전기사 겸 캡슐방 매니저 겸 보디가드 일을 하게 된 직원.

    유창은 두 테러범들의 목과 쇄골을 잡더니 그대로 콱 찍어 눌러 바닥에 무릎 꿇렸다.

    “갸아아아아악! 아파!”

    “사, 살려 주세…….”

    유창의 손아귀에 붙잡힌 두 남자는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너무도 쉽게 바닥에 널브러졌다.

    ‘…악력 하나는 진짜 엄청나네.’

    나는 비슷한 덩치 둘을 1초도 되지 않는 순간 제압해 버리는 유창의 힘에 약간 오싹함을 느꼈다.

    회귀하기 전에 이런 놈에게 쫓겨 다녔다고 생각하니 새삼 식은땀이 흐른다.

    “어휴, 이거 지켜보는 눈이 많아서 확 패 버릴 수도 없고. 요즘 부쩍 이런 놈들이 많네요, 형님.”

    유창은 두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 경호업체 직원들에게 넘겨 버린 뒤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별 수 있나. 그만큼 이 게임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이 커졌다고 봐야겠지?”

    어찌 보면 좋은 일이기도 하다.

    이 게임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내 영향력도 같이 커질 테니까.

    심지어 나는 게임 세상에서 열일곱 신 중 하나인 오즈마저 거꾸러트린 몸이 아닌가?

    “오늘 모두가 알게 될 거야. 누가 진짜 한국 넘버원인지.”

    나는 유창을 뒤에 세운 채 돔구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종족 선수들이 벌이는 요란한 퍼포먼스 같은 것은 일절 없었다.

    정점의 귀환을 알리는 첫 신호는 그렇게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       *       *

    경기장 속 상황중계실.

    몇 명의 캐스터들이 중계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직 대회가 시작되려면 몇 분 정도 남았다.

    마이크가 꺼져 있는 상황에서 전용진 캐스터를 비롯한 몇몇 이들은 오늘 대회에 대한 단상들을 짧게 이야기했다.

    “그래, 오늘 경기 다들 어떻게 봅니까?”

    “저는 3D로 봅니다.”

    “아, 장난치지 마시구요~ 어떤 팀이 이길 것 같으세요?”

    “음, 저는 아무래도 전 한국 넘버원이었던 마동왕 선수가 있는 ‘닳고닳은 뉴비’ 구단에 제일 시선이 가네요.”

    “에이, 하지만 그 구단 선수들은 죄다 인간이지 않습니까? 요즘은 오크나 리자드맨이 대세라서 인간은 좀…….”

    “그래도 나름 외국인 용병도 있고 그렇던데요? 전 유망주였던 투신 마태강 선수도 그 구단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뭐 하나요? 다들 인간인걸. 심지어 나머지들은 다 언랭에 게임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다던데. 인력난 때문에 아무나 데려다가 머릿수 채운 티가 나잖아요. 아무리 한두 명이 잘 한다고 해도 조합이 구려서야…….”

    “맞아요. 인간만으로 구성된 팀은 도태될 수밖에 없죠. 어쩔 수가 없어요 밸런스란 게. 아무리 마동왕 선수가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을 보여 줬다고는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대격변 전의 이야기거든요. 최근 보여지는 오크나 리자드맨 선수들의 엄청난 기량과 성장세를 커버하는 것은 무리라고 봅니다.”

    “아마 옛날의 영광을 되찾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겠는데요. 마동왕 선수로서는 참으로 힘겨운 도전이 되겠습니다.”

    “저도 시선이 간다고만 했지 우승할 것 같다고는 안 했어요, 하하하. 하지만 마동왕 선수라면 분명 성적에 관계없이 좋은 경기를 보여줄 겁니다.”

    캐스터들이 생각을 주고받는 사이, 어느덧 선수들이 모두 입장했다.

    좌석을 가득 채운 팬들을 보며 캐스터들은 새삼 게임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관심과 집중.

    이곳에 모인 베테랑 캐스터들조차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장관이었다.

    이윽고, 전용진 캐스터를 중심으로 캐스터들이 팬들에게 오늘 있을 경기의 대략적인 룰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네! 오늘 모여 주신 신사 숙녀 여러분께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드립니다! 오늘 있을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국가대표 선발전 1차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장내가 들썩일 정도의 환호성이 이어진다.

    전용진 캐스터는 가슴 벅찬 감동과 함께 멘트를 이어 나갔다.

    [오늘 있을 자리는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 나갈 대표팀을 선출하는 1차 경연이니만큼 큰 의미를 지니는데요! 대격변 전과 달리 오크와 리자드맨이라는 종족이 추가되어 더욱 다양한 선수들의 더욱 다양한 플레이를 즐기실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합니다.]

    말을 마친 전용진 캐스터는 계기판의 버튼 하나를 눌렀다.

    위이잉…

    그러자 경기장 안의 커다란 전광판에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육면체 모양의 거대한 나무궤짝이었는데 바닥에 나 있는 철로 위에 우두커니 올려져  있었다.

    마치 기찻길처럼 만들어진 긴 길이 맵마다 하나씩 총 10줄로 나 있었고 그것은 맵 중앙의 한 지점을 향해 모여든다.

    10개의 직선이 오로지 하나의 교차점을 갖는 모양새. 마치 애스터리스크(*) 부호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총 10개의 나무궤짝이 그런 철로 끝부분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몇 사람이 함께 밀어도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무거워 보이는 궤짝이었다.

    궤짝에는 크고 붉은 글씨로 , <취급주의> 라고 적힌 스티커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전용진 캐스터는 외쳤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희는 대회 운영진의 의견에 따라 이번 대회부터 경기 방식을 조금 달리 하기로 결정했는데요! 이 ‘새롭게 추가된 시스템’은 종족 간의 밸런스를 조금 더 세밀히 조정함과 동시에 관중 여러분들께 더욱 더 다양한 재미를 드리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경기가 열리기 전에 공지했던 내용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팬들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경기 전 공지사항을 미리 읽어보고 오는 이들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전용진 캐스터는 홀로그램에 뜬 커다란 나무궤짝을 보며 말했다.

    [기존에 있던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에서는 총 12개의 구획이 랜덤으로 ‘위험구역’으로 설정되었고 그 범위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넓어지는 구조였죠. 위험구역 안에 일정 시간 이상 체류하면 사망으로 간주되었고 이 제한된 넓이의 구역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플레이어가 우승의 영예를 거머쥐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히 살아남는 것 말고 다른 방식으로도 우승을 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그 방법이 무엇이냐?]

    말을 마친 전용진 캐스터는 다시 한번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화면 속에 인간의 모양을 한 5개의 홀로그램이 등장했다.

    그것들은 열심히 힘을 합쳐 화면 속 거대한 나무궤짝을 밀기 시작했다.

    …그르륵! …드르르륵!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밀리는 궤짝.

    전용진 캐스터가 빨리감기 버튼을 누르자 시간이 몇 배속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국 철로를 따라 움직여 맵 중앙에 있는 커다란 구멍으로 쑥 빠졌다.

    그러자 화면에는 커다란 글귀로 ‘승리’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오오오오…!

    승리 메시지를 보며 환호하는 관중들, 전용진 캐스터는 씩 웃으며 한마디 했다.

    [바로 ‘화물’을 미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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