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88화 (388/1,000)
  • 389화 국가대표 선발전 (2)

    서울 용산. 국가대표 선발전이 열리는 E스포츠 스타디움 돔구장의 지붕이 저 멀리 보이는 곳.

    “아이쿠, 누추하신 분이 이런 귀한 곳에 어쩐 일로…….”

    자택에 있던 엄재영 감독이 너스레를 떨며 나를 맞이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아챔 일정 떴다면서요?”

    “어, 떴어. 정식 발표는 이틀 뒤고. 지금 바로 볼 수 있다.”

    엄재영 감독은 나를 자기 방으로 잡아끌었다.

    촤악-

    방바닥에 여러 서류들과 경기장 필드의 지도, 선수들의 사진과 프로필 등등이 넓게 깔렸다.

    엄재영 감독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휴. 니아 여신님들과의 만찬도 거부하시고 이런 곳까지 와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용.”

    “…형이 니아를 알아요?”

    “알지. 요즘 핫한 대세 걸그룹 아니냐.”

    “별일이시네요. 연예계 쪽은 하나도 관심 없으신 줄 알았는데.”

    “원래는 없었어. 그쪽에서 먼저 연락 오기 전까진.”

    “……?”

    나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 인상을 잠시 찌푸렸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후후, 어진아. 잘 봐라.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자세히 준비했다고. 형 노력이 가상하지 않냐?”

    엄재영 감독이 모아 온 자료들은 확실히 방대한 양이었다.

    나는 그중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할 국가대표 후보들의 면면들을 자세히 살폈다.

    “흐음. 이번에는 이 친구들이 나왔군. 으음… 그 선수는 출전하지 않았나? 오, 이 사람도 올라왔네? 의외인데. 엇, 이 선수가 여기로 이적했군. 오오? 이 랭커가 프로 데뷔를 했어? 호오, 이 팀도 출전했네. 그때 그 팀은 어디 갔지? 아, 해체했구나. 오? 얘도 나와? 허 참.”

    면밀하게 조사되고 준비된 자료들 덕에 내 회귀 전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됐다.

    나는 가끔 회귀하기 이전의 추억을 회상하기도 하고 회귀하고 난 이후의 전적을 떠올리기도 하며 서류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내가 알던 미래와 전체적으로 비슷하지만 조금 조금씩 다른 엔트리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내 행보에 큰 변수를 줄 이들은 없었다.

    ‘가끔 거슬리는 것들이 보이긴 해도, 전체적으로는 무난하겠군.’

    미래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내 예상보다 변화폭이 훨씬 적었기에 대비하기가 수월했다.

    동시에, 나는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의 구조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회귀 전 처음으로 열렸던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는 총 12개국이 참가했었다.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몽골, 대만, 베트남, 필리핀, 인도,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 나라들은 ‘리틀리그’와 ‘빅리그’라는 두 번의 거대한 리그를 치르게 된다.

    우선 ‘리틀리그’, 세 나라가 한 개 조가 되어 1차 승점제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르고 2차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 경기를 치르게 된다.

    하나의 나라만이 이 리틀리그를 통과할 수 있고 총 4개의 나라가 빅리그로 진출하게 된다.

    리틀리그를 통과한 4개국은 빅리그를 통해 1, 2, 3위를 선발하게 되며 이때 1위를 선출하는 방식은 토너먼트이다.

    맨 처음으로 열리는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이니만큼 그 의의는 엄청나다.

    우승컵을 거머쥐는 것은 물론이요 단순히 빅리그에 진출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국격 상승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죽이면 여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프로 선수들은 군면제를 해 줘야 한다는 여론까지 일고 있을 정도니 말 다한 셈이다.

    ‘…이 점은 회귀 전이랑 별 차이가 없네.’

    내가 대격변을 일으키는 바람에 대회 날짜가 변동된 것만 빼면 그다지 큰 여파는 없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 보이는 굵직굵직한 참가자들의 이름도 거의 대부분 비슷했다.

    엄재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또다시 10파전이야. 서울, 경기, 인천, 충남, 충북, 경남, 경북, 전남, 전북. 이번에 강원도 팀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참을 선언했고 대신 제주가 낀다. 1차는 아챔 리틀리그의 룰과 비슷하게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 방식. 국내리그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5팀을 추리는 게 아니라 3팀만 추린다는 것이지. 그리고 바로 2차 플레이오프로 1위를 선발한다.”

    “엄청나게 ‘빨리빨리’네요.”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시간이 부족한 게 아니라 협회의 높으신 어르신들께서 쓸데없이 의견통일에 시간을 많아 잡아먹은 것 같은데요? 정작 선수들이 대비할 시간도 없게.”

    “…정확히 봤네. 에휴. 협회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엄재영 감독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안 그래도 협회의 큰손 하나가 이런저런 어깃장을 많이 놨다나 봐. 그래서 아챔 일정도 많이 늦게 발표된 거라더라. 그 진상 때문에 내가 아는 협회 분들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심지어 한국 일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다른 나라에까지 민폐를 끼쳤다지? 국제망신이야 국제망신.”

    “그 진상이 누군데요?”

    “‘차규엽’이라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 하나 있는데……. 에이, 뭐 이게 중요하냐. 이왕 나온 일정이니 빨리 적응이나 해야지.”

    뭐, 이 점에서는 엄재영 감독의 말이 맞다.

    나는 눈을 감고 앞날을 그려보았다.

    “그러니까,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에서 살아남아서 상위권 3팀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이거네요.”

    “그렇지. 거기서 1위를 한다면 방어전 한 번만 치루면 되고 2위나 3위를 한다면 두 번의 시합을 치르게 되겠지.”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는 50명이 한 맵에 떨어져서 제한시간 동안 살아남거나 마지막 생존자가 되어야 끝나는 게임이다.

    상대를 죽이면 1점을 얻고 이 점수를 팀별로 집계해 점수 총합이 가장 높은 3개의 팀을 추려내는 것이다.

    엄재영 감독이 입을 열었다.

    “예전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와는 조금 다를 거다. 예전에는 인간들끼리만 싸웠지만 이제는 오크와 리자드맨들도 함께 싸우니 말이야.”

    “그런 점에서는 별 문제 없을 것 같네요.”

    “……그런 점에서는 별 문제 없을 것 같다고 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것 같네요.”

    나는 어깨를 으쓱여 엄재영 감독의 걱정을 지워주었다.

    오크와 리자드맨.

    1차 대격변 이후 악마와 용의 위세를 등에 업어 한껏 기세등등해 있을 녀석들.

    하지만 소수종족 ‘인간’의 반격은 제법 매서울 것이다.

    내가 아직 인간으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마동왕이 대격변 이후 첫 데뷔전을 얼마나 충격적으로 치르느냐, 바로 그것이다.

    ‘……어디 보자.’

    나는 핸드폰을 들고 고인물 명의의 계정으로 인터넷에 접속했다.

    오늘도 여전히 사람이 북적북적하다.

    짬짬이 올린 동영상들은 전부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대격변 적응 완료^^ 오크 퍼블(First Blood) 따봤습니다!>

    -우와아아아! 고인물 님이 인간으로 남으셨다! 충성충성충성^^7

    -오크, 리자드맨들은 공포에 떨어라! 고인물이 인간으로 남았도다!

    -ㅋㅋㅋㅋ더러운 유사인류 놈들! 휴먼이 나가신다!

    -휴먼이 제일 개체수 적어서 걱정했는데ㅠㅠ...그나마 고인물님이 계시니 안심이 되네요 휴...

    -원래 진짜 고수들은 순정을 좋아하는 법이다...인간 만세^0^

    -아아...나 리자드맨인데ㅠㅠㅠ고인물 님 따라서 인간으로 캐릭 다시 키웁니다...

    -ㅋㅋㅋ저 고인물 님 팬클럽 회장인데...어차피 저번 정모 때 캐삭빵 져서 계정 삭제했던 참입니다! 휴먼으로 다시 육성 갑니다!

    .

    .

    몇 초가 되지 않는 짧은 영상들도 기본 조회수가 수백만 단위다.

    해외까지 유명세를 타고 있는 나의 개인방송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인물 명의의 계정을 로그아웃한 뒤 마동왕 명의의 부계정으로 다시 접속했다.

    아니나 다를까, 요즘 마동왕 계정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대격변 이후 마동왕으로 보인 활동이나 실적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유다희와 마교 팬클럽들이 대신 전해준 근황들만 공지로 올라와있어 어딘가 휑한 느낌이 없잖아 있다.

    유다희가 마동왕의 이름으로 봉사활동을 다닌 것이나 기부활동을 한 것들이 올라와 있었지만 아무래도 내가 직접 동영상을 촬영해 올린 것보다는 조회수가 한참 낮았다.

    “한번 폭등시켜 줄 때도 됐지.”

    나는 대격변 이후 처음으로 마동왕의 행보를 세상에 널리 알릴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카리스마 있는 ‘한 방’을 보여 줘야 한다.

    -마동왕 요즘 뭐함?

    -대격변 이후 종족이 마음에 안들어서 캐삭했다는 소문이 있음

    -ㄷㄷㄷ 마동왕 님...컴백해주세요...

    -ㅂㅅ들아 이번 아챔에 나오겠지. 마동왕 아니면 누가 국대함

    -근데 솔직히 마동왕도 이제 한물간거 아니냐? 대격변 이후 쟁쟁한 랭커들이 얼마나 많이 생겼는디...

    -마동왕 보고싶다 아챔 나와라~~

    -마동왕 아니면 한국은 E스포츠 제왕 자리 다시 되찾기 힘들 것

    -근데 마동왕도 대격변 이후에는 어찌되었을지 모름;; 기량 다시 증명해야 할 듯?

    -대격변 때 다른 종족으로 변한게 맘에 안들어서 접었을지도..

    -마동왕도 오크나 리자드맨 됐으면 나도 인간 계정 삭제하고 다른 거 키울란다...

    .

    .

    나의 행방에 대해 여러 갑론을박들이 한창이다.

    각종 명탐정들의 추론부터 시작해 터무니없는 루머까지.

    대격변 이후 부쩍 강해진 다른 랭커들에 비해 나의 실력이 떨어졌을까 의심하는 분위기, 심지어 내가 이대로 게임을 접을까 불안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참, 사람들이 걱정이 많아.”

    나는 여전히 인간으로 남았다. 그리고 넘칠 정도로 건재하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보여 주는가이다.

    엄재영 감독은 한동안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일단 1차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에서 보여 줘야겠지?”

    기세등등한 오크와 리자드맨 프로게이머들.

    그들을 압도적으로 밟아 준 뒤 임펙트 있는 승리를 거머쥐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당연한 거고요.”

    엄재영 감독의 말은 정론이었지만 살짝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플러스 알파가 필요해.’

    나는 눈을 감고 머리를 굴렸다.

    이번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가장 충격적인 승리를 거머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그래. 그게 있었지!’

    생각났다.

    흥분한 대중들, 그리고 타성에 젖은 협회, 더 나아가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할 다른 나라들을 기선제압하는 것까지 가능한 최고의 퍼포먼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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