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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376화 (376/1,000)
  • 377화 죽여줘 (4)

    전란의 시대.

    용과 악마가 각축전을 벌이던 세상.

    나약한 인간들은 선택해야 했다.

    용 or 악마

    어느 쪽에 붙어야 이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한 몸 건사할 수 있을 것인가!

    용의 비호를 선택한 인간은 그 강대한 힘에 의해 육체가 뒤틀리고 변형되었다.

    용의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즉시 전신에 그들의 주인 된 존재를 흉내 낸 비늘이 돋아났고 이빨과 손톱 역시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아수라장이 된 세상에서도 적응해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강력한 근육과 커다란 몸, 길고 질긴 꼬리를 갖게 되었으며 몸속에 흐르는 피 역시 차가워졌다.

    생전 성품이 고결하거나 강력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던 이일수록 오히려 변화는 심했다.

    [아, 아, 아파. 무서워… 싸움…]

    리자드맨 용사.

    놈은 허물어져 가는 몸뚱이로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아득히 오래 전.

    아직 인간일 때의 기억이 이 비참한 도마뱀의 몸을 여태껏 쓰러지지 않게끔 해준 유일한 말뚝인 듯싶었다.

    뚝- 뚝- 뚝-

    퀭한 두 눈으로 지독한 산성 독액이 눈물처럼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안구가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흰자위가 더욱 더 탁해지고 있었다.

    [도망쳐… 잭…]

    리자드맨 용사는 공포에 질려 물러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버틴다.

    한편.

    잭 오 랜턴은 유령을 만난 아이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도로시?]

    하지만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없다.

    “…….”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보스 몬스터의 상태창을 열었다.

    <리자드 맨 용사(勇士)> -등급: S / 특성: 용, 하수인, 어둠, 고속재생, 백전노장, 하극상, 맹독, 증폭, 관통, 자기파괴

    -서식지: 죽음길 나락 ‘불가해지대’, 거인국

    -크기: 9m.

    ‘괜찮아, 잭. 내가 너를 찾아갈게. 한여름 밤의 소나기처럼.’

    -용사 도로시-

    용 사냥꾼 도로시.

    그녀는 리자드맨이 되었다.

    죽음룡 오즈의 장난감으로 전락해 버렸다.

    깊게 패인 불가해(不可解)의 골은 이제 영원히 건너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도망쳐… 너라도… 잭… 괜찮아… 나는… 더 싸울 수… 있으니까… 내가… 막아줄…]

    그녀는 아직도 죽음룡 오즈와 맞설 당시의 악몽 속에 갇혀 있는 것일까?

    도로시는 멀어 버린 눈을 들어 계속해서 버티고 또 버틴다.

    잭 오 랜턴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태도로 서 있었다.

    양철 나무꾼, 겁쟁이 사자, 그리고 도로시까지.

    모두가 다 죽음룡 오즈의 유희거리가 되어 버렸다.

    [도로시… 이런 가혹한 환경에 갇혀서…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잭 오 랜턴은 주위에 널브러진 사슬과 수갑들을 바라보았다.

    더불어 흉하게 갈라지고 터진 도로시의 육체 역시도.

    [도로시…]

    잭 오 랜턴은 한동안 더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는 이 모든 운명의 연쇄와 연쇄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해 냈다.

    […오즈! …오즈! …오즈!]

    세 번을 연거푸 외친 잭 오 랜턴의 호박가면 아래에서 섬뜩한 핏빛이 폭사되었다.

    복수자의 영혼이 한층 더 깊은 심연과 마주한다.

    그 옆에 있던 나까지 괜히 움찔할 정도로 사나운 기세였다.

    ‘……하긴, 새로운 동료들과 힘을 합쳐 하는 게 옛 동료들을 죽이는 것이었으니. 기분이 묘하긴 하겠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잭 오 랜턴을 바라보았다.

    원래 NPC들의 사정이야 프로그래밍 된 설정에 불과하다고만 생각했지만, 요즘은 감수성이 예민해져서 그런가 이럴 때마다 괜스레 울컥하게 된다.

    “……으아아, 어진아, 너무 충격적이야. 어떻게 해. 너무 가엾어.”

    [호에에엥-]

    천공섬의 천사소녀 네티 스토리 이후 게임에 깊게 몰입하게 된 윤솔은 벌써부터 울음을 일발 장전하고 있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쥬딜로페 역시 왕방울만 한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이 상황에서 가장 냉철한 이는 역시 원조 고인물인 드레이크였다.

    “자, 다 잡은 거 언제까지 그냥 둘 건가? 빨리빨리 처리하자고. 어서 다음 스테이지로 가야지.”

    이 세계관 최강자 중 하나인 죽음룡 오즈를 겨뤄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희열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어휴, 맨드레이크, 너는 정말 감수성이 부족하구나?”

    “맞아요. 이런 상황에서 지금 보스를 잡는 게 중요해요?”

    나와 윤솔 역시 드레이크를 비난하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플레이어라는 입장 정도는 자각하고 있다.

    사냥을 재개할 준비가 되었다.

    나는 쌍수단도가 된 깎단을 들고 앞으로 뛰어들었다.

    푹! 푸푹!

    피카레스크 마스크를 착용한 나의 기본 공격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는지라 이렇게 가볍게 툭툭 건드려 주기만 해도 상당한 양의 딜을 꽂을 수 있다.

    눈앞에 있는 딜 미터기가 쭉쭉 펌핑되는 것을 보며, 나는 칼질에 박차를 가했다.

    부웅-

    잭 오 랜턴 역시 불카노스 대낫을 들었다.

    그리고 한때 그 누구보다 존경하고 사랑했던 친구이자 스승, 벗, 은인, 여자를 향해 마지막 선고를 내렸다.

    그때.

    [……!]

    잭 오 랜턴은 또다시 대낫을 멈춰야만 했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직전, 도로시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그만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도로시는 이미 오래 전에 시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파르르……

    대낫의 날이 도로시의 살갖에 닿기 직전 멈춘 상태로 가늘게 떨린다.

    “…뭐해, 호박! 빨랑 끝내!”

    나는 꽤나 당황했다. NPC가 이렇게 중요한 순간 트롤링을 하는 걸 처음 봤으니까.

    하지만 잭 오 랜턴은 버그라도 발생한 것처럼 제자리에 굳어 움직이지 않는다.

    이윽고.

    …쾅!

    도로시의 꼬리가 날아 잭 오 랜턴의 몸을 후려쳤다.

    우지지직!

    잭 오 랜턴은 그대로 뒤로 나가 떨어졌다.

    양철 나무꾼의 갑옷이 우그러질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었다.

    [갸아아아악!]

    도로시는 거의 다 빠져버린 손톱과 이빨로 잭 오 랜턴의 위에 올라탔다.

    콰쾅!

    하필 독으로 인해 토양이 많이 부식된 바닥이었고 그 밑에는 도로시가 그동안 갇혀 있었던 ‘징벌방’이 있었다.

    우르릉!

    잭 오 랜턴과 도로시는 마치 함정과도 같은 그 구덩이 안으로 빠져 버렸다.

    꾸구구국…

    바닥에 깔린 잭 오 랜턴은 두 손으로 도로시의 얼굴을 밀어내며 버틴다.

    그때.

    잭 오 랜턴과 도로시의 시선이 다시 한번 마주했다.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었다.

    추하게 일그러진 얼굴, 탁한 눈동자.

    도로시의 퀭한 흰자위에 비친 것은 잭 오 랜턴 본인의 얼굴이었다!

    우르릉…

    진득하게 고여 있는 어둠 속, 심연과 심연은 서로 마주본다.

    또다시 징벌방으로 들어오게 된 도로시의 입이 다시 한번 열렸다.

    […죽.]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였다.

    […죽 …여 …줘.]

    그 말을 듣는 순간, 잭 오 랜턴의 몸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마 그가 울 줄 아는 몸이었다면 울었을 것이다.

    …….

    ….

    .

    [미안해 도로시.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게 해서.]

    잭 오 랜턴은 손을 뻗어 도로시의 얼굴을 만졌다.

    혼자서 얼마나 오랜 세월을 보내온 것일까?

    이 까마득한 깊이의 좁은 무저갱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고독과 굴욕, 처참함으로 보내왔을까?

    자신이 기억을 잃은 상태로 온 세상을 떠돌아다닐 동안 말이다.

    잭 오 랜턴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미안해 도로시. 미안해.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해. 미안해……]

    그때.

    “……!”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징벌방 안의 풍경.

    기묘할 정도로 튼튼한 벽, 사각지대 없이 뻥 뚫린 작은 공간, 숨을 공간이 전혀 보이지 않는 맵.

    머릿속에서 경고가 울린다. 그것도 무척이나 요란하게.

    이 맵은 닳고 닳은 게이머라면 당연히 한 번쯤 의심해 볼 공간이었다.

    “잭! 거기서 나와! 죽는다!”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반 보 정도 늦고 말았다.

    머뭇거리는 잭 오 랜턴, 도로시의 얼굴이 그를 향해 바짝 다가왔다.

    […혼자가 …아니야 …잭. …무서워 …하지 …마.]

    [……!]

    […내가 …너를 …찾아갈게. …한여름 …밤의 …소나기 …처럼.]

    언젠가, 죽음룡 오즈에게서 도망치던 잭 오 랜턴이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이 말이 있었기에 잭 오 랜턴 역시 도망칠 용기를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심장이 없다네 잭. 아픈 걸 느끼지 못하지. 그러니 어서 가게.]

    [포기하는 것도 용기야. 도망쳐, 잭!]

    어디선가 다른 동료들의 목소리도 아스라이 들려온다.

    양철 나무꾼과 겁쟁이 사자의 목소리가 도로시의 목소리와 겹쳐 울렸다.

    활짝-

    말을 마친 도로시는 눈부시게 웃었다.

    잭 오 랜턴의 눈에는 그것이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로 보였다.

    그의 기억 속에 늘 자리 잡고 있었던 도로시의 맑은 얼굴 그대로.

    하지만.

    “야, 임마! 호박머리! 튀라고! 아오 저 트롤 자식! 엔피씨가 트롤링 하는 건 나 또 첨 보네!”

    내 눈에는 그저 만신창이가 된 리자드맨 용사, 오즈를 지키는 중간 보스가 마지막 반격을 준비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드레이크와 윤솔이 잭과 도로시의 해후를 방해하는 나를 흘겨보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냅다 뛰었다.

    파아아아앗!

    도로시의 몸이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다. 증폭 특성이 극한까지 개화되었다는 뜻이다.

    동시에, 놈의 마지막 특성인 ‘자기파괴’가 발동되었다.

    HP가 한계까지 떨어지면 자동으로 발현되는 특성.

    말 그대로 ‘자폭(自爆)’이다.

    차라라락!

    나는 킬 체인 특성을 써 잭 오 랜턴의 몸에 철조망을 휘감았다.

    “오즈 레이드가 코앞이야! 호박머리를 잃으면 안 돼! 당겨!”

    내 오더를 들은 윤솔과 드레이크, 심지어 쥬딜로페까지 나를 도왔다.

    내가 잭 오 랜턴의 허리에 휘감긴 철조망을 당기는 순간……!

    콰-쾅!

    무시무시한 폭발이 일어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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