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죽여줘 (3)
[Immortal]
형용사.
1.죽지 않는, 2.불멸의
* * *
‘임모탈’
불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로 군대, 게임, 음악, 영화, 소설 등에서 무수히 다루어진 소재다.
반대의 뜻을 가진 단어는 ‘mortal’ 이 역시 많은 콘텐츠의 주요 소재로 쓰이는, 다소 흔한 클리셰.
나는 이 두 단어가 가진 힘이 게임 내 세계관에 다소 특별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임모탈’은 불멸을 뜻하지. 그것을 거꾸로 하면 ‘탈모임’! 뜻 역시 뒤집혀서 ‘필멸의’라는 뜻을 지니게 된다! 결국 ‘탈모’는 ‘필멸’을 뜻한다고 볼 수 있지. 말하자면 ‘초월번역’이라는 것이다!”
나의 논리정연함 앞에 윤솔과 드레이크는 무릎을 탁 친다.
“???”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뭐, 상관없다. 어차피 내 친구들은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역시, 탈모의 슬픔은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지.’
회귀 전 35살까지 살아 본 내가 아닌가. 나는 이미 한번 아픔을 알고 있는 몸이다.
“음,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직접 겪어 보는 게 빠를 거야.”
“뭐를?”
“탈모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상태이상’인지 말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윤솔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뿌-]
품속에 있던 쥬딜로페가 망토의 갈기털을 헤치고 나왔다.
녀석은 양 쪽 허리에 끼고 있던 두 개의 구슬을 하나로 합쳤다.
-<임모탈(immortal)> / 재료 / ?
맨들맨들한 그 모습은 ‘불멸(不滅)’ 그 자체를 상징한다.
-<거꾸로 정수> / 재료 / D
거꾸로 뒤집는 힘이 담긴 구슬이다. 다양한 곳에 응용된다.
두 개의 구슬에서 나오는 힘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현실에서도 두 개의 구슬이 만들어내는 힘(호르몬) 때문에 결국 탈모가 오지 않는가?
그런 걸 보면 이 게임이 은근히 현실고증이 잘 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띠링!
<아이템 융합이 완료 되었습니다>
이내, 쥬딜로페의 손에 들린 두 개의 구슬이 하나의 완전한 아이템이 되었다.
-<탈모임> / 재료 / ?
맨들맨들한 그 모습은 ‘필멸(必滅)’ 그 자체를 상징한다.
임모탈이 거꾸로 변해서 만들어진 아이템 탈모임.
그것이 곧 필멸 그 자체를 상징한다는 것을 그 누가 부정할 것이냐!
아이템 이름이 좀 이상한 것 같지만 사실 ‘깻잎무침 망토’나 ‘김치 싸대기’ 같은 이름의 아이템도 실존하는 마당에 번역이 좀 잘못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실례로 바스타드 소드(Bastard sword)를 ‘서자검’으로 번역하거나 양손대검(two-handed greatsword)을 ‘손잡이가 두 개인 위대한 칼’로 번역하는 등 이상한 번역의 사례는 많다)
나는 새롭게 만들어진 구슬을 손에 들었다.
‘탈모 걱정이 있는 자라면 이 모든 상황을 너그럽게 이해할 것이요, 그렇지 않은 자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사실 이해받고 싶지도 않다!’
내가 막 탈모 구슬을 손에 쥐는 순간.
[갸아아아아악!]
리자드맨 리자드맨 용사가 승부를 걸어왔다!
놈은 ‘증폭’ 특성과 ‘맹독’ 특성을 동시에 발현했다.
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
전신에서 시커먼 증기가 끓듯 피어오른다.
놈의 편도선이 엄청나게 부어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입에서 시커먼 독액의 소용돌이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콰…!
강력한 산성 파도가 초광역지대를 휩쓸어 간다.
‘관통’ 특성이 붙어 있는 공격이다 보니 은엄폐를 한다고 해도 독 기운이 지면을 투과해 덮쳐오는 것을 막기는 힘들 것이다.
“모두 피해!”
나는 밀려오는 시커먼 파도를 앞둔 채 외쳤다.
잭 오 랜턴이 불카노스 대낫을 들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다.
[일단 내가 막아 보겠다. 하지만 1분 이상은 장담 못 해.]
그 정도면 충분하다.
와작!
나는 잭 오 랜턴의 뒤에 섰고 이내 장렬한 모습으로 손에 든 탈모 구슬을 깨트렸다.
파-앗!
그러자 내 손에서 엄청난 기운이 폭사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필멸로 이끄는 검은 기운.
바로 탈모의 기운이!
“자라나라 머리머리!”
나는 두 손의 엄지와 검지를 쫙 뻗은 채 총 모양을 만들어 리자드맨 용사를 향해 발사했다.
탈모빔!
내 양손 검지에서 뿜어져 나간 광선(光線)은 독액의 파도를 뚫고 들어가 정확히 리자드맨 용사의 심장을 관통했다.
[갸아아아아악!]
리자드맨 용사는 독액 분사를 멈추고는 제자리에 서서 비틀거린다.
우리는 휘몰아치는 독기의 폭풍에서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 어진아! 까아악! 내 머리가!”
“어, 어, 어진! 이게 어찌 된 건가!?”
내 뒤에 가까이 있었던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도 나의 공격에 휘말려 버린 모양이다.
윤솔은 평소에 꿉꿉한 냄새가 난다며 싫어하던 샌드웜의 망토로 머리를 감싼 채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탈모빔을 빗겨 맞아서 그런가 옆머리와 뒷머리는 남아있는 것 같은데…
참고로 탈모빔을 직격으로 맞은 드레이크는 그대로 훌렁 맨대머리가 되어 버린 채였다.
‘……이러면 드레이크가 아니라 맨드레이크라고 불러야 하나? 솔이는 맨솔?’
내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맨솔과 맨드레이크가 다급하게 외친다.
“이, 이거 언제까지 이렇게 되는 건가? 현실에도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겠지?”
“엄청 당황했나 보네. 진정해. 당연히 현실 하고는 상관이 없어.”
“하지만 어진아! 이거 힐 마법으로도 치료가 안 되는데!?”
“원래 현실에서도 탈모는 보험이 안 되지. 비슷한 거야. 신성력으로도 치료 못 해.”
나는 맨드레이크와 맨솔의 질문에 차근차근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진정해. 원래대로 되돌아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뭐, 뭔데?”
상태이상 ‘탈모’는 꽤나 골치 아픈 디버프이다.
딱히 육체의 스탯이 하락하는 것은 아니지만 외형적으로 보기 싫게 되기 때문이다.
강력한 신성력을 지닌 신관들도 해제할 수 없는 강력한 저주.
거기에 도박을 할 때 자신의 패가 머리에 비쳐 보일 수 있다는 점, 남들에게 구운 계란 등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점, 해수욕장에 갔을 때 반사광 때문에 항의가 들어온다는 점, 투구를 쓸 때 금속의 차가운 냉기를 두피로 직접 느껴야 한다는 점 등의 치명적인 단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상태이상에서 벗어나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너희들은 탈모빔에 맞았어. 30초 안에 ‘자라나라 머리머리’를 5번 외치지 않으면 너희들의 캐릭터는 평생 그 커스터마이징을 유지하게 되는 저주에 걸……”
“자라나라머리머리자라나라머리머리자라나라머리머리자라나라머리머리자라나라머리머리!”
숨도 쉬지 않고 재빨리 외치는 윤솔과 드레이크였다.
이윽고, 윤솔과 드레이크의 머리가 다시 풍성하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을 할 수 없는 몬스터는 예외였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탈모빔에 정통으로 맞은 리자드맨 리자드맨 용사의 몸에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
놈은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리자드맨 용사의 몸을 휘감고 있던 견고한 비늘.
드레이크의 화살 난사에도 옅은 흠집이 나는 것이 고작이던 그것들이 썩은 무 뽑히든 쑥쑥 뽑혀 나오고 있었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저지대의 싱크홀, 독액이 빠져나가는 수챗구멍으로 흘러내려 가 가득 쌓이는 비늘들.
리자드맨 용사는 두 손으로 땅을 허우적거리듯 하며 비늘들을 건져내 다시 자신의 몸에 붙여 보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이미 빠져나간 비늘들이 다시 붙는 일은 없다.
“그렇게 있을 때 잘하지 그랬어.”
나는 리자드맨 용사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적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다. 15년 뒤의 나에게 하는 진심 어린 조언이기도 했다.
소중한 것은 무릇 곁에 붙어 있을 때 잘해 주어야 한다.
떠나고 나서 그 빈자리를 느낀다고 해도 이미 때는 늦었기 때문이다.
사람도… 모발도…
“뭐 아무튼. 이제부터 본격적인 레이드 개시다!”
나는 대부분의 비늘이 벗겨져 맨몸뚱이가 된 리자드맨 용사를 향해 돌격했다.
퍼펑! 펑!
그동안 막히거나 튕겨나갔던 데미지들이 쏙쏙 틀어박힌다.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던 비늘이 없어지자 리자드맨 용사는 마치 커다란 닭처럼 보였다.
윤솔이 신성불가침 특성으로 놈의 발목을 잡는 동안 드레이크가 배드엔딩의 몸을 깎아 만든 커다란 화살을 쏴 관절 부위를 요격했다.
그리고 잭 오 랜턴이 불카노스 대낫을 들고 최후의 승부수를 띄웠다.
[나는 너를 넘어 오즈에게로 간다.]
복수자가 낫을 들었다.
부웅-
육중한 대낫이 리자드맨 용사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스팟!
하지만 리자드맨 용사는 그 와중에 어마어마한 반사신경으로 사형선고를 피해 간다.
비록 얼굴에 긴 흉터가 생겼지만 말이다.
푸확! 푸시시시식…
지독한 산성을 띤 독액과 피가 사방팔방으로 튀어 흙과 바위를 녹인다.
[갸아아아아악!]
리자드맨 용사가 괴성을 질렀다.
살점이 갈라지고 그 안의 뼈가 훤히 드러났다.
고속재생 특성으로도 쉽게 복구할 수 없는 큰 상처였다.
[끄르륵… 끄륵…]
리자드맨 용사는 비틀거리는 모양새로 뒤로 물러났다.
전신에는 드레이크가 날려 보낸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혔고 윤솔의 디버프로 인해 운신도 자유롭지 못하다.
거기에 내가 지금까지 쌓아 놓은 도트 데미지 스택까지 겹쳐져 놈은 만신창이 신세였다.
거기에 이제 목숨추수자 잭 오 랜턴이 마지막 일격을 준비한다.
끼이익…
대낫이 진자처럼 흔들리며 리자드맨 용사의 얼굴에 겨누어졌다.
“끝장내! 지금이다!”
나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 소리쳤다.
그때.
리자드맨 용사가 너덜너덜해진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하, 하지 마. 싫어…]
놈은 썩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쉭쉭대며 띄엄띄엄 말했다.
[아, 아, 아파. 무서워… 싸움…]
이 몬스터가 말을 할 줄 안다는 사실에 다들 놀랐다.
윤솔도 드레이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리자드맨은 원래 인간이었다는 설정이었죠?”
“음, 용의 힘을 받아 뒤틀린 모습을 갖게 된 인간이 바로 리자드맨이지.”
리자드맨 플레이어들이나 대격변 이전에 존재하던 리자드맨 몬스터들 역시 같은 설정이다.
용의 힘에 의해 타락, 진화, 변태한 인간이 리자드맨이라는 것은 모든 유저들이 다 아는 사실이니까.
그러니 지금 리자드맨 리자드맨 용사가 사람의 말을 어느 정도 할 줄 안다는 것이 그리 특별하게 놀랍지는 않았다.
……뭐, 애초에 언어능력이 제대로 갖춰져 있는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뚝…!
순간, 잭 오 랜턴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
호박 머리 안의 촛불이 파르르 떨린다.
그것은 리자드맨 용사가 힘겹게 내뱉은 마지막 한 마디 때문이었다.
[도망쳐… 잭…]
리자드맨 용사는 허물어져 가는 몸을 겨우겨우 곧추세운 채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공포에 짓눌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쓰러지지는 않겠다는 의지.
무엇을 위해 일어나 버티는 것일까?
저 멀어 버린 눈으로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는 이 혼돈의 소용돌이 중심.
복수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눈앞의 만신창이가 된 적을 향해 작게 묻는 것뿐이었다.
[……도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