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71화 (371/1,000)
  • 372화 풀강! (2)

    ‘세간의 관심을 끄는 데 효과적이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끔찍해서 허구로 다루기에도 적절하지 않은 주제가 있다. 이런 주제는 독자를 불쾌하고 역겹게 할 작정이 아니라면 피해야 한다.’

    -‘에드가 엘런 포(Edgar Allan Poe) 『생매장』 中’-

    *       *       *

    아이템이 강화 도중 파괴되었다.

    단언컨대 세상에 이런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헤비 게이머들이라면 누구나 이를 꽉 깨물고 공감할 만한 상황이었다.

    부들부들부들부들……

    가슴이 먹먹하고 손발이 덜덜 떨려온다.

    전신에서 축축함이 느껴지는 것이 아마 게임 세계 바깥, 캡슐 속에 있는 내 몸이 식은땀 투성이가 된 모양이다.

    그토록 아늑하던 캡슐 속이 마치 무덤 속 관 안에 들어온 느낌.

    축축한 무덤냄새와 벌레들의 파고듦, 전신을 구속하며 짓누르는 흙의 무게.

    나는 마치 생매장 된 듯한 공포와 충격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너, 너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경악한 표정으로 쥬딜로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누군가 아주 가볍게 톡 건드리기만 해도 나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쥬딜로페는 그저 빵싯빵싯 웃으며 나를 향해 큰 눈을 끔뻑거릴 뿐.

    [호애앵!]

    그녀는 칭찬을 바라는 세 살 바기 아이처럼 나를 향해 조막만한 손바닥을 활짝 펼쳐 보였다.

    저 자신만만한 제스처라니. …지금 뭐 하자는 걸까? 하이파이브?

    “…….”

    내가 멍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쥬딜로페의 손바닥에 툭 부딪치자.

    -띠링!

    <여왕이 새로운 취미를 찾았습니다>

    <멸족의 설움이 상당히 옅어집니다>

    <여왕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쥬딜로페의 호감도가 엄청나게 올랐다. 여지껏 볼 수 없었던 큰 폭의 상승이었다.

    “…아무래도 강화 놀이가 마음에 들었나 보군.”

    옆에 있던 드레이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깎단을 잃은 대신 쥬딜로페의 호감도가 크게 올랐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도 처참하기만 했다.

    …엄청나게 손해 보는 장사다.

    “아아아아아….”

    나는 비통한 절규와 함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깎단은 나의 최고 애병이었다. 고인물을 상징하던, 아니 그 자체이던 성명절기란 말이다.

    그것이 없다면 고인물도 없다. 깎단이 없는 세상에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머릿속에는 오래 전 과거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과거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려 아이템을 산 뒤 몬스터를 잡고 얻는 부산물 아이템들을 팔아 이자를 메꾸던 시절,

    그리고 인생 역전 한 방을 위해 전 재산을 털어 산 아이템을 강화대에 올려놓던 그 순간.

    ‘…하느님, 예수님, 부처님, 옥황상제님, 오딘님, 알라님, 마호메트님, 제우스님, 오벨리스크님, 조로아스터님, 마리아님, 봉인된 엑조디아의 왼팔, 오른팔,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님! 제발 나에게 힘을!’

    온갖 신들에게 기도하며 아이템에 강화를 지르던 그날, 손끝으로 느껴지는 강화 성공의 감촉.

    +1강, +2강, +3강, +4강, +5강 풀 스트레이트.

    그리고 그 후로 이어지는 혼신의 진검승부 레이스.

    +6강, 원금 회수가 가능했던 수준.

    +7강, 새 인생 출발을 알리던 신호탄.

    +8강, 작은 집 한 채는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경지.

    그리고 +9강에서의 실패. 모든 것을 손에 넣기 직전 물거품처럼 사라진 성공.

    망생(亡生)의 기억이 또렷하게 재현된다.

    ……마치 PTSD처럼.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만 한 순간의 부주의로 인해 내 삶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뭐 내 자의로 벌인 일은 아니라지만 내가 데리고 다니던 쥬딜로페가 저지른 일이니 곧 나의 책임이기도 하다.

    누굴 원망하겠는가?

    이 아무것도 모르는 작은 어린아이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과거와 현실에 연달아 폭행당한 나는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이제 고인물 메타는 버려야 하나?’

    다시 게임 초반으로 되돌아온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지금껏 나를 특별하게 해 주던 파트너를 잃었다.

    이렇게 되면 능력이 사라져 버린 히어로나 다름없는 일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마, 어진아.”

    “우리가 있지 않나.”

    내 어깨를 잡아 일으키는 두 개의 손이 있었다.

    윤솔과 드레이크. 내 친구들이 뒤에서 나를 믿어 주고 있다.

    “핵심 아이템이 사라진 건 너무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힘을 합쳐서 잘해 왔잖아.”

    “그 말이 옳다 어진. 지금까지는 받기만 했으니 이제는 우리가 줄 차례다.”

    그렇다.

    나는 모든 걸 잃어버린 게 아니다.

    든든한 친구들이 나를 받쳐주고 있다.

    이 신뢰감이야말로 지금껏 내가 얻어온 최고의 보물이 아니겠나.

    수많은 소년만화, 모험만화에서 ‘최고의 보물은 바로 동료와의 우정이었다!’라는 클리셰를 추구하는 이유가 있다.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감성이었지만 막상 내가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니 이만큼 든든할 수가 없었다. 절로 눈물이 날 지경.

    ‘……그래. 아직 마동왕 메타도 남아 있으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물이 반 밖에 남지 않은 게 아니라 물이 반이나 남은 것이다.

    깎단이 고작 이런 곳에서 파괴된 것이 아니라 깎단이 있었기에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깎단의 부재로 인해 가지 못하게 된 곳보다 여지껏 깎단이 있었기에 올 수 있었던 곳을 떠올린다면 그나마 조금 낫다.

    나는 앞으로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기로 했다.

    조금 먼 길을 돌아가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죽을 것은 없었다.

    나는 아직 다른 이들보다 한참을 앞서고 있는데다가 이렇게 든든한 친구들까지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도 죽음룡 오즈 레이드는 한참 뒤로 미뤄야겠군.’

    내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호우-우!]

    쥬딜로페가 솥 안을 다시 들여다본다.

    불카노스 융해액은 이미 차갑게 식어 버렸으니 새삼 위험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위험하기에 나는 쥬딜로페를 안아들었다.

    “에휴, 어쩌겠니. 애라서 뭐라고 할 수도 없고.”

    혹시나 아이템이 멀쩡할까 해서 가 보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10강이 된다는 것은 평생에 한번 일어날 일도 없는 기적, 괜히 기대해 봤자 내 마음만 더 아플 뿐이다.

    ‘그래도! 그래도 Hoxy!?’

    혹시라는 게 있다.

    나는 쥬딜로페를 솥에서 내려주며 그 안을 슬쩍 흘겨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기적 따위는 없었다.

    솥 안으로 고개를 들자 ‘파괴된’ 깎단의 모습이 보인다.

    깎아내는 단말마(였던 것).

    그것의 잔해가 흉한 모습으로 용광로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따흐흑!”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그 처참한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하자 새삼 울음이 왈칵 치밀어 오른다.

    깎단은 분명 파괴불가의 아이템이지만 그것은 전투를 벌일 때나 통하는 특성, 강화를 할 때에는 분명 이야기가 다르다.

    나는 솥 한 구석에 차갑게 식어 굳은 불카노스 융해액과 그 위를 둥글어 다니는 깎단을 보며 울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조디악 손에 들어가게 둘걸. 괜히 내가 너를 주워서 너를 불행하게 했구나.”

    나는 깎단에게 사과하며 울었다.

    그렇게 아끼던 애병이 저 밑에 두 조각으로 쪼개져 있는 것을 보면 이런 통곡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윤솔이 없었더라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꿀꿀멍멍 하고 울부짖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뿌우.]

    쥬딜로페는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듯했다.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지은 채 한쪽 손의 엄지를 빨며 다른 쪽 손으로 내 옷깃을 잡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내 울음은 멈추지 않는다.

    “……흑흑흑. 우리는 잘 맞는 콤비였어. 너와 함께라서 멋진 인생이었다. 다음 생에서는 풀강 아이템으로 태어나렴. 기억할게!”

    내 머릿속에 깎단의 살아생전 늠름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무리 큰 대형 몬스터의 공격에도 부서지지 않고 척척 맞서 오던 나의 파트너.

    ‘나…. 그때 너 깡딜 안 나오기 시작할 때……. 살짝 미웠다?’

    ‘처음엔 밤이고 낮이고……날에 붙은 핏자국들 다 닦아 줬는데……사람 맘이란 게 그렇더라…… 영원할 수는 없는 거야……그래서 내가 벌 받은 거겠지? ……그치 깎단아?’

    ‘깎단아……흡……. 왜 아무 말 안 해! 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의 첫 S급 무기.

    이제는 떠나 보내줘야 할.

    최소 3일간은 깎단의 잔해 앞에서 상을 치른 뒤 좋은 함에 담아 옮겨서 튜토리얼의 탑이 있던 곳에 뿌려 주리라.

    우리가 맨 처음으로 함께했던 바로 그곳으로. 그 후에는 49일간 완연한 헤어짐의 자숙시간을 갖으며…….

    ‘……잘 가렴. 좋은 곳으로.’

    토닥토닥-

    조용히 흐느끼고 있는 나를 드레이크가 다독여 주고 있었다.

    “진정해라 어진. 이 정도면 호상이다.”

    “…흑흑흑흑.”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라는 속담도 있지 않나. 파괴된 아이템 잔해 앞에서 통곡해도 남는 것은 없다.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깎단도 그것을 바랄 것…….”

    바로 그때.

    “어진아.”

    “어!? 깎단이니?”

    “……아니, 나 솔이.”

    나와 드레이크의 뒤에 서 있던 윤솔이 눈을 가늘게 뜨며 다가왔다.

    눈썰미 좋은 그녀는 내 옆으로 다가와 차갑게 식어 버린 용광로 아래로 고개를 길게 뺐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어진아, 내가 게임을 잘 몰라서 묻는 건데. …저거 진짜 파괴된 거 맞아?”

    나는 지독한 슬픔과 상실감에 잠겨 그녀를 쳐다볼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대답했다.

    “누가 봐도 깨졌는데 뭘. 두 조각 났잖아. 절단 났다고. 지금 내 마음처럼. 흑흑흑…….”

    용광로 저 아래 떨어진 깎단은 말 그대로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세로로 길게 갈라진 듯, 깔끔하게 쪼개진 두 개의 길쭉한 파편이 서로 다른 곳에 흩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흐음.”

    한참 동안이나 용광로 아래, 작게 보이는 두 파편을 바라보던 윤솔은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진아, 잘 봐. 저거… 파괴된 게 아니라…….”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굵은 쇠사슬에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용광로.

    그 차갑게 식어 버린 솥 바닥에 세로로 쪼개져 있는 깎단이 보인다.

    “……?”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용광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분명 깎단은 파괴되었다. 그 증거로 내 눈 앞에 저렇게 두 조각으로 절단 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어?”

    상황을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본 결과, 나는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용광로 속에서 환한 빛을 내뿜고 있던 불카노스 융해액이 천천히 식어 감에 따라 빛을 잃는다.

    솥 안은 서서히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반짝- 반짝-

    두 조각으로 쪼개진 깎단의 파편에서 나오는 빛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저것은 새로운 아이템의 등장을 알리는 빛.

    그것도 양손 무기 특유의 붉은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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