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사도세자(思悼世子) (2)
츠츠츠츠츠…
히드라.
독 저항력이 어마어마한 뱀.
반지에서 튀어나온 히드라는 바실리스크에 뒤지지 않는 거대한 몸집으로 내 앞을 지키듯 섰다.
한때 메두사를 지키던 호위병 뱀, 하지만 지금은 나의 충실한 펫이다.
히드라의 입장에서는 옛 주인의 아들과 대치하게 되었으니 꽤나 기묘한 상황일 수 있겠다.
“…네가 끝내는 것이 그나마 도리에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히드라의 여덟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쉬이이익!]
내 말을 들은 히드라는 바실리스크를 향해 거침없이 기어갔다.
거대한 뱀과 거대한 뱀이 서로를 마주본다.
뱀과 뱀의 대치!
둘 다 육중한 몸을 가졌고 땅을 기어 다니며 엄청난 맹독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그-오오오오!]
바실리스크가 독을 뿜어내며 포효했다.
위험 등급은 바실리스크가 훨씬 높았지만 이미 놈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
[쉬이이익!]
히드라는 바실리스크가 뿜어낸 독을 그냥 맨몸뚱이로 씹어 버렸다.
애초에 히드라로 진화하기 전 단계일 때도 바실리스크의 독액에 큰 데미지를 입지 않았었던 몸이다.
지금은 두 단계나 진화했으니 독 방어력이 더 상승한 것은 당연하다.
‘…좋아, 상성 상 유리하군.’
나는 히드라를 향해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콰악!
히드라는 내 신뢰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여덟 개의 머리로 바실리스크를 붙잡았다.
그리고 이내 꼬리를 들어 바실리스크의 굵은 몸뚱이를 휘감고 머리 쪽으로 가져간다.
한편.
그 모습을 본 윤솔과 드레이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엇? 왜 머리로 공격하지 않고 꼬리로?”
“…뭘 하려는 거지?”
하지만 나는 히드라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안다.
히드라는 지금 바실리스크를 ‘한 입에’ 삼켜 버리려 하고 있었다!
쩌어어어억…!
이윽고, 히드라의 아홉 번째 머리가 드러났다.
그것은 바로 꼬리 끝에 있었던 것이다!
밋밋한 꼬리에 금이 가더니 이내 그것이 입이 되어 크게 벌어졌다.
그 안에서는 선홍빛 잇몸과 칼날 같은 이빨들이 드러난다.
겉으로 드러난 여덟 개의 머리와 달리 아홉 번째 머리는 눈이 없었고 크기 또한 다른 머리들보다 훨씬 더 컸다.
콰직-!
히드라는 그대로 바실리스크의 전신을 물었고 이내 꿀떡꿀떡 목으로 넘겨 삼켜 버렸다.
[오…오오오오!]
바실리스크는 두 개의 굵은 팔로 히드라의 아홉 번째 머리를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깎단에 찔린 이상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결국 바실리스크는 두 팔에 힘을 잃고 축 늘어졌고 그대로 히드라의 뱃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츠츠츠츠츠…
히드라는 바실리스크를 삼켜 버리고 난 뒤 기분 좋은 포만감에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색색-소리를 냈다.
“잘 했다. 이제 소화될 때까지 편히 쉬렴.”
나는 히드라의 아홉 번째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기보다 등급이 높은데다가 덩치도 큰 먹잇감을 통째로 삼켰으니 아마 소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퍼펑!
나는 반지를 문질러 히드라를 다시 반지 속으로 불러들였다.
그제야 드레이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이제 중간 보스도 잡았으니 아이템을 수거하는 일만 남았군. 쭉쭉 내려가면 되는 건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나는 드레이크의 어깨를 짚고 반대편을 가리켰다.
꼴꼴꼴꼴…
박살 난 채 깨어진 뒤주, 그 속에서는 오염된 혈액이 줄줄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
…덜컹!
아래로 내려가는 지하계단 곳곳에 시커먼 뒤주들이 줄줄이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언뜻 봐도 열 두어 서너개가 넘어가는 수의 뒤주들.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그것들은 어둠 속 깊이 파묻힌 채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우리의 등장을 반기는 것처럼.
“…….”
드레이크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린다.
나는 한마디 해 주었다.
“바실리스크는 여기서 일반 몹 취급이야.”
* * *
[꺼윽~]
히드라가 빵빵해진 배를 위로하고 발랑 드러누웠다.
[꺄르륵-]
쥬딜로페가 히드라의 산만 한 배 위를 산만하게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배 많이 부르냐?”
[파오- 쒸이익- 쿰척쿰척-]
“더 이상은 안 들어간다는 표정이네. 고생했다.”
나는 히드라의 배가 원래의 수십 배 이상 부풀어 오른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퍼펑!
마지막 바실리스크까지 모두 집어삼키고 난 뒤, 히드라는 다시 내 반지 안으로 되돌아왔다.
필드에는 박살 난 뒤주들의 파편과 대량의 오염된 혈액, 그리고 바실리스크‘들’이 떨군 아이템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드랍 아이템 등급 보정은 받지 못했기에 노획물들의 등급은 B+등급에서 A+등급까지 제각각이다.
대부분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지만 윤솔이 새로 얻은 바실리스크의 ‘맹독’ 특성만은 꽤 유의미한 수확이었다.
그 외 얻은 수확이라면 윤솔과 드레이크가 각각 1레벨씩 올랐다는 것 정도?
“그럼 계속 갑시다. 빠르게 고고고.”
“넹. 빨리빨리, 스겜!”
“…역시 한국인들이군.”
[활기찬 인간들이야. 마음에 든다.]
나, 윤솔, 드레이크, 잭 오 랜턴은 지하 2층의 심층부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벌써 꽤 많은 시간을 내려왔지만 아직도 던전의 반을 채 지나지 못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계단은 심연 깊숙한 곳으로 끝없이 끝없이 이어진다.
너무나도 넓고 광대해서 정말 내려가고 있는 것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
“…마치 거대한 달팽이 껍질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야.”
윤솔은 단단한 암벽을 짚고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바로 그때.
계단이 끝나는 부분이 나타났다.
더 이상 내려가는 길은 없었고 마치 이 구멍의 최저점이 아닐까 하고 생각될 만큼 넓은 ‘바닥’이 나타났다.
검붉은 평지가 어둠 저 멀리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물론. 나는 이곳이 이 던전의 끝이 아님을 안다.
우리는 총 4층짜리 던전의 절반, 이제 막 2층의 끝자락에 당도했을 뿐이다.
윤솔과 드레이크는 발로 바닥을 콩콩 구르며 중얼거렸다.
“와…. 이 던전이 4층이라는 걸 몰랐으면 여기가 끝인 줄 알았겠다.”
“흠. 그러면 지하 3층으로 내려가는 통로는 어디에 있지?”
나는 친구들의 의문을 풀어 주기 위해 손가락을 들었다.
“…저기를 봐.”
시커먼 어둠 속, 붉은 빛이 아스라하게 번지는 구역이 있었다.
윤솔과, 드레이크, 잭 오 랜턴은 나를 따라 밝은 구역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이윽고, 빛이 번지는 부분에 도착하자 그제야 지형이 조금 제대로 보인다.
“……!”
나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이 놀라 멈춰 섰다.
그곳에는 위에서 봤던 바와 같이 커다란 용광로가 존재했던 것이다!
‘오즈의 2번 용광로’
저 위층에서 리자드맨들이 불카노스 원석을 던져 넣던 3번 용광로와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내 친구들을 놀라게 한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땅! 따-앙! 깡! 드르륵…
끌차와 곡괭이, 망치와 대못을 들고 용광로 밑에서 작업을 하는 인부들.
그 폭염의 중노동 속에 시달리는 일꾼들은 리자드맨들이 아니었다.
그 일꾼들의 모습은 우리가 너무나도 익숙하게 보던 그 얼굴들이다!
‘잭 오 랜턴’
호박 가면을 뒤집어쓴 허수아비들이 용광로 밑에서 어마어마한 강도의 노역을 하고 있었다!
땅! 따앙! 땅!
허수아비 하나가 망치를 들고 벽에 커다란 못을 박아 넣는다.
꾸르륵…! 꾸르르륵…!
다른 허수아비는 천장의 구멍에서 떨어지는 불카노스 융해액들을 받아 거른 뒤 정수만 모아서 제련을 위한 거푸집으로 옮긴다.
펑-!
가끔 불카노스 융해액이 몸에 튀면 지푸라기가 타들어 가며 불이 일어난다.
끌차를 몰던 허수아비 몇 구가 그렇게 불타 버린다.
지글지글지글지글……
그들은 재로 변해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기 직전까지 끌차를 밀고 당기며 거푸집으로 향한다.
따앙! 따앙! 따앙! …딱!
한 허수아비가 벽에 대고 망치질을 한다.
한참 동안이나 기계적으로 망치질을 한 끝에, 마지막 망치가 헛돌아 벽을 때린다.
그러자 망치질을 하던 허수아비는 잠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너무 혹사한 탓일까? 팔의 짚단이 뜯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이 고장 난 팔로는 더 이상의 강도 높은 노동이 불가능하다.
너덜너덜해진 지푸라기 팔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허수아비는 체념한 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저 축대 위에 자리 잡은 용광로의 아궁이 밑으로 기어들어가 땔감이 되기를 자처한다.
파르륵…!
허수아비는 너무나도 순식간에 불타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폐기처분 예정인 수많은 허수아비,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진 노동자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없이 기계적으로 일하는 허수아비들.
사고가 나도 자신에게 주어진 불행을 무력하게 곱씹으며 소멸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그 와중에 몸을 다쳐 쓸모없어진 인형은 가차 없이 아궁이 속으로 폐기처분 행이다.
수없이 많은 허수아비들이 그렇게 용광로와 거푸집을 오가고 있었다.
노동력을 상실한 개체는 가차 없이 장작이 되어 한 줌 재로 변해버린다.
그리고.
작업장 중앙에 이 모든 일련의 작업들을 감독하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흑-흑흑흑……. 더 열심히 일해라, 이 쓸모없는 것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일해!]
시커먼 옷을 입고 있는 마녀(魔女).
창백한 얼굴에는 시뻘건 두 눈알과 동그란 입 하나만이 달렸고 훤히 드러난 구강 안으로는 뾰족뾰족한 기형치들이 둥글게 돋아나 있는 게 보인다.
꼬챙이처럼 긴 팔과 다리는 기괴할 정도로 흉물스럽게 꺾여 있었고 피부 역시 썩어 가는 것처럼 여기저기 짓물러 푸르딩딩했다.
넓은 챙이 달린 시커먼 모자와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한 검은 드레스를 걸치고 있어 한 눈에 보기에도 제정신인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그 외에, 지독한 악취가 작업장의 후끈한 대기와 뒤섞여 코를 찌르고 있었다.
[흑흑흑흑흑…….]
마녀는 시뻘건 두 눈을 감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두 눈의 눈꺼풀이 도려내어져 눈을 감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코와 귀는 잘려나갔는지 없었고 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동그란 입 안에서는 연신 뾰족한 이빨들이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종유석 뒤에 숨은 채 끙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벤시(banshee)라. 기분 나쁜 S급 몬스터지. 저 여자를 알아?”
내 질문을 들은 윤솔과 드레이크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한 존재만은 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다.
[……저 그리운 얼굴을 어찌 잊겠나.]
잭 오 랜턴. 그는 저 멀리 작업장 중앙에 있는 ‘우는 마녀’를 향해 끓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의 어머니라네!]
그동안 억누르고 억눌렸던 증오가 더 이상 감춰지지 않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