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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359화 (359/1,000)
  • 360화 공포의 신생구단 (1)

    -띠링!

    [로그아웃 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와 주세요.]

    .

    .

    나는 게임 접속을 해제했다.

    요 몇 주일 간은 꽤 힘들었다.

    현실보다 게임 속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을 정도로 빡센 강행군이었다.

    “…윽, 운동 안 해서 근육 다 빠진 것 좀 봐. 근손실 이거 어쩔 거야?”

    나는 팔을 뻗다가 미묘하게 앙상해진 팔뚝을 보며 자책했다.

    업무용 폰 외에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핸드폰을 슬쩍 들여다보자…….

    -<헬스 트레이너 김철현 님>

    -부재중 통화 926-

    “히익.”

    개인 PT 트레이너가 남긴 무수한 연락들.

    나는 앞으로 펼쳐질 끔찍한 운동지옥을 예상하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때.

    위이이잉…

    업무용 핸드폰이 울린다.

    고인물 전용 전화번호였다.

    화면에는 익숙한 전화번호가 떠 있었다.

    국내 정상 급 걸그룹 ‘니아’의 리더 박보연.

    그녀는 종종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이렇게 전화를 걸어온다.

    “…어, 왜?”

    내가 전화를 받자 핸드폰 너머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부! 요즘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게임 하느라.”

    내 대답을 들은 박보연은 픽 웃었다.

    […으휴, 그럴 줄 알았어요. 하긴 사부가 게임 아니면 달리 뭐가 있겠어? 안부나 여쭈려고 전화했습니다! 혹시 죽지는 않았나 해서.]

    어딘가 묘하게 안심한 듯한 말투였다.

    박보연은 이내 적극적으로 쾌활하게 대화를 이어 나간다.

    [아 맞다 사부, 이번에 리자드맨들이랑 오크들 우르르 죽인 빌런 때문에 시끄럽던데. 벌써 들으셨겠죠?]

    나는 잠시 뜨끔했다. 설마 박보연에게서 이 말을 전해 듣게 될 줄이야.

    ‘이슈이긴 이슈였나 보네.’

    차마 그 빌런이 나라고는 말 못하겠다.

    나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어 들었어. 엄청나더라.”

    [거의 막 10만 명인가 죽었다는데요? 그 하나한테? 와 진짜 역대급 또라이 아님?]

    “…10만? 그렇게 많이는 아닐걸?”

    [아무튼 또라이죠! 그래도 그 덕에 인간 진영 종족 킬 수는 올라가서 좋네요. 그 빌런 의외로 인간 종족인 것 같던데.]

    박보연 역시도 대격변 이후 인간 종족으로 남은 얼마 안 되는 유저 중 하나다.

    그녀의 전화기 너머로 다른 멤버들의 다툼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더러운 도마뱀아 내 파우치에서 손 떼!]

    [흥! 근육덩이 오크 주제에 무슨 화장이야! 이건 내가 가진다!]

    [너네들은 오즈랑 마몬한테 뷰티 버프 걸어달라고 하렴. 요 크림은 뒷배 없어 서러운 내가 쓰지!]

    배수지와 윤두나, 박소담이 서로 티격태격하는 것이 여기까지 들린다.

    나는 그 대화를 듣고 그만 웃어 버렸다.

    박보연도 멤버들의 불화(?)가 민망한 듯 배시시 웃는다.

    그녀는 묻지도 않은 자신과 니아 멤버들의 근황을 조잘조잘 전해왔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수지는 첫 정산 받은 걸로 제일 먼저 캡슐 사서 연습이랑 스케줄 뛸 때 말고는 맨날 게임만 해요. 이러다 진짜 랭커 되겠다니깐요? 두나도 처음에는 안 그러다가 수지한테 몇 번 PK당하고는 열 받았는지 수지랑 게임하는 시간이 거의 비슷해졌어요.]

    “소담이는? 걔는 게임 별로 안 좋아하잖아?”

    [걔가 게임을 안 좋아한다고요? 아하하하하, 전혀요. 요즘은 걔도 완전 푹 빠져 살아요. 저랑 같이 인간 종족이라서 그런가 요즘 부쩍 같이 다니는데. 이러다 계약기간 끝나면 멤버들 다 쪼개지는 거 아닌가 몰라.]

    니아 멤버 네 명 사이에도 인간, 리자드맨, 오크가 나뉘어 있는 모양이다.

    아마 예전처럼 파티 사냥을 하기는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워낙에 사이가 좋은 애들이니까 별 걱정은 안 되네.’

    나는 스승 미소를 지은 채 박보연의 근황 토크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신이 난 듯 말을 이었다.

    [대격변 패치 이후에 ‘훌러덩’ 특성이 없어져서 더 이상 컨셉질은 못해도, 다들 여전히 게임 재밌게 플레이하고 있어요. 요즘 숙소에서 매일 종족별로 현피가 일어나서 떠들썩하네요.]

    “좋은 현상이네.”

    박보연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이내 넌지시 말을 이었다.

    […나중에 잘되셔도 나, 아니 저희 잊으면 안 돼요?]

    무슨 뜻이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십대 초반 애기가 무슨 의도가 있겠어.

    “첫 제자들을 잊을 리가.”

    나는 피식 웃고는 슬슬 통화 마무리 멘트를 건넸다.

    “그래. 음, 수고하고~ 나중에 언제 시간 되면 밥이나 한 끼 하자.”

    하지만.

    [나중에? 나중에 언제요?]

    “…응?”

    [정확히 날 잡아요. 사부 언제 시간 되는데요? 저는 이번 주는 좀 힘들고 다음 주부터는……]

    박보연은 자기의 스케줄을 똑 부러지게 밝혔다.

    나는 결국 다음 달 초로 약속을 잡고 말았다.

    [오케이 콜콜! 그때면 딱 일본 공연 마치고 왔을 때겠다. 제가 맛있는 거 쏠게요!]

    “그래. 사 주면 좋지. 비싼 거 먹는다.”

    [싼 거 드시고요, 올 때 선물 사올게요!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야한 잡지라거나…]

    “시노자키 아이린 화보집 있으면 부탁해.”

    […원하는 게 바로 나오네요? 음, 알겠어요. 사부 취향.]

    박보연은 다소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별 내용 없는 대화였지만 통화시간이 무려 32분에 이르는 긴 전화였다.

    [야! 사부가 뭐래? 시간 된대?]

    [뭐래? 뭐래? 만나재? 어우, 이 지지배 표정 헤벌쭉 한 것 봐!]

    [야 이 유사인간들아! 좀 비켜! 인간 연애사는 인간이 맡는다!]

    통화 말미에 배수지, 윤두나, 박소담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전화는 끊어졌다.

    바로 그때.

    지이이이잉…

    내가 전화를 끊길 기다렸다는 듯 바로 울리는 그 옆의 핸드폰.

    이번에는 마동왕 전용 번호였다,

    이 폰으로 전화를 걸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타이밍을 보아 대충 누군지도 짐작이 간다.

    “네 형. 왜요.”

    전화를 받자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오 뭐야? 전화 받은 건가? …마! 너는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니!?]

    엄재영 감독.

    ‘닳고 닳은 뉴비’ 구단의 바깥주인이다.

    나는 반대쪽 귀를 파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레이드 뛰느라 바빴죠.”

    [야이 씨, 레이드 하루 종일 뛰냐!?]

    “한번 뛰면 이틀은 뛰어요.”

    […그, 그래?]

    잠시 머쓱해하던 그는 이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챔 일정 잡혔다리~!]

    “…그 말투 아직도 써요?”

    [어? 그새 유행 지났냐?]

    “아직은 아니긴 한데.”

    [선발전 열린다리~!]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챔.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아시아 12개국 중 최강의 PVP 플레이어를 가리는 대회.

    엄재영 감독은 내게 말했다.

    [아마 한 4주 뒤부터 선발전 시작할 거야.]

    4주라? 다른 사람이 느끼기에는 촉박한 시간일 수 있지만 적어도 내가 예상한 것보다는 넉넉했다.

    ‘그 정도면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전에 오즈를 잡을 수 있겠군.’

    벼르고 별러 왔던 죽음룡 오즈 레이드.

    이것만 무사히 성공시킨다면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가 아니라 세계리그도 자신 있다.

    이런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엄재영 감독은 여전히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오늘 참가신청 끝냈다. 작은 약소 팀이라서 등록 안 받아준다고 튕기길래 힘들었어.]

    “뻥치지 마세요.”

    [티났냐? 맞아. 사실 별로 안 힘들었어. 너랑 내가 있는데 뭐.]

    그렇다.

    내가 차린 새로운 팀 ‘닳고닳은 뉴비’

    이 팀은 일단 감독이 ‘명장 엄재영’이다.

    에이스 멤버로는 현 프로리그 비공식 랭킹 1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마동왕’이 있다.

    (구단주가 나인 것은 대외적으로는 비밀이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이슈거리가 되고 있는 마당에 우리 팀을 신생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으리라.

    나는 미래 지식을 더듬으며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미래를 설계해 나갔다.

    “그것도 그거고, 의외로 이번에 출전할 만한 팀들이 별로 없을 거예요. 대격변 이후 프로 선수들이 죄다 오크랑 리자드맨으로 변해 버렸으니 픽을 싹 다 다시 짜야 할 테고…그게 4주 안에 마무리되기는 좀 힘들 것 같으니. 아마 한국 리그뿐만이 아니라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전체에 그런 기류가 감돌고 있을 겁니다.”

    내 말을 들은 엄재영 감독은 감탄스럽다는 듯 대답한다.

    [정확해. 네 말대로 그 이유 때문이야. 모든 구단이 선수들 엔트리가 은근히 빈약하더라고. 대격변 이전에 쟁쟁했던 팀들이 죄다 해체되거나 몸을 사려서….]

    “그러면 아챔 선발전은 어떻게 한대요?”

    [저번에 말한 것처럼 이번에도 저번 오뚝이배랑 똑같이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로 1차, 그리고 플레이 오프로 2차. 간단하지?]

    “너무 간단한데요?”

    단순 살아남기 생존경쟁으로 반을 걸러낸다는 점에서 다소 불합리한 경기방식일지도 모른다.

    대전운이 좋아서 살아남게 되는 무능력자도 있고 대전운이 나빠 떨어지게 되는 능력자도 있을 것이다.

    이런 불합리한 경쟁에서 뽑힌 이들을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 한국 대표팀으로 내보낸다면 당연히 팬들의 불만도 클 수밖에.

    ‘……하지만 별 수 있나.’

    나는 이미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

    회귀 전에도 대격변이 일어날 때마다 이런 논란들이 불거졌었기 때문이다.

    “뭐 아무튼. 이번 리그는 형평성 때문에 말 좀 나오겠네요.”

    [어쩌겠어. 아챔 일정에도 맞춰야 해서 시간도 별로 없고. …에휴, 협회 분들이 마음고생 무지하게 하시겠지 뭐. 그쪽에 아는 형님들 꽤 있는데 다들 형평성 논란 일어날까 봐 엄청 걱정하고 계신다.]

    엄재영 감독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흠, 이런 말이 나오는데 가만히 있을 수야 있나.

    나는 엄재영 감독을 안심시켰다.

    “그 형님들 만나면 생색 좀 내세요. 제가 형평성 논란 안 나오게 해드릴 테니까.”

    그러자 엄재영 감독은 쌩뚱맞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의아해한다.

    [읭? 어떻게? 이런 식의 졸속 일정에서는 무조건 형평성 논란이 나올 수밖에 없……]

    나는 어리둥절해 하는 엄재영 감독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그리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냥 다 부숴 버리면 되는 겁니다.”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누구나 공평하게 짓눌러 버리는 압도적인 힘!

    그렇다.

    대진표가 어떻게 짜이든 내 앞에서는 누구나 피떡이 될 뿐이다.

    이보다 더 형평성 있는 결과가 어디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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