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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354화 (354/1,000)
  • 355화 용감한 선택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 했던가?

    공든 탑을 무너트리는 것은 마지막 순간에 한 찰나의 방심일 것이다.

    […푸스스스. 고생했어. 거기까지야.]

    이 재수 없는 귓속말이 들려온 것과 동시에.

    쿠르르륵… 콰콰쾅!

    얼굴 옆이 뭔가 후끈하다.

    크지는 않지만 무시하기에는 성가신 열(熱) 데미지가 뭉텅 끼얹어졌다.

    직후 시커먼 불바람이 불어와 내 몸 전체를 사납게 뒤흔들었다.

    삐끗-

    삑사리.

    나는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충격에 마지막 일격을 빗맞추고 말았다.

    …콰쾅!

    데스나이트는 내 주먹에 맞아 어깻죽지가 터져나갔지만 언데드 특유의 질긴 생명력 덕에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한편, 나는 옆구리에 번지는 강렬한 통증과 함께 데스나이트의 옆을 나뒹굴어야만 했다.

    […푸스스스스스스!]

    이윽고, 나와 데스나이트의 앞에 음침하게 웃어 대는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빌어먹을 사이코 놈.”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조디악으로 추정되는 놈이 내 앞에 뻔뻔하게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아, 왜 ‘추정’이냐고?

    그것은 내가 지금 불완전변태 모드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죄다 시뻘겋게 물든 실루엣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이렇게 밉살맞은 목소리를 내면서 내 뒤통수를 때려 올 놈은 조디악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디악은 나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예전에 리자드맨 놈들에게 뒤통수를 맞았을 때 ‘생존 기술’ 하나쯤은 만들어 놔야겠다고 생각했었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차 싶었다.

    ‘…젠장 머저리 같이! 이걸 왜 까먹었지!? 미리 대비했어야 했는데!’

    뇌리를 스쳐가는 불길한 기억.

    아무래도 조디악은 자신의 마도서에 기록되어 있는 세 번째 특성을 개화시킨 모양이다.

    -<어둠 대왕의 일기장> / 7(8)클래스 마도서 / A+(S) / 강화: +10

    어둠 대왕이 악마(惡魔)와 싸우며 겪었던 길고도 처절한 경험들이 기록되어 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단 한 줄을 읽는 것만으로도 어둠에 먹혀 버린다.

    -마법 공격력 +4400(+5800)

    -어둠 속성 저항력 –10%(-5%)

    -기록된 마법(?개): ‘무덤사역’, ‘유극지옥’, ‘피학성애(被虐性愛)’...

    ‘피학성애(被虐性愛)’

    이 특성은 오로지 흑마법사와 극히 일부의 특수직업만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으로 그 내용은 간단하다.

    자기가 죽었을 경우 자기 자신을 직접 수술해서 살려 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직접 자기의 시체를 언데드로 가공해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을 뜻한다.

    이 특성을 발동하면 HP가 0이 된 상태에서 언데드 상태로 되살아나게 되는데 이 경우 2랭크 상당의 스탯이 감소하는 것은 다른 언데드화 과정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A+등급의 몬스터가 이 특성을 사용하게 된다면 죽고 나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B+등급의 몬스터로 부활한다.

    이후 다시 한번 죽게 된다면 더 긴 시간이 지난 뒤 C+등급의 몬스터로 부활, 여기서 한번 더 죽게 된다면 D급 몬스터로 부활, …여기서부터는 다음이 없다.

    최종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일단 언데드 상태가 되면 몇몇 비밀스럽고 특수한 장소로 가서 어둠 사제의 축복을 받는 것 외에는 스탯을 원래대로 복구시킬 방법이 없다.

    하지만 일단 여벌의 목숨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대단히 유용한 생존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죽은 뒤 일정 시간 동안 시체를 지킬 자구책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푸스스스스! 네놈도 방심할 때가 있구나, 이 변태 자식.]

    조디악은 나를 비웃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나의 시야는 온통 빨갛게 물들어 있었기에 놈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 역시도 웅웅 울려 방향 감지가 쉽지 않다.

    …턱! …터억!

    조디악은 나와 내 옆에 널브러진 데스나이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결국 무조건 버티는 것이 답이로군, 가만히 있던 내가 이득을 공짜로 취하게 생겼으니 말이야. 자! 이제 끝낼 시간이다!]

    막타를 훔쳐 먹은 자의 희열이 듬뿍 담긴 멘트였다.

    나는 조디악의 말을 듣고는 내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조디악 놈이 맨 처음 데스나이트에게 불을 끼얹었을 때, 놈의 의도는 명백한 것이었다.

    “…주변을 재투성으로 만들어서 자신의 창백한 낯빛을 숨기려고 한 거였군. 이 음흉한 놈.”

    ‘피학성애’ 특성이 발현되면 얼굴색이 시체처럼 창백해지니 그것을 숨기기 위해 주변에 온통 재를 뿌려놓은 것이리라.

    되살아나기 위해 필요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자신의 시체를 훼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결국 나의 실패는 조디악 놈의 꼼수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것에서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로군.’

    나는 몸에서 힘을 뺐다.

    츠츠츠츠츠츠츠…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증기가 점점 약해진다.

    어차피 내 육체는 곧 불완전변태 특성에 의해 소멸할 것이다.

    데스나이트도 조디악에게 가로채기 당했으니 더 이상 희망은 없었다.

    …바로 그때!

    […어진아!]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

    이것은 분명 윤솔의 것이었다.

    ‘나이스 타이밍!’

    꺼져 가던 내 생명의 촛불이 다시금 활활 타오른다.

    파앗-

    윤솔이 걸어 준 힐 마법이 나의 체력을 다시 회복시켰다.

    퍽!

    나는 조디악의 손을 밀치고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이런 빌어먹을! 매드독 년놈들은 대체 뭘 했길래!?]

    조디악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난다.

    나는 바로 깎단을 들어 조디악을 찌르려 했다.

    하지만 폭주의 후유증일까?

    아니면 조디악이 재빠른 것일까?

    [히익!? 그 송곳은 이제 지긋지긋하다구!]

    조디악은 내 깎단을 피해 고개를 숙인 뒤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났다.

    막타고 뭐고 죄다 내려놓고 회피하기에만 급급하는 놈의 행동에 나는 두 번째 공격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어진아! 맞서는 건 위험해! 이리로 와!]

    다급한 순간, 윤솔이 내 쪽으로 달려온다.

    내가 위험에 처하자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한 윤솔의 모습.

    …하지만 큰 문제가 있었다.

    나도 눈에 뵈는 게 없다는 것!

    나는 ‘불완전변태’ 특성 탓에 피아식별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움직이는 것들은 그저 시뻘겋게만 표시될 뿐.

    바로 그때!

    [크-워어어억!]

    혼란에 혼란이 더해졌다.

    축 늘어져 있던 데스나이트가 다시금 발광하기 시작한 것이다.

    놈은 부러진 손톱을 휘둘러 이곳저곳에 참격을 흩뿌렸다.

    콰콰콰콰쾅!

    하지만 내 주먹에 맞아 안면이 뭉개져 있는 상태였기에 에임은 부정확했다.

    주변에 있던 애꿎은 돌기둥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린다.

    [어엇!?]

    [까악!]

    조디악과 윤솔이 당황해 바닥에 엎어진다.

    나 역시도 데스나이트를 피해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꺼져! 낄 데 껴라!”

    나는 데스나이트의 정강이를 발로 차서 꺾어 버렸다.

    그리고 재빨리 다시 고개를 들어 윤솔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

    그러나 내 눈앞에는 시뻘겋게 물든 두 사람의 실루엣이 서 있을 뿐이었다.

    아까 데스나이트의 공격을 피해 구르는 동안 잠시 방향 감각을 상실한 것이다!

    ‘큰일났다. 어느 쪽이 솔이지?’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불완전변태 특성으로 인한 ‘버서커 모드’

    이 상태의 단점은 ‘100초’라는 제한시간 외에도 하나가 더 있다.

    피아식별 불가능.

    아까도 말했지만 이것이 버서커 모드의 치명적인 단점이다.

    여덟 다리 대왕 큘레키움이 불완전변태 특성을 발현시켰을 때는 부유섬의 거미들이 모두 죽은 뒤였다.

    그래서 대왕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라도 자신의 무고한 백성들을 다치게 할까봐.

    그리고 지금 나 역시도 눈앞의 윤솔과 조디악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비슷한 크기의 붉은 실루엣으로만 보일 뿐이다.

    한 쪽은 조디악 다른 한 쪽은 윤솔.

    찰나의 순간, 나는 망설였다.

    여기서 잘못된 선택을 하면 윤솔은 죽는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조디악은 줄행랑을 놓을 것이다.

    나는 무의식중에 어둠 대왕을 잡고 얻은 ‘선택’ 특성을 발동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효력이 없었다.

    아마도 S급 몬스터인 큘레키움의 ‘불완전변태’ 특성에 압도되어서 효과가 사라진 모양이다.

    힐 마법으로 인해 조금 연장된 내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윤솔이 죽는 순간 그마저도 곧 끝날 것이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뇌가 제멋대로 상정하는 초침 소리.

    시계의 유극(遊隙)에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파르르 떨리는 칼끝은 눈앞의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향하지 못하고 있는 채.

    바로 그때.

    […너의 판단을 믿어라.]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 하나가 있었다.

    나직한 저음, 어쩐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

    흡사 사자의 것과도 같이 위엄 있는 음성이 나의 전신에 따듯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뭐지?’

    머릿속에 의문이 들었지만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뚝!

    파르르 떨리던 깎단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누군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있는 듯, 나는 믿음직하고 든든한 기운에 몸을 맡겼다.

    […왼쪽. 용기를…!]

    귓가에 들려오던 목소리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는 듯 점점 작아지더니 종국에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내 몸을 이끌던 미증유의 온기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남겨 놓은 용기와 신뢰는 아직도 내 심장 속에 남아 무너져 가는 육체를 이끌었다.

    ‘왼쪽!’

    내 칼끝은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여 왼쪽에 있는 붉은 그림자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퍽-!

    두개골이 깨지고 그 안에 든 부드러운 것들이 사방팔방으로 흩뿌려졌다.

    동시에 시뻘겋게 점철되는 시야!

    [꺄아아아아아악!]

    고막을 긁는 듯한 단말마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터져 나온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갔기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자!

    오오, 그것은 분명히 조디악 번디베일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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