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49화 (349/1,000)
  • 350화 용감한 선택 (3)

    “하! 이런 개 같은 일이 다 있나….”

    조디악 번디베일.

    늘 여유롭고 능글맞던 그는 지금 몹시 짜증이 나 있다.

    아니. 짜증이 난 게 아니라 화가 난 것, 그것을 넘어서 초조해하고 있었다.

    심지어 옅게나마 공포마저 묻어나는 표정.

    나는 뒤를 흘끗하며 물었다.

    “야, 저게 뭐냐? …데스나이트냐?”

    “그랬으면 내가 벌써 잡았겠지.”

    조디악은 이를 뿌득 갈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검은 갑옷의 데스나이트 ‘리차드 1세’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데스나이트 ‘사자심왕(獅子心王)’> -등급: S / 특성: 어둠, 언데드, 하수인, 맹수, 1:1, 백전노장, 싸움광, 패륜아, 선택, 앙버팀

    -서식지: ‘칼침의 탑 9층’

    -크기: 3m.

    -‘포기하는 것도 용기야. 도망쳐, 잭!’

    -겁쟁이 새끼사자-

    원래 내 기억속의 데스나이트는 날렵한 몸을 가진 검은 갑옷의 기사였다.

    칠흑의 갑주, 열 개의 장검과도 같은 손톱, 흑풍처럼 휘몰아치는 몸놀림.

    위엄 있는 사자의 얼굴에 목과 등, 허리를 망토처럼 감싸고 있는 검은 갈기가 매력적이었던 보스 몬스터.

    하지만.

    “…세상에!”

    지금 나를 놀라게 하고 있는 이 데스나이트의 외형은 내 기억과 살짝 다르다.

    검은 장갑(裝甲)과 망토처럼 휘날리는 갈기, 열 자루의 장검과도 같은 손톱, 사자 계열 수인 특유의 강력한 육체는 모두 똑같다.

    다만 놈의 얼굴은 내 기억 속 위엄 있던 사자의 머리가 아니었다.

    위로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눈.

    흰자위만 퀭하게 번들거리는 눈알.

    입술이 없어 드러난 붉은 잇몸과 그 밖으로 툭툭 불거져 나온 날카로운 이빨.

    나는 그 제멋대로 배열된, 정신 나간 이목구비들을 보는 즉시 입을 열어 외쳤다.

    “…썩은물!”

    저 미쳐 버린 도플갱어가 어찌하여 이곳에 있단 말인가!

    눈앞에 있는 저 썩은물은 내가 연기하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 빌런이다.

    AI도 미칠 수가 있구나 하고 처음으로 느꼈던 것이 바로 저 사이코 몬스터였다.

    예전에 죽여 두지 못하고 도망치게 내버려 둔 것이 천추의 한!

    내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리자 옆에 있던 조디악이 입술을 깨물었다.

    “데스나이트를 잡으려고 먼 곳에서부터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을 죄다 끌어왔지. …그런데 개중에 이상한 놈이 하나 섞여 있던 모양이야.”

    “으음. 저놈은 도플갱어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버그 몬스터야. 연쇄살인 스텍이 극한까지 쌓여서 이상변이를 일으킨 개체지.”

    ……내가 만들었다는 말만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한편.

    내 말을 들은 조디악은 시커먼 머리를 한번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런가? 푸스스스스! 어쩐지, 저런 괴랄한 놈은 전에 본 적이 없어.”

    놈은 다크서클 퀭한 눈을 몇 번 끔뻑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데스나이트를 거의 다 잡았을 때쯤 저놈에게 스틸 당했다. 잡몹들 무리에 섞여 있어서 눈치 못 챘어. 순식간에 육체를 잠식해 구현해 내더군.”

    아무래도 썩은물은 데스나이트의 육체에 기생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찌된 메커니즘인지는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한 가지는 분명하다.

    “못 잡겠으면 나와, 루져들아.”

    나는 조디악 일행에게 손짓했다.

    다행스럽게도 조디악이 데스나이트 레이드에 실패했으니 이제는 내 차례다.

    …뭐,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조디악 일행을 곱게 놓아 줄 수야 없는 일.

    데스나이트를 스틸할 수도 있고 저번처럼 레이드 이후 지쳤을 때 암습을 가해 올 수도 있으니까.

    ‘전원 죽여 버려야 하는데…….’

    내가 머리를 굴리고 있는 동안, 윤솔과 드레이크, 잭 오 랜턴이 나를 따라붙었다.

    “어진아! 왜 그렇게 빨리 달려갔어!”

    “음!? 어진! 적인가!”

    [큭큭큭. 너희들의 적이라면 내 적이기도 하지.]

    졸지에 우리 파티와 데스나이트 사이에 낀 패티 신세가 된 조디악 일행이다.

    조디악은 짐짓 애원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두 손을 모아 보였다.

    “푸스스스! 이봐, 진짜 이건 아니지. 한 번만 봐달라고. 우리는 지금 다 만신창이야.”

    확실히 그들은 지치고 피곤해 보인다.

    긴 시간 동안 온 맵을 돌아다니며 몬스터들을 모으고 퀘스트들을 깨는 등 데스나이트 공략 준비를 했을 테고 또 칼침의 탑 1층부터 8층까지의 잡몹들을 토벌했고 최종적으로 9층의 보스 데스나이트를 죽이기 직전까지 갔었으니…….

    그동안 누적된 피로는 모르긴 몰라도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더 좋은 타이밍이군.”

    그따위 것들은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이 세계의 파괴를 막기 위해,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사랑과 진실 어둠을 뿌리고 다니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감초, 귀염둥이 히어로!

    “나 어진.”

    “나 윤솔.”

    “나는 드레이크다옹.”

    [호에-엥!]

    상대방이 레이드를 막 마친 직후에 기습하는 것은 조금 치사하지만…뭐 어떠랴? 저놈들은 이 게임 세계를 망치려고 작정한 악당들인 것을.

    이참에 예전 고르딕사 레이드 때의 복수도 해 버려야겠다.

    ‘아주 그냥 눈에 띌 때마다 밟아 죽여야지.’

    나는 눈앞에 있는 조디악 일행과 그 뒤에서 걸어오는 데스나이트를 향해 깎단을 빼들었다.

    그것을 본 김정은이 이를 뿌득 간다.

    “…진짜 한번 해 보겠다는 거지?”

    “한 번? 누가 한 번만 한데? 열 번이고 백 번이고 할 거야. 너희들이 다 죽을 때까지.”

    내가 웃으며 대꾸하는 것을 들은 김정은의 이마에 실핏줄이 돋아났다.

    “뭐 저딴 놈이 다 있어!? 뭣들 해! 저 변태를 치워!”

    김정은이 외치자 방철우, 방철해 형제가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Wouoo…!]

    [Grrrrr…!]

    두 마리의 오크 전사가 육중한 몸을 던져 숄더 태클을 걸어온다.

    “너희들은 어째 배우는 게 없니.”

    나는 피식 웃고는 덤벼드는 두 덩치의 몸을 양 손으로 받아냈다.

    퍼퍼퍼펑!

    동시에 반사 데미지가 놈들의 몸을 두들겼다.

    질긴 피부가 찢어지며 핏물이 튄다.

    내 손아귀에 잡힌 굵은 뼈들이 뚝뚝 부러져 나가는 감각.

    나는 두 손으로 오크 두 마리를 뒤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잭 오 랜턴이 불카노스 대낫을 든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자, 다음은 너다.”

    나는 방씨 형제에게 신경을 끄고 바로 조디악에게 달려갔다.

    “푸스스스! 좀 꺼지란 말이다!”

    조디악은 시커먼 불길을 두르고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좁은 회랑에서 조디악 파티와 내 파티가 격렬하게 맞붙는다.

    으레 비슷한 전력으로 공방전을 벌이게 되면 고도가 높은 쪽이 유리한지라 초반에는 조디악 일행이 우리를 조금씩 밀어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한계는 금방 드러났다.

    조디악 파티는 데스나이트를 상대하느라 너무 지쳐 있었고 또 더군다나 그 대상인 데스나이트가 뒤에서 공격을 시작해 왔기 때문이다.

    [크-워어어어억!]

    썩은물.

    아니 이제는 썩은물을 넘어 거의 ‘적폐’나 ‘망령’ 등으로 불러야 더욱 더 적절할 괴물.

    데스나이트를 모방한 것인지 흡수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이 괴물은 나선형의 긴 회랑을 거침없이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열 자루나 되는 긴 칼날을 휘두르며 말이다.

    퍼억! 퍼어-억!

    놈이 한번 팔을 휘두를 때마다 단단한 돌 벽이 두부처럼 썰려나간다.

    그것을 본 조디악의 하얀 얼굴이 더욱 더 창백하게 변했다.

    “비켜! 비키라고! 성질이 뻗쳐서 정말… 비켜!”

    놈은 나를 향해 미친 듯이 고함쳤다.

    하지만 나는 알박기&배짱장사 모드다.

    “내가 왜 비켜야 하지? 시간은 내 편인데.”

    내가 시간을 끌면 조디악 일행은 알아서 적폐망령 데스나이트에 의해 갈갈이 찢겨 죽을 것이다.

    …하지만.

    “미친놈아! 그러다간 너도 X된다고! become a jot!”

    조디악은 정말로 다급하게 외치고 있었다.

    어째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좀 진짜 같은데…?

    순간.

    콰쾅!

    난데없이 일어난 묵직한 지진파가 회랑 전체를 뒤흔들었다.

    ‘…아차!’

    나는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기억에 전율했다.

    그렇다.

    조디악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우르릉!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간과한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우지지지직…!

    단단한 얼음을 박살내고 그 안에서 뛰쳐나온 괴물.

    8층 전체를 꽉 채울 정도로 거대한 몸을 가진 ‘그것’이 얼굴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인간 지네> -등급: S / 특성: 어둠, 언데드, 하수인, 벌레, 악귀, 맹독, 백전노장, 잠복, 지진, 나포, 과식, 흡혈, 고속재생, 갹출, 돌격대, 격리수용

    -서식지: ‘칼침의 탑 8층’

    -크기: 44m

    -데스나이트는 생전에 강한 무력과 고결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기사의 시체로 만들어진다.

    각 종족의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로 훌륭했던 영웅들의 시체는 오즈에 의해 알게 모르게 도굴된 뒤 음지로 빼돌려져 데스나이트로 가공되는 일이 많았다.

    (나라마다 이름난 영웅의 무덤을 파헤쳐 보면 대부분 안이 텅 비어 있는 것이 바로 이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역사의 평가가 실제보다 후하게 이루어졌던 이들도 존재했는데 이들의 시체는 불행하게도 데스나이트로 가공되는 과정을 버티지 못하고 망가져 버리게 되었다.

    죽음룡 오즈는 수많은 실패작 영웅들의 시체를 쓰레기 처리장에 내버렸는데 어느 날 문득 망가진 시체들을 한 줄로 길게 꿰매 보기로 했다.

    순전히 여흥삼아 벌인 일이었다.

    앞사람의 항문과 뒷사람의 입을 실로 꿰매고 또 그 뒷사람의 입을 앞사람의 항문과 꿰매어 한 줄로 길게 이어 붙인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괴기스러운 언데드, ‘데스나이트 실패작’들의 융합체가 바로 이 ‘인간 지네’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입과 항문이 일렬로 연결되어 있는 기괴한 모양새의 괴물.

    몸체가 긴 만큼 설명조차 길다.

    그리고 나는 이 인간 지네의 맨 앞에 엎드려 있는 이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았다.

    ‘사자왕 헨리로군.’

    사자심왕 리차드 1세의 아버지이자 수인국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존재.

    그는 죽음룡 오즈에게 붙잡혀 최후의 끝자락까지 농락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조디악이 왜 그렇게 초조해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왜 중간보스를 안 잡고 그냥 건너뛰었어, 그러게.”

    “빌어먹을, 난들 알았나? 일시적으로 놈을 얼려둔 뒤에 최종 보스의 목만 따고 재빠르게 빠질 생각이었지. 하필 봉인이 지금 풀릴 줄이야.”

    나는 조디악의 시니컬한 대꾸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 지네는 S급 몬스터, 어쩌면 하린마루보다도 더 상대하기 까다로운 괴물이다.

    나 같았어도 이 역겨운 괴물과의 싸움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 조디악이 시도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을 써서 스킵하고 바로 데스나이트부터 잡으러 갔겠지.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앞에서는 데스나이트, 뒤에서는 인간 지네!

    각각 최종보스와 중간보스가 연합을 해서 우리를 덮쳐오고 있었다.

    콰콰쾅!

    인간 지네가 거대한 몸을 꿈틀거리자 9층의 계단이 완전히 무너진다.

    그뿐만이 아니라 8층과 7층, 그 밑의 층들까지도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런!?”

    나는 갑작스럽게 푹 꺼지는 바닥에 당황해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손에는 빈 허공만이 잡힐 뿐이다.

    나뿐만 아니라 윤솔과 드레이크, 심지어 할로윈 특성이 있는 잭 오 랜턴마저도 추락했다.

    조디악 일행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으아아아앗!?”

    누가 누구의 편인지 구분할 겨를도 없었다.

    우리 모두는 까마득한 아래를 향해 추락했다.

    그리고 탑의 잔해물들이 그런 우리를 덮쳐 왔다.

    “어진아!”

    윤솔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나는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콰콰콰쾅!

    엄청난 규모의 낙석들이 나를 친구들과 갈라놓았다.

    그 와중에 나에게 멱살이 단단히 잡힌 조디악도 함께였다.

    “으악 이 미친놈아! 나는 왜 잡아!”

    나에게 끌려온 조디악 역시도 덩달아 자기 동료들과 떨어지게 되었다.

    [우워어어어어!]

    그리고 그런 나를 향해 온 몸을 던져오는 데스나이트 역시도.

    우르르릉…!

    결국 탑의 잔해가 이곳에 있는 모든 존재들을 둘로 양분했다.

    나와 조디악, …그리고 적폐망령 데스나이트.

    윤솔과 드레이크, 잭 오 랜턴. 그리고 김정은과 방철우, 방철해 형제. …그리고 인간지네.

    실로 끔찍한 조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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