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48화 (348/1,000)
  • 349화 용감한 선택 (2)

    “…음, 어렸을 때 만화영화를 보면 늘 의문이었지. 왜 마왕은 하필 탑 꼭대기에 있고 1층부터 고층까지 약한 몬스터들을 차례대로 배치해 두는 멍청한 전략을 쓰는지.”

    나는 턱을 짚은 채 생각했다.

    일반적인 동화의 설정에 따르면 으레 공주를 납치해 간 마왕은 높은 탑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탑의 1층에는 저렙의 몬스터, 탑의 고층에는 고렙의 몬스터가 존재한다.

    도전자인 용사는 탑의 1층부터 2층, 3층, 4층, 5층…꼭대기 층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점점 경험치를 쌓아 노련해져 종국에는 마왕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마왕은 그런 바보 같은 위치선정을 고집하는 것일까?

    그냥 본인이 모든 층의 괴물들을 이끌고 1층에 대기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걸까?

    만약 한 층에 공존할 수 없는 마물들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고렙 몬스터들을 저층에 배치하고 저렙 몬스터들을 고층에 배치하면 될 일이 아닌가?

    고렙 몬스터가 아래층에 있는 게 싫다면 던전을 탑이 아니라 길쭉하게 가로로 설계하면 된다.

    아니면 최소한 몬스터들의 층을 랜덤으로 배정하거나.

    이것은 유년 시절부터 수많은 용사물을 접한 나의 고민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의 생각은 눈앞에 실체화되어 구현되었다.

    좀비, 스켈레톤, 고스트, 구울, 미이라, 흡혈귀, 키메라, 마녀, 벤시, 트롤, 오우거, 츄파카브라, 하이에나, 샐러맨더, 타락 정령, 악귀, 골렘, 가고일, 만티코어, 그 외 각종 언데드들…

    실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몬스터들이 1층에 모여 우글거리고 있었다.

    탑에 있는 몬스터들이 죄다 뛰쳐나온 것 같은 외형.

    하지만.

    나, 윤솔, 드레이크, 잭 오 랜턴 중 그 누구 하나 겁먹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죽은 놈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이것들 다 뭐야? 왜 여기 모여서 죽어 있어?”

    나는 눈앞에 즐비한 시체들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그렇다.

    위에 언급한 수많은 몬스터들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원래 언데드 몬스터는 설정 상 죽은 시체가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이것들은 정말로 죽어 나빠져 있다.

    드레이크가 시체들을 잘 살펴본 뒤 말했다.

    “…흐음, 누가 벌써 사냥하고 간 것 같은데?”

    세상에, 나보다 먼저 칼침의 탑을 공략할 엄두를 낸 녀석이 있다고?

    나는 시체들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게임에도 법의학(法醫學)은 존재한다.

    사체에 난 자국을 보면 대충 어떤 레이드가 왔다 갔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불타거나 얼어붙은 자국이 있다면 마법사가, 베거나 찌른 자국이 있다면 칼잡이, 화살이나 마름쇠가 보인다면 궁수…….

    사자무언(死者無言)이라고는 하지만 시체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말해 준다.

    하지만.

    “……대체 뭐지?”

    몬스터들의 시체를 살피면 살필수록 의문은 커져만 간다.

    시체들의 상태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얼거나, 불타거나, 빳빳하게 굳어 있거나, 돌이 되어 있거나, 으깨져 있거나, 토막 나 있거나, 목이 잘려 있거나, 난자되어 있거나…….

    한마디로 종잡을 수 없는 흔적들이다.

    심지어!

    “…가만, 이 자식들 이거. 탑에 사는 몬스터가 아니네?”

    나는 몬스터들의 시체 사이에서 낯선 얼굴들을 몇몇 발견할 수 있었다.

    오우거나 도깨비 등은 어둠 속성 몬스터이기는 하나 대체로 던전이 아닌 필드에 서식하는 야생종. 이런 좁은 던전에는 거의 살지 않는다.

    심지어 계단을 올라가 위로 가자 얕은 바다에 사는 해수형 몬스터들까지 죽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 근방에 바다가 있기는 하지만 꽤 멀다.

    그런 곳에 사는 게나 갯강구 등이 이런 곳에서 죽어 있다는 것은 당연히 이상한 일이다.

    ‘…오픈필드에서 활개 치며 사는 몬스터들이 이런 폐쇄적인 곳까지 와서 우수수 죽어 있다는 것은.’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2층 전역을 살피고는 3층으로 올라갔다.

    상층부의 상황 역시도 하층부와 비슷했다.

    원래 이곳을 지키고 있어야 할 슬라임이나 좀비, 흡혈귀, 해골병들 뿐만 아니라 위층에 서식하는 몬스터들까지 우르르 내려와 죽어있다.

    그리고 역시나, 이 던전이 아니라 바깥 필드에 서식하는 몬스터들까지 뒤섞여 죽었다.

    마치 던전 바깥의 몬스터들이 던전 안으로 들어와 내부에 서식하는 몬스터들과 싸운 것처럼!

    “보아하니 대규모 전쟁이 있었던 모양인데…….”

    윤솔이 던전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전에 방탈출 게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그녀는 추리력이 좋다.

    벽과 천장까지 생겨난 칼자국과 손톱자국, 핏자국을 본 윤솔은 이 공간 안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상황을 어느 정도 눈에 그릴 수 있게 된 모양.

    “보니까 일련의 저렙 몬스터 무리들이 억지로 계단을 비집고 올라온 모양이야, 안쪽의 고렙 몬스터들이 그걸 막아섰고. 밖에서 들어온 쪽 저렙 몬스터들의 시체가 처음에는 깔끔하다가 점점 지저분하게 난자된 것을 보면 안쪽 고렙 몬스터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힘이 빠진 것이겠지? 던전 밖에서 안쪽으로 인해전술 공세가 왔다는 건데….”

    윤솔의 추리는 그럴 듯했다.

    한마디로 저렙 몬스터들이 고렙 몬스터들의 던전을 물량빨로 밀어붙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서로 유대감이 전혀 없을 몬스터들이 무엇 때문에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이 탑을 공략한 것일까?

    바로 그때.

    “……!”

    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끊어질듯 말듯하게 위층에서 흘러나온다.

    …♫♬♪

    바로 피리 소리였다!

    나는 인상을 팍 구겼다.

    “…먼저 온 놈이 누군지 딱 알겠네.”

    조디악 번디베일!

    이 지긋지긋한 놈이 나보다 먼저 칼침의 탑을 올랐던 것이다.

    던전 안에 꽉 찬 시체들로 보아 프로리그 습격사건 때 썼던 수법을 다시 한번 더 쓴 것 같았다.

    던전 바깥을 돌며 수많은 몬스터들을 모아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는 것!

    이 방법은 아주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지만 일단 성공하기만 한다면 적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흑마법사 특유의 전략이다.

    “놈이 데스나이트를 잡게 해선 안 돼!”

    나는 재빨리 칼침의 탑 위로 내달렸다.

    드넓은 3층을 지나 4층, 5층도 돌파했다.

    모든 층에는 시체만이 꽉 차 있을 뿐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나는 7층을 넘어 8층에 진입했다.

    데스나이트가 있는 보스방은 9층의 꼭대기,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입안이 바싹 타들어간다.

    그때.

    “……!”

    나는 잠시 멈춰서야 했다.

    거대한 8층을 통째로 휘감고 있을 정도로 긴 얼음조각상이 보인다.

    그리고 그 얼음 속에는 기분 나쁜 눈동자 몇 개가 갇힌 채로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리치 왕이 애완동물인 하린마루를 중간 보스로 삼았듯, 데스 나이트 역시 애완동물 한 마리를 키운다.

    ‘중간 보스’

    그것이 지금 내 눈앞에 얼어붙어 있는 것이다!

    “…조디악 놈. 상대하기 귀찮으니까 그냥 여기에 얼려 둔 건가.”

    내가 하린마루와 싸우는 도중에 레이드를 던진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조디악은 이 귀찮은 중간 보스를 스킵하고 바로 최종보스인 데스나이트를 잡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회귀자인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은 대단하지만…그렇다고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놈이 그때 분명 클로즈 베타 어쩌구 했었지? 그래서 잘 아는 걸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조디악 놈이 중간보스를 이곳에 얼려둔 지 오래 되었다면 아마 지금쯤 데스 나이트를 잡았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놈은 홀몸도 아니지 않은가!

    ‘망할 매드독 놈들만 없었어도!’

    나는 온 힘을 다해 계단을 타올라갔다.

    …♫♬♪

    피리 소리는 점점 더 진해지고 있었다.

    동시에 귓가에 여러 소음들이 뒤섞여 들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내지르는 비명!

    아마 조디악에게 홀려 이곳까지 따라온 정예몬스터들이 데스나이트와 싸우고 있는 것이리라.

    “이 자식! 데스 나이트는 내 몫이다!”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여기서 조디악에게 데스나이트를 빼앗긴다면 그동안 했던 일이 모두 허사가 된다.

    죽음룡 오즈 레이드도 훨훨 물 건너 날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점점 희망은 옅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됐어!’

    늦었다.

    조디악이 이 던전에 온 것은 아주 오래 전으로 보인다.

    놈의 실력이라면 머지않아 곧 데스나이트를 거꾸러트리리라.

    그렇게 된다면 나의 계획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동안 준비해 온 모든 고생들이 허사가 되었다.

    “…젠장.”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조금만 더 가면 데스나이트가 도사리고 있는 보스방이었지만… 어째 불길한 상상만이 자꾸 머릿속을 채운다.

    조디악이 이미 데스나이트를 죽이고 특전들을 가로챈 뒤라면 너무 원통해서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설사 조디악 놈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 분노는 가라앉지 않을 것 같은 느낌.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예측불허라고 했던가?

    타타타타탁!

    내가 계단을 딛을 때 나는 발소리 말고도 몇 개의 발소리들이 엇박자로 들려온다.

    그 소리는 위에서 아래로, 내가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이내 9층을 눈앞에 두고 우뚝 멈춰서야 했다.

    조디악!

    놈이 내 앞으로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

    나는 바싹 경계했다.

    …벌써 데스나이트 사냥을 끝마치고 내려오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뭔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저 지친 표정, 당혹스러운 기색은 대체 뭐지? 단순히 나를 만나서 놀란 건 아닌 것 같은데….’

    저건 사냥꾼의 표정이라기보다는 사냥감의 표정에 더욱 가까웠다.

    한편, 조디악은 나를 보자마자 오만상을 찌푸렸다.

    “…허억 …허억…이 빌어먹을 변태 놈. 또 너냐?”

    놈은 피곤하고 지친, 그리고 꽤나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뒤로 헐떡거리고 있는 김정은, 공포에 질린 방씨 형제의 모습도 보인다.

    그때.

    “빨리! 빨리 가! 길막하지 말고!”

    김정은이 갑자기 빽 소리쳤다.

    보아하니 아무래도 데스나이트 레이드에 실패해서 도망치는 모양이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의문점 하나가 든다.

    ‘…왜?’

    리치 왕과 달리 데스나이트를 잡는 방법은 정공법 하나뿐이다.

    준비만 철저히 해 왔다면 딱히 변수가 발생할 만한 상황은 없는데….

    하지만 천하의 조디악조차 표정이 저 모양이라니.

    평소의 이죽거리던 미소는 간 곳이 없잖은가!

    ‘대체 뭔 일이래?’

    나는 조디악의 도망 길을 막아선 채 놈들의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콰쾅…! 쿵! 쿵! 쿵!

    데스나이트로 추정되는 검은 갑옷의 괴물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9층의 층계를 가득 메울 정도의 암흑기류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조디악과 매드독 멤버들의 뒤로 칼침의 탑의 최종보스 데스나이트가 등장했다.

    전신을 단단하게 감싼 칠흑의 갑주, 터질 듯한 근육, 양 손에 돋아난 날카로운 손톱, 목과 허리를 뒤덮고 있는 풍성한 사자갈기.

    사자심왕 리차드 1세!

    용맹한 수인족의 왕이 죽음의 기사가 되어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회귀 전, 내 기억 속에 있는 데스나이트와는 딱 한 가지가 달랐다.

    얼굴!

    이 데스나이트의 얼굴만큼은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 ‘익숙한’ 낯짝을 보는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것이 바로 천하의 ‘앙신(殃神) 조디악’을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트린 최악의 변수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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