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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346화 (346/1,000)
  • 347화 여벌의 심장 (3)

    우지지직!

    심장.

    혈액의 호수 깊은 곳에 가라앉아 펄떡이던 심장이 결국 파괴되었다.

    동시에 리치 왕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환상통(Phantom Pain)’이라도 겪고 있는 것일까?

    놈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심장을 찾아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가슴 속은 이미 텅 비어 차가운 어둠만이 고여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콰쾅!

    리치 왕은 폭주하기 시작했다.

    놈은 최후의 목숨을 쥐어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심지어 그토록 꼭 쥐고 있던 도끼마저 내려놓은 채로.

    …하지만!

    [옛 친구여. 이제 끝났다네.]

    잭 오 랜턴이 리치 왕의 앞을 막아섰다.

    불카노스로 만들어진 대낫이 횡으로 휘둘러졌다.

    퍼-엉!

    벌건 수면이 대각으로 깎여나간다.

    리치 왕의 가슴팍이 참격으로 인해 움푹 패였다.

    뜨거운 혈액의 호수 한복판인지라 그를 보호해 주던 서리 갑옷도 이제는 없다.

    …우지지직!

    잭 오 랜턴은 낫을 짧게 쥔 뒤 그대로 리치 왕의 가슴팍에 꽂았다.

    그리고 양철 갑옷의 중앙을 세로로 길게 잘라 버렸다.

    쿨컥… 쿨컥… 쿨컥…

    텅 빈 갑옷 속으로 뜨거운 혈액이 밀려든다.

    따스한 온기가 차갑게 맴돌던 공허를 밀어내고 그 안을 가득 채웠다.

    쿠르르르르륵…!

    호수의 수위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그 넓던 호수에 가득하던 혈액은 결국 한 방울도 남김없이 리치 왕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쿵!

    호수의 모든 피를 가슴으로 삼킨 리치 왕이 무릎을 꿇는다.

    그와 동시에.

    -띠링!

    <세계 최초로 ‘불사(不死)의 좌군단장 리치 왕’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최초 정복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YES: 고인물.>

    <보상이 지급됩니다!>

    <‘불사의 좌군단장’이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는 영영 부활하지 못합니다.>

    <용 진영 ‘불사의 군단’의 사기가 감소합니다.>

    <불사의 군단 좌익의 세력구도가 크게 바뀝니다.>

    <‘흡혈귀’ 일족이 두려워합니다.>

    <‘좀비’ 일족이 두려워합니다.>

    <‘구울’ 일족이 두려워합니다.>

    <‘미이라’ 일족이 두려워합니다.>

    <‘몽마(夢魔)’ 일족이 두려워합니다.>

    <‘고스트’ 일족이 두려워합니다.>

    <‘...’ 일족이...>

    <‘...’ 일족...>

    수많은 알림음들이 내 귀를 때렸다.

    모든 어둠 계열 몬스터, 마(魔)에 근간을 두고 있는 모든 크리쳐들이 나의 존재에 전율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종족들이 크게 동요하는 와중에,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낮으신 분’이 ‘고인물’ 님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죽음룡 오즈(Odd’s)’

    검은 용 일족 중 가장 늙고 강력한 존재.

    이 일곱 용군주 중 하나가 드디어 나에게 관심을 드러낸 것이다!

    ‘뭐,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 내가 그의 왼팔을 꺾은 셈이니….’

    나는 바짝 긴장했다.

    심연 속에 숨어 있는 고정 S+급 몬스터들이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름을 드러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 온 것은 처음이다.

    순간, 윤솔이 깜짝 놀라 외쳤다.

    “…어진아! 저기 위에!”

    나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저 위, 얼음 천장에 넓은 오로라가 출렁인다.

    츠츠츠츠츠츠-

    이내 거대한 홀로그램 환상이 내 눈앞에 구현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뜨겁게 불타고 있는 두 개의 눈동자였다.

    실로 거대한 두 개의 붉은 눈알, 그리고 그 주변은 밤하늘 중에서도 가장 깊고 어두운 자락을 잘라와 펼쳐 놓은 것 같다.

    마치 암흑 그 자체에 눈이 있다면 이런 모양새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광경.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장막 너머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는 존재가 격이 다른 존재임을!

    [너, 내 앞에 선 자야.]

    죽음룡 오즈가 입을 열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영상 속으로 마주보는 것뿐인데도 전신이 터져나갈 것 같다.

    아마 현실 세계의 내 몸은 캡슐 속에서 땀범벅이 되어 있으리라.

    한편.

    죽음룡 오즈는 나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리치 왕을 죽였더구나.]

    의외로 그는 별로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자 오즈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나는 곧 큰 전쟁을 앞두고 있도다. 다양한 인재들이 필요한 시점이지.]

    “…….”

    [내 휘하에 들어온다면 네가 죽여 없앤 리치 왕을 대신해 불사의 군단 좌익을 지휘할 권한을 주마. 어떠하냐?]

    오즈의 제안은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충성스럽던 부하를 죽인 자에 대한 증오나 적개심 따위는 좁쌀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기야, 조금 아끼던 개미 한 마리를 다른 개미가 물어 죽인 꼴이겠지.’

    잠시 눈여겨보던 개미가 다른 개미에게 죽었다고 해서 그 개미에게 화를 낼 인간은 딱히 없다.

    오히려 그 개미에 대해서 약간의 흥미가 생겼으면 생겼지 죽은 개미를 대신해 복수를 하겠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순간.

    내 눈앞에 퀘스트를 알리는 창이 떴다.

    -띠링!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나는 퀘스트 창을 열고 자세한 정보를 열람했다.

    <히든 퀘스트 ‘불사(不死)의 좌군단장’>

    <히든 퀘스트 발생 조건: 리치 왕을 처치한 자>

    <히든 퀘스트 완료 조건: ‘낮으신 분’의 제안 수락>

    <※거절할 경우 ‘낮으신 분’의 불쾌감이 엄습합니다>

    이 퀘스트는 유일하게 나에게만 주어졌다.

    윤솔과 드레이크는 내 옆으로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진아. 이 퀘스트 어딘가 느낌이 안 좋아.”

    “으음 어진, 내 생각도 그렇다. 이것을 수락한다면 그동안 중립을 지켜온 보람이….”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어. 오즈는 졸렬한 성격이거든. 거절하면 바로 죽는다.”

    뭐 사실 수락을 해도 결국 죽긴 죽을 것이다.

    오즈는 살아 있는 생명은 수하로 거두지 않으니 언젠가 나를 죽이려 들겠지.

    하지만 그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나는 손을 뻗어 ‘수락’ 버튼을 클릭했다.

    잭 오 랜턴 역시도 나의 선택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띠링!

    <히든 퀘스트 ‘불사(不死)의 좌군단장’을 완료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내 의사를 접수한 오즈는 두 눈을 천천히 끔뻑였다.

    [승리와 막대한 영예를 거머쥐게 될 것이다.]

    ‘…흥, 죽은 다음에 말이지?’

    내가 속으로 빈정거리고 있는 동안.

    츠츠츠츠츠…

    거대한 검은 얼굴의 환상은 천천히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내 상태창이 큰 변화를 겪었다.

    -<이어진>

    LV: 77

    호칭: 바실리스크 사냥꾼(특전: 맹독)  / 샌드웜 땅꾼(특전: 가뭄) / 어둠 대왕 시해자(특전: 선택) / 씨어데블 격침자(특전: 심해) / 대망자 묘지기(특전: 언데드) / 지옥바퀴 대왕게 잡이(특전: 백전노장) / 아귀메기 태공(특전: 잠복) / 크라켄 킬러(특전: 고생물) / 와두두 여왕 쥬딜로페의 펫(특전: 갹출) / 여덟 다리 대왕 참수자(특전: 불완전변태) / 리자드맨 학살자(특전: 징수) / 식인황제 시해자(특전: 1차 대격변) / 뒤틀린 황천의 생존자(특전: 절약) / 불사(不死)의 좌군단장(특전: 여벌의 심장)

    HP: 770/770

    레벨이 2 올랐다.

    그리고 ‘불사(不死)의 좌군단장’이라는 호칭이 새로 생겼다.

    이로 인한 특전은 ‘여벌의 심장’!

    동시에 내 앞에 리치 왕을 처치하고 난 보상이 주어진다.

    -<리치 왕의 심장> / 심장 / S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거리는 사람의 심장과 심장 사이의 거리인 것 같아.’

    -니콜라스 초퍼-

    -특성 ‘여벌의 심장’ 사용 가능 (특수)

    이 아이템은 작은 심장 모양을 하고 있다.

    ‘…내 심장이 이렇게 생겼군.’

    나는 펄떡이는 심장 고동을 느끼며 환희에 젖었다.

    드디어 그토록 갖고 싶었던 히든 피스를 얻고야 말았다!

    캡슐 속에 있는 내 원래 몸의 심장을 그대로 재현해 낸 아이템.

    정석적인 사용 방법은 리치 왕이 하던 것을 참고하면 되겠다.

    ‘…물론 그 외에도 무궁무진한 다른 활용법이 있지만 말이야.’

    이 아이템은 특이하게도 호칭과 연동되는 것으로 전 세계에 오로지 이 하나만 존재한다.

    당연히 내 팀원들인 드레이크와 윤솔에게는 기여도에 맞는 다른 보상이 주어졌다.

    ‘리치 왕 시해자(특전: 동상(凍傷)’

    공격시 강력한 빙결 데미지를 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오오, 이거 엄청나군! 이게 리치 왕의 클래스인가!”

    드레이크는 환희에 젖은 표정을 짓는다.

    일단 드레이크의 레벨은 65에서 단숨에 69로 올라갔다.

    레벨 50을 넘기고부터는 레벨 1당의 스탯 상승폭이 복리처럼 늘어난다.

    드레이크는 깃털처럼 가벼워진 자신의 몸에 크게 놀랐다.

    “체감 몸무게로는 한 3kg정도 되는 것 같군. 몸이 이렇게 가벼워지다니!”

    그뿐만이 아니다.

    아이템 역시도 좋은 게 떨어졌다.

    -<‘자질구래(磁質彀錸)’한 화살통> / 허리띠 / A+

    자석 자(磁), 바탕 질(質), 활 쏘기에 알맞을 거리 구(彀), 레늄 래(錸).

    양철 골렘의 코어를 깎아서 만들어 낸 화살통으로 자질구레한 것들을 담을 수 있다.

    -민첩 +10%

    -특성 ‘자동회수’ 사용 가능 (특수)

    레늄이라는 희귀 금속으로 되어있어서 열에도 강할 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화살들을 자동으로 수거해 오니 전투 중에도 화살이 떨어지는 일이 없다.

    S급 아이템은 아니었지만 궁수에게 있어서는 꼭 필요한 드림 아이템이다.

    이 아이템의 존재로 인해 궁수는 어마어마하게 좋은 직업으로 급부상하게 되니까.

    한편.

    “오오, 나도 레벨이 꽤 많이 올랐네?”

    윤솔도 자기 상태창을 보며 놀란다.

    그녀는 레벨 63에서 65로 올랐다.

    덤벼드는 키메라 사자를 황금상으로 만들어 버린 뒤 잭 오 랜턴에게 마무리를 넘겨서 그런가 레벨 상승폭은 조금 적었다.

    하린마루를 처치했을 때의 기여도까지 감안한다면 조금 아쉬운 수치였다.

    떨어진 아이템 역시도 조금 미묘했다.

    -<임모탈(immortal)> / 재료 / ?

    맨들맨들한 그 모습은 ‘불멸(不滅)’ 그 자체를 상징한다.

    정체불명의 검은 구슬 반쪽.

    윤솔은 그것을 받아들고 고개를 갸웃했다.

    “불멸의 구슬? 심지어 반쪽뿐이네.”

    하지만 오로지 나만은 알고 있다.

    이 레이드에서 가장 핵심적인 아이템은 사실 심장도, 화살통도 아닌 이것이라는 걸.

    “리치 왕은 불사의 군단에서 좌군단장을 맡고 있지. 나머지 반쪽은 우군단장인 데스나이트가 가지고 있을 거야.”

    합리적인 추론, 그리고 미래 지식을 뒤져도 올바른 정보이다.

    이 아이템은 이것 하나로는 의미가 없으니 나머지 반쪽을 모아야 한다.

    그러면 훗날 숨어 있는 진가가 드러날 것이리라.

    한편.

    […옛 친구여. 이제는 편히 쉬시게.]

    잭 오 랜턴은 텅 빈 얼음호수 바닥에 나뒹구는 양철 갑옷을 하나 하나 주워서 자신의 몸에 덧대고 있었다.

    강력한 서릿발이 어려 있는 양철 갑옷.

    하지만 그것을 입자 역설적으로 몸은 따듯해진다.

    텅 빈 가슴 속이 불덩어리를 삼킨 것처럼 뜨거웠다.

    잭 오 랜턴은 있을 리 없는 자신의 심장을 꽉 움켜쥐었다.

    [자네의 마음은 잘 알겠네. 그 유지는 내가 잇지.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겠어!]

    죽음룡 오즈.

    이 가증스러운 블랙 드래곤을 잡기 위해, 잭 오 랜턴은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음 목표는 데스나이트야. 질질 끌 것 없이 바로 가자고.”

    한국인의 종족 특성이 발동되는 순간이다.

    ‘빨리빨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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