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45화 (345/1,000)
  • 346화 여벌의 심장 (2)

    던전 ‘얼어붙은 부패’의 보스 몬스터 리치 왕.

    놈의 서식지는 지하 27층이다.

    그리고 이 던전은 총 28층, 그러니까 최종 보스인 리치 왕이 도사리고 있는 구역보다도 더 깊숙한 곳이 있다는 것이다.

    지하 28층의 최심부.

    …대체 무얼 하는 공간이기에 보스방보다도 더욱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것일까?

    나는 이곳에 들어오는 즉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띠링!

    <‘얼어붙은 부패의 끝’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최후의 층에 입장하자마자 보인 것은 제법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호수였다.

    어마어마한 혹한에도 불구하고 호수는 얼지 않는다.

    찬바람이 불 때마다 물 위로 진한 파문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이 호수의 특이점에 주목했다.

    붉은색!

    호수는 루비를 녹여 낸 것처럼 새빨간 색이었다.

    심지어 이 추위 가운데에서도 수면 위로 뜨끈뜨끈한 김을 피워 올리고 있는 모습이 경이롭다.

    “…이게 말로만 듣던 ‘불사조의 피’인가.”

    나는 허리를 숙여 호수를 이루고 있는 붉은 물을 한 움큼 집어 보았다.

    수면에 손을 담그자 느껴지는 끈적하면서도 묵직한 감각, 마치 금속이 녹아 액체 상태로 변한 것을 보는 듯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밀도와 수압(水壓).

    “‘고속재생’ 특성이 있는 불사조의 피를 이렇게나 모아 놨다면… 이 안에 무엇을 담가 놨을지는 뻔하겠네.”

    나는 고개를 들어 맑은 핏빛으로 찰랑이는 호수 중앙의 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과연 내가 찾던 것이 가라앉아 있었다.

    ‘심장(心臟)’

    리치 왕의 ‘심장(心腸)’

    펄떡대는 심장이 주변에 있는 불사조의 혈액을 힘차게 빨아들이며 요동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내가 위층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밑에!]

    이놈이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장본인일까?

    나는 알 수 없는 신비감에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리치 왕 이 자식. 심장을 이런 데다 숨겨 놓았으니 레이드 클리어가 불가능하지.”

    리치 왕은 ‘여벌의 심장’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게 바로 이 게임 속에 존재하는 최고의 사기 특성 중 하나이다.

    자신의 심장을 따로 빼서 안전한 곳에 숨겨 두고 포션을 항시 공급받을 수 있게 한다면 거의 무한에 가까운 체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리치 왕은 아까부터 이 방법으로 HP가 모두 소진될 위기에서 몇 번이나 벗어난 것이다.

    아무리 놈의 육체에 녹 데미지를 입혀도 소용없다.

    다른 곳에 숨겨져 있는, 본체라고도 할 수 있는 심장을 파괴하지 않는 한 놈을 물리치기란 요원한 일이다.

    “일단 저 호수에 들어가서 심장을 건져 와야….”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그 자리에서 파괴해 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호수로 접근했다.

    …하지만.

    쩌저저적!

    호수 근처로 가니 맹렬한 한파가 전신을 엘 듯 끼쳐 온다.

    리치 왕이 걸어 놓은 강력한 저주.

    꽁꽁 얼어붙어 있던 그것들은 내 몸의 온기에 격렬하게 반응했다.

    상태이상 ‘빙결’로 인한 도트 데미지가 내 몸을 갉아먹는다.

    마치 포를 뜨듯 살갗부터 슬슬 저며 들어와 뼛속까지 시리게 파고드는 냉기.

    이대로 가다간 몇 분도 채 버티지 못한다.

    나는 잽싸게 인벤토리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할로윈 구름과자> / A

    할로윈의 마녀들이 피우곤 하던 담배.

    지독한 마약성분이 있는 잎사귀를 건조한 뒤 빻아서 만든 것이다.

    -흡입 시 1초에 100의 HP 회복 (특수)

    -총 60분간 사용 가능 (특수)

    하린마루를 격퇴한 뒤 잭 오 랜턴에게 받은 보상 아이템.

    나는 그것을 입에 물고 아낌없이 뻑뻑 피웠다.

    입 밖으로 뿌연 담배연기가 아스라질 때마다 빙결 데미지로 깎여나간 HP가 조금씩 차오른다.

    첨벙!

    한파의 경계를 뚫은 나는 붉은 호수로 몸을 던졌다.

    불사조의 피는 마치 금속이 녹은 듯 뜨겁고 묵직했다.

    전 방향을 옥죄어 오는 강력한 수압에 전신이 짓눌려 으깨지는 기분.

    몹시도 답답한 심경이었지만 뜨거운 핏물에 몸을 담근 덕분에 빙결 상태에서는 벗어났다.

    이윽고.

    나는 붉은 호수 밑바닥에 있는 심장과 마주할 수 있었다.

    아직 거리가 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만들어내는 파문과 소리가 뚜렷하게 느껴진다.

    두근… 두근… 두근…

    한때 양철 나무꾼의 몸속에 있었을 가련한 심장.

    이것은 힘차게 약동하며 불사조의 혈액을 빨아들인다.

    그 뒤 펄떡거리는 혈관으로 저 멀리 있을 리치 왕에게 혈액을 공급하는 것이다.

    ‘빨리! 빨리!’

    나는 허우적거리며 전진했다.

    눈앞에 보이는 심장을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위층에 있는 동료들이 힘들어진다.

    하지만 마치 꿈속에서 움직이는 듯 둔한 몸놀림은 어찌할 수가 없다.

    불사조의 피는 그만치 무겁고도 부담되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콰쾅!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나는 수면 위로 고개를 빼어 뒤를 돌아보았다.

    두터운 얼음 문이 박살났다.

    얼음 부스러기들이 만들어 내는 자욱한 연기 너머로 무언가가 툭 튀어나왔다.

    리치 왕.

    극도로 분노한 이 괴물이 심장의 이변을 느끼고 나타난 것이다!

    “어진아! 보스가 갑자기 그리로 갔어! 조심해!”

    뒤에서 윤솔이 외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아마 내 동료들은 리치 왕이 만들어 낸 소환수와 싸우고 있는 모양이다.

    쩌저저저적!

    리치 왕은 나를 향해 맹렬한 서릿발을 퍼부어 댔다.

    날카로운 얼음 가시들이 날아와 나와 심장의 사이를 가로막는다.

    츠츠츠츠츠…

    불사조의 피는 얼음가시들을 순식간에 삼켜 버렸고 이내 한 줌 온수로 녹여 버렸다.

    하지만 얼음 가시들은 계속해서 대포알처럼 날아들고 있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거의 다 잡은 심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쿠르륵!

    리치 왕은 바람마법을 캐스팅했다.

    이건 효과가 있었다.

    적어도 나를 방해하는 데는.

    와류(渦流).

    맹렬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호수에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그 힘에 의해 나는 자연스럽게 심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됐다.

    “…큭!”

    나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더 깊게 잠수했으면 리치 왕의 심장을 파괴할 수 있었는데! 실로 아깝고도 원통한 일이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나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파팟…!

    내 상태창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작은 변화가 관측된다.

    -<이어진>

    LV: 75

    호칭: 씨어데블 격침자(특전: 심해)

    HP: 750/750

    수많은 호칭들 중 유난히 이 호칭만 밝게 빛난다.

    씨어데블을 잡고 얻었던 패시브 특성인 ‘심해’!

    가뜩이나 수압이 높은 불사조의 피에 리치 왕이 만들어 낸 와류까지 더해지자 주변의 압력이 미친 듯이 올라갔고 그 덕에 심해 특성이 발현되어 버린 것이다!

    “오오오오!?”

    나는 순식간에 뻥튀기되는 스탯들을 느끼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전신을 짓누르던 압력들이 이제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사정없이 끌려가기만 하던 상황이 대번에 역전되었다.

    파팍!

    나는 다시 수면 아래 몸을 파묻고는 전면에 있는 심장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눈앞에 있는 심장은 마치 나를 유혹하는 듯 낮고 은밀한 소리로 자신의 고동(鼓動)을 전해 온다.

    “뒈져라!”

    나는 온 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뿌욱!

    펄떡펄떡 뛰는 심장의 정중앙에 깎단을 쑤셔 박아 버렸다.

    순간!

    쿠르르르륵…!

    피 거품이 맹렬하게 일어난다.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듯 요동치던 수류가 어느덧 잠잠해졌다.

    […크학!?]

    저 멀리서 바람을 일으키던 리치 왕의 허리가 ㄱ자로 꺾였다.

    바람 마법이 강제로 중단되었고 그 때문에 피의 연못에 휘몰아치던 회오리도 사멸했다.

    후욱!

    뜨듯한 물살이 나를 확 떠밀었다.

    나는 그 바람에 심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날아가야 했다.

    ‘…아직이다!’

    나는 실눈 사이로 심장을 노려보았다.

    깎단에 찔려 구멍이 나긴 했지만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다.

    의외로 높은 심장의 HP 때문에 도트 데미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모양.

    완전히 파괴하기 위해서는 마동왕 메타로 변해 주먹을 몇 방 추가로 갈겨 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콰쾅! 펑!

    내 앞으로 뛰어들어 오는 거구의 덩치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오오-오오오오!]

    리치 왕, 놈은 정말로 급했던 모양이다.

    피 웅덩이로 직접 뛰어들어 내 앞에 도끼날을 들이밀 정도이니 말이다.

    “어진아!”

    뒤에서 윤솔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윤솔, 드레이크, 잭 오 랜턴이 지하 28층의 문으로 뛰어 들어온다.

    아마 리치 왕의 하수인들을 모두 처치한 모양.

    하지만 동료들이 나에게 오기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다.

    [크아아아악!]

    리치 왕은 자신의 몸을 도외시한 채 나에게 도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저놈을 멋지게 회피해 뒤에 있는 심장을 파괴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지금의 리치 왕은 몸에 녹도 슬어 있지 않은 상태다.

    히드라를 내보내 볼까 했지만 리치 왕의 도끼를 상대로는 1초도 버티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 그 찰나의 순간!

    [뿌앵!]

    전혀 뜻밖의 지원군이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다.

    내 품 속에서 튀어나온 쥬딜로페가 리치 왕을 향해 앙증맞은 손가락을 쭉 뻗은 것이다.

    “으앗!? 너 왜 그래! 얼른 다시 들어가!”

    나는 기겁을 하며 쥬딜로페를 말렸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리치 왕을 노려볼 뿐이다.

    순간.

    부웅-

    내 귓가를 스쳐가는 작은 바람소리가 있었다.

    [……?]

    리치 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놈은 나를 향해 도끼를 휘두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부우우우웅! 위이이잉!

    어마어마한 수의 풍뎅이들이 이내 리치 왕의 전신 관절에 바글바글 꼬여 있었기 때문이다!

    <싸락우박 풍뎅이> -등급: C+ / 특성: 하수인, 과식, 맹독, 빙결

    -서식지: 가혹한 설산, 얼어붙은 부패, 빙하숲 ‘고대 보존지대’

    -크기: 0.1m.

    -하잘 것 없는 작은 벌레처럼 보여도 대격변을 버티고 살아남은 강력한 고대 충왕종 몬스터이다.

    얼음굴을 걸어가다가 난데없이 우박이 쏟아진다면 십중팔구 이 녀석들임에 분명하다.

    지하 14층에서 만났던 골치 아픈 벌레들.

    레벨이 높아 쥬딜로페의 포자에 감염되지 않았던 풍뎅이들이 지금 그녀의 명을 따라 리치 왕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띠링!

    <여왕이 ‘싸락우박 풍뎅이’를 가신으로 삼고자 합니다>

    <상대의 레벨이 너무 높습니다!>

    <가신화(家臣化)에 실패했습니다>

    <여왕의 의지가 생각보다 강력합니다>

    <여왕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왕은 꾸준한 성격입니다>

    ‘맞다, 여왕의 의지는 꾸준하지!’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쥬딜로페는 땡깡을 피웠는지 그간 경험치를 올렸는지 하여간 어떻게든 풍뎅이들을 조련해 낸 것이다!

    (일전에 나에게 그랬듯이 말이다)

    [오오오오!]

    리치 왕은 관절마다 달라붙는 풍뎅이들의 수에 당황해 순간이나마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는 절호의 찬스였다.

    …팟!

    나는 그대로 바닥을 박찼다.

    그리고 풍뎅이들에 둘러싸여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리치 왕의 겨드랑이 밑을 통과해 놈의 뒤로 내달렸다.

    심장.

    그것은 피의 연못 중앙 바닥에 파인 홈에 쏙 들어가 있었다.

    시뻘건 고깃덩이.

    뿌리처럼 뻗어나간 힘줄 끝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혈액을 빨아먹고 있던 놈.

    차착!

    나는 마동왕 메타로 변신한 채 두 손으로 리치 왕의 심장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쿠르륵…!

    내 두 손아귀에서 지진과 와류의 힘이 꿈틀거린다.

    뿌지직!

    두꺼운 가죽이 찢어지는 소리.

    빠바바방!

    내 손 안에 들어온 심장이 처참한 모습으로 박살났다.

    산산조각.

    리치 왕의 심장은 수천 조각의 육편(肉片)이 되어 피의 연못에 흩날렸다.

    [그-아아아악!]

    부글거리는 핏물 속에 잠긴 리치 왕이 해묵은 비명을 토해냈다.

    고통과 증오, 슬픔에 못 겨워 지르는 단말마(斷末魔).

    [……!]

    그것을 들은 잭 오 랜턴의 눈빛이 파르르 떨린다.

    ‘나는 심장이 없다네 잭. 아픈 걸 느끼지 못하지. …그러니 어서 가게!’

    죽음룡 오즈와 최후의 대결을 펼칠 때 들었던 믿음직스러운 대사.

    마지막으로 남은 그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기억났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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