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44화 (344/1,000)
  • 345화 여벌의 심장 (1)

    양철(洋鐵)

    [명사] 안팎에 주석을 입힌 얇은 철판.

    산화되는 환경에 따라 실험값이 달라지지만 으레 녹이 스는 속도가 빠른 편이다.

    *       *       *

    우뚝…!

    날뛰던 리치 왕이 일순간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잠잠해진다.

    끼…걱… 끼걱… 까기긱…!

    소음은 리치 왕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나고 있었다.

    마치 뾰족한 것으로 금속판을 긁어 대는 듯한 소리.

    “…걸렸군.”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리치 왕의 전신 구석구석을 살폈다.

    자욱한 물안개 너머, 리치 왕의 양철 갑옷에 송글송글 맺힌 이슬들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습기가 축축하게 맺힌 부분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질적인 색깔 하나가 보인다.

    갈색.

    그렇다. 그것은 녹(綠)이었다!

    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

    “후후후후후! 어떠냐! 상태이상 ‘녹’이다!”

    리치왕의 갑옷은 방어력이 뛰어난 대신 특정 상태이상에 약하다.

    미국 작가 프랭크 바움이 저술한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

    이 동화에 나오는 양철 나무꾼이 툭하면 몸에 녹이 슬어 늘 기름칠을 해야 한다는 것은 유명한 설정이다.

    죽음룡 오즈를 목표로 했던 도로시 원정대 역시도 이 동화에서 모티프를 따서 만들어졌는데 원작 고증에 철저한 개발자들의 섬세한 설정놀이가 리치 왕에게도 적용되어 있는 것이다.

    끼기기긱… 기긱!

    리치 왕의 전신, 특히나 관절 부분에는 까끌까끌한 갈색의 덩어리가 끼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로 번져 가는 녹!

    자연히 온몸이 양철로 되어 있는 리치 왕은 움직임이 둔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어기적어기적 움직이는 리치 왕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후후후. 얼음이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는 동안 자욱해진 습기와 대기의 격렬한 팽창, 수축으로 인해 발생하는 거센 대류현상은 네 몸의 산화작용을 촉진시키지. 거기에 금속 자체가 가열되고 냉각되는 동안 열에 의한 피로한도가 점차 축적되었을 것이다. 부식을 방지하지 위한 주석 코팅도 소용없어. 애초에 이런 추운 곳에 있을 거였다면 이런 환경적 변화에 대비해서 양철 말고 니켈을 썼어야지. 아니면 WD라도 항시 구비해놓….”

    하지만 설명충처럼 주절거릴 시간이 없다.

    후욱!

    리치 왕이 시퍼런 숨결을 토해 냈다.

    놈은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손에 든 도끼를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어림없지.”

    드레이크에 의해 리치 왕의 공격은 봉쇄되었다.

    핏- 따앙!

    화살 한 대가 쏜살같이 날아 리치 왕의 투구를 때린다.

    그러자.

    와사사사삭…

    리치 왕의 투구에 엄청난 속도로 녹이 번지기 시작했다.

    마치 배고픈 벌레들이 썩은 고기에 몰려드는 것 같은 광경.

    나는 그것을 보고 손뼉을 쳤다.

    “역시. 배드엔딩의 몸은 쇠붙이를 녹슬게 하는군.”

    드레이크가 예전부터 투덜거려 오던 것이 지금 이 순간에는 절호의 찬스가 되었다.

    핑- 따앙! 따앙! 땅!

    드레이크는 리치 왕의 관절 부분을 노려 계속해서 화살을 발사했고 그럴 때마다 양철에 슬어 가는 녹은 점점 심하게 창궐한다.

    결국.

    내가 예상한 대로 쉬는 시간이 왔다.

    쿵…!

    리치 왕은 도끼를 내려놓더니 뒤로 돌아 천천히 옥좌로 향했다.

    녹슨 몸으로는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게 1페이즈가 끝났다.

    “휴유…”

    “이제 한숨 돌렸군.”

    윤솔과 드레이크가 쉬는 시간 동안 숨을 돌린다.

    하지만.

    “아니야! 쉬는 시간이 아니라 역습 타이밍이다!”

    나는 재빨리 리치 왕에게로 달려 나갔다.

    내가 향한 곳은 리치 왕이 아니라 리치 왕이 가는 곳.

    바로 ‘얼어붙은 왕좌(Frozen throne)’다!

    왕좌 옆에는 작은 옹달샘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이 극도의 추위 속에서도 얼지 않는 누런 액체가 퐁퐁 솟아나고 있었다.

    기름.

    리치 왕은 기름샘에서 기름을 길어 자신의 몸에 칠할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Fire in the hole!”

    내가 한발 빨랐다.

    나는 잭 오 랜턴에게서 얻어 온 불길을 그대로 기름샘에 처박았다.

    쿠르르륵!

    …기름 같은 걸 끼얹나?

    옹달샘이 불탄다.

    콰콰콰콰쾅!

    기름이 가득 고여 있던 옹달샘은 내가 당긴 불씨 한 방으로 폭발해 버렸다.

    한편.

    [……!]

    리치 왕은 그것을 보며 크게 당황했다.

    나는 화광에 젖은 미소로 리치 왕을 반겼다.

    “기름이 다시 차오르려면 다음 페이즈까지는 기다려야 할 텐데. …어쩌나?”

    나의 빈정거림을 들은 리치 왕은 크게 분노한 표정으로 도끼를 움켜쥔다.

    하지만.

    […니콜라스여!]

    심장을 토해 내듯 절규하는 목소리가 나와 리치 왕의 사이를 가로막는다.

    바로 잭 오 랜턴이었다!

    그는 성난 사자와도 같은 움직임으로 리치 왕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에 굳게 쥔 대낫을 짧게 당겨와 리치 왕의 목에 걸고 말했다.

    [너에겐 분명 동료를 생각할 때 내뿜던 따스한 숨결이 있었다! 떠나보낸 약혼녀를 생각할 때면 얇은 판금 밑에서 펄떡거리던 심장이 있었단 말이다! 정신 차렷!]

    말을 마친 잭 오 랜턴은 리치 왕의 갑옷과 투구가 만나는 지점에 대낫의 끝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빠가가가각…!

    그간 가열과 냉각을 수없이 반복한 결과일까?

    잔뜩 녹슬은 양철 갑옷이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리치 왕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얼어붙은 갑옷 속에 꽁꽁 감추어졌던 양철 나무꾼의 진짜 몸이!

    그 순간.

    “……!”

    “……!”

    “……!”

    [……!]

    나와 윤솔, 드레이크, 심지어 잭 오 랜턴마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가슴이 세로로 쪼개진 리치 왕.

    그의 가슴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텅 빈 추위, 차갑게 얼어붙은 공허만이 어둡게 자리한 갑옷 속.

    그것을 본 잭 오 랜턴은 두 눈에서 피와 같이 붉은 불길을 뚝뚝 떨어트렸다.

    [낮으신 분이여! 너는 이 나무꾼의 한 줌 남은 온기마저 긁어간 것이냐! 오오, 오즈여! 필히 멸해야 할 자여!]

    말을 마친 잭 오 랜턴은 대낫을 들어 리치 왕의 몸에 더욱 더 깊숙하게 박아 넣었다.

    바로 그 순간.

    […에.]

    나는 어디선가 아스라지는 작은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윤솔에게도, 드레이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분노와 슬픔에 눈이 먼 잭 오 랜턴 역시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에!]

    오로지 나, 나에게만 들려오는 소리였다.

    ‘…뭐지?’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지난 미래 지식을 아무리 떠올려 봐도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는 말은 없었다.

    ‘분명 최초 클리어를 한 랭커들의 인터뷰에는 이런 말이 없었는데?’

    엄청나게 방대한 분량의 인터뷰, 그 자세하고 세밀한 공략과 분석들을 모조리 암기하고 있는 나이지만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본 바가 없었다.

    ‘뭐, 그들도 사람이니 놓치는 부분이 있었을 수도 있지. 당황할 것 없다.’

    소리가 들리던 들려오지 않던 간에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는 리치 왕을 처치할 방법을 미리 알고 있는 상태에서 레이드를 시작한 것이니까.

    나는 리치 왕의 옥좌 뒤편을 향해 눈을 빛냈다.

    그곳에는 밑으로 내려가는 마지막 비밀통로가 존재한다.

    그렇다.

    리치 왕이 있는 보스방, 이곳의 현재 위치는 지하 27층.

    하지만 이 던전은 애초에 28층으로 되어 있는 구조다.

    ‘즉, 숨겨진 지하층이 하나 더 있다는 소리지.’

    나는 고개를 들어 리치 왕을 돌아보았다.

    이 불멸의 언데드는 역시나 내가 생각했던 대로의 공격 패턴을 선보이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잭 오 랜턴에 의해 무너지던 리치 왕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동시에.

    츠츠츠츠-

    리치 왕의 전신에 붉은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드레이크가 기겁을 하며 외쳤다.

    “어엇!? HP가!?”

    리치 왕의 체력은 놀라운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전신에 꼈던 녹도 사라지고 지금까지 착실하게 떨어지고 있던 HP 역시 순식간에 만땅 상태를 향해 달려간다.

    그야말로 새롭게 태어난 듯한 몸!

    …콰쾅!

    리치왕은 도끼를 휘둘러 자신의 몸 위에 달라붙어 있던 잭 오 랜턴을 저 멀리 내팽개쳤다.

    그리고 쏘아져 오는 드레이크의 화살들 역시도 전부 도끼로 후려쳐 날려 버렸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파앗! 파앗! 파앗!

    리치 왕에게는 ‘소환’ 특성이 있다.

    놈은 HP를 회복하는 동안 땅에 마법진을 그리더니 세 마리의 소환수를 불러냈다.

    <허수아비 ‘영혼추수자’> -등급: A / 특성: 어둠, 하수인, 백전노장, 뺑소니, 1:1, 싸움광

    -서식지: 은밀한 꼭두각시 회동, 얼어붙은 부패 ‘끝자락’

    -크기: 4.4m

    -보통 허수아비는 적을 쫓아버리기 위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커다란 낫을 들고 다니는 이 허수아비는 일반적인 허수아비와는 달리 적을 쫓아가게끔 만들어졌다.

    악취가 풀풀 나는 짚단 속에는 무엇이 들어가 썩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양철 골렘> -등급: A / 특성: 암석, 하수인, 팔랑귀, 반전, 만근추

    -서식지: 무통증 협곡, 얼어붙은 부패 ‘끝자락’

    -크기: ?m

    -100% 양철로만 만들어진 거인. 구성 재료만 놓고 보면 비효율적으로 제작된 골렘이지만 리치 왕은 어째서인가 이 감정 없는 철 덩어리를 꽤나 아끼는 듯하다.

    <키메라 사자> -등급: A / 특성: 어둠, 하수인, 야수, 백전노장, 끓어오르는 피, 선택

    -서식지: 죽음골짜기 ‘깊은 곳’, 얼어붙은 부패 ‘끝자락’

    -크기: 4.4m

    -사자의 몸에 곰의 앞발, 뱀의 꼬리,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융합형 야수.

    자연적으로 발생한 몬스터는 아니며 진화 출처를 짐작할 길 없는 이상한 생물체이다.

    먼 옛날 ‘수인국’이 멸망한 이후 이런 타입의 몬스터들이 부쩍 많이 출몰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있다.

    허수아비, 양철 거인, 사자.

    세 마리의 괴물이 우리들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것들을 본 잭 오 랜턴은 탄식을 내뱉었다.

    [오오, 옛 친구여. 자네는 아직도 예전의 우리를 그리고 있는가. 하면 어째서… 어째서 나를 향해 도끼를 들이민단 말인가. 그 시절 자네의 마음, 심장은 대체 어디에 떨어져 있는가…]

    바로 그 순간.

    […에!]

    또 한 번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정확했다.

    […밑에!]

    오로지 나만은 또렷하게 들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얼음 바닥 아래, 저 깊고 아득한 아래층에서부터 단단한 얼음층을 꿰뚫고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윤솔과 드레이크, 그리고 잭 오 랜턴에게 말했다.

    “친구들. 1분만 버텨 줘.”

    내 부탁을 들은 모두는 이유를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윤솔이 사자를, 드레이크가 양철 골렘을, 잭 오 랜턴이 허수아비를 막아섰다.

    리치 왕이 HP를 회복하고 있는 동안 3:3 구도가 어느 정도 안정화되었다.

    파팟!

    나는 이내 온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밑.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던전 최하층.

    리치 왕의 모든 비밀이 담겨 있는 28층의 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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