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42화 (342/1,000)
  • 343화 오즈의 마법사 (3)

    […정신을 차리고 나니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잭 오 랜턴은 담배연기를 훅 뿜어냈다.

    눈에서 나오는 호롱불에 물든 연기가 대기 중에 붉게 번진다.

    [불도, 죽음도, 오즈도, 그리고 동료들도 모두 사라졌어.]

    시간이 얼마나 지난 지도 알 수 없었다.

    잭 오 랜턴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자신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만이 모래 위에 길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 기억은 도로시가 내게 외쳤던 말이었지. 오즈가 감행하는 최후의 공격을 앞두고, 그녀는 내게 ‘뇌를 빼 호박머리 잭!’ 이라고 말했어. 아무래도 자신의 마지막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야.]

    잭 오 랜턴은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도로시의 말을 들은 나는 서둘러 머릿속에 든 것들을 빼냈어.]

    여행 도중 도로시가 직접 구워 줬던 호박파이…

    양철 나무꾼이 주워 줬던 예쁜 도토리…

    겁쟁이 사자가 목에 걸어 주었던 풍성한 사자갈기 목도리…

    [그 모든 추억들을 머릿속에서 모두 빼내는 순간, 마치 촛불이 꺼지듯 내 기억도 끊겼지.]

    잭 오 랜턴은 자신이 정신을 되찾은 것이 순전히 우연이라고 말했다.

    한 새가 자신의 지푸라기 머리 안에 알을 낳았을 때, 머릿속이 채워지며 ‘생각’이 돌아온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의식 없이 오랜 세월을 떠돌아다녔던 모양이야. 버려진 달력을 보니 이미 까마득한 시간이 지나 있더군.]

    세상은 잭 오 랜턴을 수백 년 전 어딘가에 내려놓고 먼저 출발해 버렸다.

    ‘…다들 어디에 있어?’

    잭 오 랜턴은 동료들을 애타게 부르며 온 세상을 헤맸다.

    하지만 언제나 유쾌하고 다정하던 도로시도, 무뚝뚝하지만 늘 궂은일을 솔선수범해서 도맡던 양철 나무꾼도, 귀엽고 배려심이 깊은 겁쟁이 사자도 간 곳 없었다.

    도로시가 살던 마을은 토사에 휩쓸려 까마득한 지저에 파묻혔고 양철 나무꾼이 살던 숲은 황무지 사막이 되었으며 겁쟁이 사자가 살던 나라는 멸망한 지 오래였다.

    잭 오 랜턴은 비통한 심경으로 절규했다.

    그때 뇌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자책하면서.

    그 이후부터는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발길 닿는 곳으로 그저 흘러가는 나날.

    그러던 도중 잭 오 랜턴은 용도 악마도 없는 중립지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솔로몬의 성’이었지. 지금은 어찌된 영문인지 ‘악의 고성’으로 불리는 모양이지만….]

    잭 오 랜턴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지혜로운 왕 솔로몬은 나에게서 용의 냄새를 맡은 모양이야. 분쟁의 싹이 될까 두려워한 그는 나를 지하감옥에 봉인했고 나는 끝없는 악몽과 자책에 빠져 괴로워했어. 그러다가 머릿속에 들어 있던 새알이 썩어 문드러지는 바람에 또다시 기억이 사라져 버렸지.]

    말을 마친 그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어. 눈을 뜨니 성주인 솔로몬은 악에 물들어 있었고 내 눈앞에는 너희들이 있더군.]

    그렇다.

    나는 잭 오 랜턴을 깨워 낸 뒤 바로 어둠 대왕을 잡으러 갔었다.

    그리고 우리와 길이 갈린 잭 오 랜턴은 ‘낮으신 분’ 죽음룡 오즈를 찾아간 것이다.

    “…그 뒤 하린마루에게 패해 이곳에 얼어붙어 있었던 것이겠지.”

    내 말을 들은 잭 오 랜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굳은 의지를 담아 말했다.

    [그래서 나는 오래 전 하차했던 복수길에 다시 오른 것이다. 그때 도로시가 내가 일러 주었던 전략대로 말이야.]

    용사 도로시는 죽음룡 오즈에 직접적으로 맞서기 전에 먼저 오즈의 부하들 먼저 제거하는 전략을 취했다.

    잭 오 랜턴 역시 오래 전 도로시의 공략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풍문을 듣자하니 ‘낮으신 분’은 악마성좌와의 전쟁을 앞두고 새로운 인재들을 대거 영업했다지. 불사의 군단을 이끄는 좌군단장 ‘리치 왕’과 우군단장 ‘데스나이트’가 바로 그것들이다.]

    잭 오 랜턴의 말이 맞다.

    일전에 폭룡 모르그마르와 폭식의 성좌 벨제붑이 ‘여덟 다리 대왕 큘레키움’을 영입하기 위해 왔었던 것, 그리고 탐욕성좌 마몬이 ‘고대 정령 고르딕사’를 타락시켰던 것을 생각하면 다른 고정 S+급 몬스터 역시 유능한 부하들을 얻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턱을 짚었다.

    ‘리치 왕’과 ‘데스나이트’는 대격변 이후 추가된 몬스터.

    죽음룡 오즈가 특별히 영입해 올 정도로 강한 엘리트 몬스터이다.

    천하의 하린마루가 중간보스로 있는 던전의 진(眞) 보스일 정도이니 그 난이도가 어떨지 짐작이 된다.

    이윽고.

    [크르릉…!]

    서리 늑대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정확하게 혹한과 더욱 심한 혹한이 마주해 뒤섞이는 경계구역.

    우리는 늑대들을 타고 온 덕분에 비교적 빠르게 지하 27층의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늑대들은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다 주고는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나는 늑대들의 머리와 턱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의 신호였다.

    늑대들은 내게 허락을 구하자마자 빠르게 원래의 서식지로 돌아갔다.

    “아쉽네. 그간 정들었는데.”

    윤솔이 늑대들을 보며 코를 훔친다.

    하지만 C+등급의 몬스터들은 앞으로 펼쳐질 던전의 가혹한 생태계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게 분명하니 이쯤에서 돌려보내는 게 맞으리라.

    나는 모두를 이끌고 문 앞에 섰다.

    “자, 이제 들어가 볼까?”

    지하 27층으로 진입하는 길.

    거대한 철문 너머에 리치 왕이 있을 것이다.

    콰쾅!

    나는 주먹으로 철문을 때려 부순 뒤 안으로 진입했다.

    -띠링!

    <‘얼어붙은 부패 끝자락’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보스 방!

    드디어 리치 왕이 있는 구역에 진입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27층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어마어마한 환영인파가 몰려나왔다.

    …쿵! …쿵! …쿵! …쿵!

    천장에서 얼어붙은 관들이 세로로 떨어져 내린다.

    그것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기에 우리는 이리저리 도망 다녀야 했다.

    콰쾅! 덩그렁!

    단단한 얼음바닥에 떨어진 관은 그 충격에 의해 뚜껑이 떨어져 나갔다.

    이내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냉동 흡혈귀> -등급: A / 특성: 어둠, 하수인, 백전노장, 혈액포식자, 내성발톱

    -서식지: 얼어붙은 부패

    -크기: 2m.

    -리치 왕이 전쟁 시를 대비해 지하에 얼려 둔 뱀파이어 병사로 흡혈귀들 중에서도 유독 강하고 피를 많이 마시던 이들로 이루어졌다.

    주인이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 해동되어 날뛸 준비가 되어있다.

    하나같이 생전에 강력한 몬스터였던 놈들.

    관에서 튀어나온 흡혈귀들이 막 해동된 인스턴트처럼 강렬한 냄새와 비주얼로 우리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크르르륵…!]

    놈들은 기형적으로 발달된 송곳니와 손톱을 빼들었다.

    공격력을 극대화하기 위함일까?

    이빨은 잇몸의 위치를 가리지 않고 툭툭 불거져 나왔고 손톱은 손가락 끝에 두 개씩 달려 있었으며 심지어 손가락 사이사이에도 다닥다닥 돋아나 있었다.

    “생긴 건 혐오스럽지만…그래 봐야 A급 몬스터지. 간만에 실력행사다!”

    나는 반지를 쓰다듬어 히드라를 불러냈다.

    그리고 잭 오 랜턴을 옆에 둔 채 앞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어진아! 서포트할게!”

    “엄호는 내게 맡겨라.”

    윤솔과 드레이크가 내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흡혈귀들의 라인을 밀어붙인다.

    그중에서도 단연 잭 오 랜턴의 솜씨가 일품이었다.

    쩍…! 쩍…! 쩍…! 쩌억…!

    마치 낱알을 추수하는 농부처럼, 잭 오 랜턴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흡혈귀 십 수 마리의 목을 앗아간다.

    [쉬이이익!]

    히드라 역시도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마법과 독이 통하지 않는 히드라는 흡혈귀와 상성이 좋다.

    동급의 몬스터이지만 능히 몇 배나 되는 적을 막아 낼 수 있었다.

    [우아앙!]

    쥬딜로페 역시 나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열심히 포자를 뿌려 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신하인 나에게 여왕의 위엄을 세워 보이고 싶은 모양.

    하지만 상대가 곤충이랑은 전혀 상관이 없는 몬스터인 만큼 효과는 제로였다.

    쥬딜로페는 이번에도 뾰로통하게 튀어나온 입술로 내 품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어진! 앞으로!”

    드레이크가 달려드는 흡혈귀들의 머리에 화살을 박아 넣으며 외쳤다.

    윤솔도 신성불가침 특성을 발현하여 수많은 흡혈귀들을 무릎 꿇린다.

    두 친구의 든든한 지원사격을 등에 업었으니 거리낄 것이 없다.

    나와 잭 오 랜턴은 재빨리 앞으로 내달렸다.

    보스가 도사리고 있는 최후의 구역 ‘끝자락’으로!

    *       *       *

    넓은 얼음광장이 보인다.

    바로 위인 26층보다도 훨씬 더 춥고 가혹한 공기가 꽉 차 있는 제전.

    저 너머에 높게 치솟은 옥좌가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고독하게 앉아있는 실루엣도.

    누군가 옥좌에 걸터앉은 채 하얀 서리로 뒤덮여 있었다.

    강시(殭尸)!

    마치 옥좌에 얼어붙은 채 죽은 이를 보는 것 같았다.

    <리치 왕> -등급: S / 특성: 어둠, 언데드, 하수인, 소환, 지진, 동상(凍傷), 여벌의 심장

    -서식지: ‘얼어붙은 부패 끝자락’

    -크기: 4m.

    -‘나는 심장이 없다네 잭. 아픈 걸 느끼지 못하지. 그러니 어서 가게.’

    -니콜라스 초퍼-

    리치 왕!

    최강의 언데드 쌍두마차 중 하나.

    검은 용 오즈의 왼팔을 맡고 있는 초엘리트 몬스터의 등장이다.

    그때 잭 오 랜턴이 문득 내게 물었다.

    [너. 리치 왕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글쎄, 딱히? 그러는 너는?”

    […나 역시도 정보가 없군. 그래서 묻는 거야.]

    내가 아는 건 리치 왕이 미래 지식이 없었다면 공략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높은 난이도의 보스라는 사실이다.

    이윽고.

    나와 잭 오 랜턴은 달려드는 흡혈귀 잔당들까지 전부 처리하고 난 뒤 드디어 리치 왕이 앉아 있는 옥좌 앞에 섰다.

    얼음 속에 잠들어 있는 리치 왕의 모습이 보인다.

    양철로 된 갑옷과 투구, 길게 흘러내린 백색의 머리카락.

    손에 굳게 쥐여 있는 것은 마법사의 지팡이처럼 길면서도 광전사의 할버트처럼 육중한 도끼날이었다.

    우지직…!

    우리가 일정 거리 안으로 진입하자 리치 왕을 얼어붙게 만든 봉인이 풀린다.

    요란한 알림음들이 내 고막을 연신 두들기고 있었다.

    -띠링!

    <녹지 않는 얼음이 부서집니다>

    <‘끝자락 왕좌’가 해금되었습니다>

    <‘얼어붙은 것들의 왕’이 몸을 일으킵니다>

    이내, 해금된 상태의 리치 왕이 옥좌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뒤 나를 내려다보았다.

    번쩍!

    얼굴 전체를 가린 양철 투구 사이에서 시퍼런 불꽃이 피어오른다.

    영원한 얼음을 헤치고 나온 언데드 최고존엄의 시선이 내 눈알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

    그 오연한 시선을 마주한 잭 오 랜턴은 옥좌 밑에 선 채 얼어붙었다.

    어스름한 불빛을 품고 있는 호박 가면 속에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양철 나무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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