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중간지대의 괴물 (4)
좀도둑 잭 오 랜턴.
그는 불카노스로 만들어진 대낫을 들고 하린마루의 앞에 섰다.
설욕전(雪辱戰).
그는 엄청난 복수심으로 무장한 채 눈앞에 있는 악귀를 올려다보았다.
휘이이이이잉…
이내, 흰 장막처럼 펄럭거리는 눈보라를 뚫고 네 개나 되는 거대한 뿔이 튀어나왔다.
압도적인 피지컬의 S등급 몬스터!
[우-워어어어!]
하린마루가 날뛰기 시작했다.
놈은 잭 오 랜턴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벌써부터 발을 굴러 지진 데미지를 보낸다.
콰지지지지직!
옅게 낀 서리, 살얼음들뿐만 아니라 단단하게 얼어붙었던 두터운 얼음층들까지도 죄다 박살 났다.
발 한번 구르는 것만으로도 광역을 초토화시켜 버리는, 과연 악귀타입 몬스터의 정점(頂點)다운 파괴력.
하지만.
[…큭큭큭. 이번에는 어림없다.]
잭 오 랜턴은 마치 투명한 계단이라도 밟는 듯한 동작으로 사뿐사뿐 허공을 내딛어 지진 데미지를 피해 버렸다.
‘할로윈’ 특성.
몸 전체가 ‘마녀의 지푸라기’로 만들어진 잭 오 랜턴은 너무나도 가벼워 평소에도 허공에 약간 떠 있을 정도이다.
당연히 지진 등 땅 타입의 광역기술의 데미지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번쩍!
잭 오 랜턴의 대낫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무시무시한 참격이 날아가 하린마루의 가슴팍을 장작 쪼개듯 두들긴다.
콰콰쾅!
곳곳으로 살점 조각이 튀며 시커먼 핏물이 비산했다.
하지만 극도의 추위 때문에 핏물은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즉시 그대로 얼어붙었고 마치 검은 성게들이 상처 부위에 다닥다닥 모여 있는 듯한 기괴한 광경이 되었다.
[오오-오오오오!]
하린마루는 샌드웜의 대가리로 된 오른팔을 뻗어 잭 오 랜턴이 서 있던 대지를 두들겼다.
키이이이잉…!
수 억 개나 되는 기형 이빨이 회전하며 모든 것을 분쇄하고 있었다.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던 눈 언덕이 순식간에 모습이 변한다.
마치 찰흙덩이처럼 푹푹 패이는 지형.
[…큭큭큭, 여전하군.]
잭 오 랜턴은 허공을 몇 번 박차고는 뒤로 물러났다.
A+등급 몬스터들 중 개체값 최상위권에 속하는 ‘잭 오 랜턴’
VS
S등급 몬스터들 중 개체값 최하위권에 속하는 ‘하린마루’
하지만 아무리 동 등급 내 개체값 표준점수가 다르다고는 해도 등급은 엄연한 것이다.
A+급과 S급은 나뉘어 있는 이유가 있고 둘의 격차는 명확하다.
콰쾅!
공성병기처럼 휘둘러지는 하린마루의 주먹!
그것에 정통으로 맞은 잭 오 랜턴이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큭!]
잭 오 랜턴이 눈 언덕에 파묻히는 순간, 그 위로 하린마루의 거대한 발자국이 찍힌다.
쿵…!
굉음과 함께 또다시 대지가 요동쳤다.
이번엔 할로윈 특성도 잭 오 랜턴을 지진 데미지로부터 구해 주지 못했다.
잭 오 랜턴은 불카노스로 만들어진 대낫을 들어 하린마루의 발바닥을 막았지만 놈의 두터운 허벅지와 장딴지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힘과 무게를 감당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우오오오오오오!]
하린마루는 승리를 직감한 듯 툭 불거져 나온 어금니를 뿌리까지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그러나.
퍼퍽!
이내 커다란 화살 두 대가 날아들어 하린마루의 무릎에 박힌다.
[……?]
하린마루가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돌리는 순간.
…콰쾅!
커다란 충격파가 하린마루의 머리통을 좌측으로 홰까닥 돌려놓았다.
마동왕 메타로 변신한 내 주먹이다.
“어진! 무릎이다! 놈은 무릎이 약해!”
저 멀리서 드레이크가 화살을 쏘며 말했다.
하린마루에게 쫓기는 동안 놈의 큰 체구 대비 약한 관절을 눈여겨보았던 모양.
“……호오. 과연.”
나는 감탄의 시선으로 드레이크를 바라보았다.
사실 몬스터의 공략법이란 것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제각각인 것이 같은 몬스터 내에서 개체값으로 구분되어지는 개체 약점!
쉽게 말하자면 같은 종류의 몬스터 열 마리가 있다면 저마다 가진 사소한 약점이 전부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 드레이크는 정통적인 공략법이 아니라 몬스터 개체마다 다른 ‘개인적 약점(Personal Weakness)’을 논하고 있는 중이다.
몬스터 해부학에 관련된 특유의 센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해내기 어려운, 이른바 재능의 영역이었다.
“…오케이.”
나는 드레이크의 오더에 따라 곧장 전장에 뛰어들었다.
하린마루의 몸은 한 눈에 다 들어올 만큼 작지 않다.
근접 딜을 넣는 입장에서는 그저 커다란 벽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린마루의 몸을 한 바퀴 빙 돌며 놈의 몸 상태 곳곳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잘 보니 드레이크는 하린마루의 관절마다 화살을 박아 뒀다.
그 화살들은 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관절을 둥글게 에워싸듯 박혀 있었는데 나는 이 화살들의 간격과 배열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뜯는 곳>-----
‘절취선!’
이 부분을 자르라는 뜻이겠지.
나는 손아귀 안에서 펄떡거리는 지진의 힘을 그대로 휘둘렀다.
퍼펑!
채찍처럼 휘둘러진 지진파가 하린마루의 얼어붙은 살점을 두들긴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하린마루의 몸이 기우뚱 꺾였다.
…우드득!
놈의 오른쪽 관절이 부러지며 대각선 방향으로 어긋났다.
그 소리는 너무도 선명하게 울려 퍼진다.
뿌직! 뿌지직!
이윽고 두 조각난 다리뼈가 놈의 몸무게를 이겨 내지 못하고 역단층처럼 엇갈려 제각각 살가죽을 뚫고 삐져나왔다.
예정된 수순이었다.
[우-워어어어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린마루는 쓰러지지 않았다.
지독한 추위 때문에 피와 상처가 죄다 얼어붙어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놈은 부러진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그 육중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으직- 으직- 우지지직-!
오른쪽 다리에 무게가 실릴 때마다 과부하가 걸린 관절과 다리뼈들이 점점 살가죽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었지만 체외로 드러난 혈액이 얼어 버린 덕분에 어찌어찌 버티는 것 같았다.
그때 윤솔이 나섰다.
“다들 물러서세요!”
그녀는 하린마루의 거대한 몸을 향해 신성불가침 특성을 발현했다.
번쩍!
순백의 장막이 하린마루의 가슴팍을 퍽 떠밀고는 전신을 덮치듯 휘감아 버렸다.
[그우우욱!]
하린마루는 두 눈을 감싸 쥔 채 비틀거렸다.
마비, 공포, 환각, 실명. 총 4개의 상태이상이 하린마루를 방해한다.
[가아아악!]
하지만 하린마루는 여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놈은 마치 거대한 장승처럼 설원 위에 버티고 서서 그 자체로 우리를 압박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서걱서걱서걱…
어디선가 듣기 싫은 소음이 들린다.
마치 단단하게 얼어붙은 고깃덩어리를 칼로 억지로 자르는 듯한…….
이윽고.
펑!
하린마루의 발등에 동그란 구멍이 패이더니 원통 모양의 큼지막한 살토막 하나가 발등 위로 치솟아 오른다.
그 검붉은 구멍 안에서 기어 나온 것은 바로 잭 오 랜턴이었다.
[……새로운 무기도 얻었는데 같은 수에 당할 수야 있나.]
백전노장 특성 때문일까? 그는 한층 더 노련해진 듯한 느낌이다.
하린마루의 발등에 구멍을 뚫고 위로 올라온 잭 오 랜턴은 그대로 대낫을 휘둘렀다.
댕겅-
요란한 굉음과 함께, 결국 하린마루가 무릎을 꿇었다. 잘려 나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콰콰콰쾅!
잘려나간 오른발은 여전히 대지 위에 돌기둥처럼 서 있었으나 하린마루의 거대한 몸뚱이는 바닥을 나뒹구는 신세가 되었다.
“왼팔! 왼팔부터 조져!”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하린마루가 혈액포식자 특성을 발현한다면 또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HP를 회복할 것이다.
이미 잘려 나간 다리를 어찌하지는 못하겠지만 HP가 회복되면 외발로 쿵쿵 뛰어서라도 우리를 압박할 놈이 바로 하린마루다.
“……라져.”
마침 드레이크는 알아서 자신의 역할을 착착 수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궁수가 대형 몬스터를 상대할 때 파티 기여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퍽! 퍼억! 퍽! 뿌직!
드레이크는 굵고 긴 특수 화살을 하린마루의 관절 부위에 빙 둘러 박아 넣는다.
그것들은 그대로 절취선이 되어 작은 충격에도 큰 데미지를 입게 되는 것이다.
콰쾅!
나는 하린마루의 주먹을 일부러 맞은 뒤 그것을 그대로 반사해 결국 놈의 왼팔을 끊어 놓았다.
[그워어어어어어억!]
하린마루는 오른발과 왼팔을 잃자 바닥에서 몸을 절반가량밖에 일으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미끄덩!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던 하린마루는 다시 뒤로 나동그라졌다.
내가 하린마루의 몸이 바닥과 닿아 있는 모든 부분에 점액을 뿌려 놓았기에 놈은 더더욱 일어날 수 없다.
[…눈높이가 맞아서 딱 좋군.]
잭 오 랜턴이 대낫을 들고 하린마루의 머리 앞에 섰다.
마치 참수형을 집행하는 사신의 모습 그대로였다.
쩍-
대낫이 목숨을 추수한다.
불카노스로 만들어진 이 자비 없는 무기는 단단하게 얼어붙은 고기의 벽을 자르고 그 안에 있는 굵은 뼈를 부러트려 끊어 놓았다.
쿵…!
하린마루의 목이 얼어붙은 벌판 위에 떨어졌다.
“휴우, 끝났다.”
“고된 레이드였어.”
윤솔과 드레이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콰콰콰쾅!
굉음과 함께 눈과 얼음 부스러기들이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레이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 …!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포효는 없었지만 하린마루의 난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놈은 목이 떨어져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버둥거린다.
콰콰쾅! 우지지직!
하나 남은 팔과 다리가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죄다 때려 부수고 있었다.
머리 없는 시체가 난동을 피우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윤솔이 다급히 외쳤다.
“꺄아아악! 어진아 어떻게 해!? 머리가 동력원이 아닌가 봐!”
“…으음. 이건 충격적이군.”
천하의 드레이크조차도 당황해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젠장! 뭐 이런 괴물이…!”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악귀계열 몬스터의 생명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린마루는 머리와 한쪽 팔, 다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HP가 남아 흉악하게 날뛰고 있었다.
쿵! 우르르릉!
놈이 한번 버둥거릴 때마다 설산들이 무너져 내린다.
혈액포식자와 지진 스킬이 봉인된 데다가 기동력은 이미 제로, 거기에 깎단으로 인한 도트 데미지까지 들어가고 있는 상태이건만 놈은 아직도 전의를 잃지 않았다.
죽은 뒤에까지 싸움 본능을 잊지 못하는, 그야말로 미친 싸움광이다!
‘이제 어쩐다….’
나는 턱을 짚었다.
하린마루의 발악을 보아하니 레이드가 조금 더 길어질 것 같다.
쥬딜로페가 잭 오 랜턴이 얼어붙어 있던 곳을 찾아 준 덕분에 아낀 시간을 도로 낭비할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바로 그때.
[크르릉…!]
어디선가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눈보라 너머에서 시퍼런 불똥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리 늑대?’
오로지 하린마루의 먹잇감이 되기 위해 이 던전에 살게 된 비운의 종족!
녀석들이 타오르는 증오를 담아 하린마루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
나는 뒤에서 대기하는 서리 늑대 일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잘 보니 새로 리젠된 젊은 녀석들 사이로 몸 곳곳에 흉터를 가진 늙은 늑대들이 보인다.
하나같이 하린마루에 의해 피를 빨렸던 녀석들인 듯싶게 무시무시한 기세로 하린마루를 노려보고 있다.
한편, 늑대들은 내 뒤에 가만히 서서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마치 나의 허락을 구하는 듯한 자세.
슬쩍-
나는 몸을 반쯤 돌려 길을 터 주었다.
그러자.
꾸벅…
맨 앞에 있던 늙은 늑대 하나가 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으르릉!]
동시에, 놈은 뒤에 있는 젊은 늑대 무리들을 이끌고 앞으로 내달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서리 늑대들은 리젠이 빠르다.
순식간에 불어난 늑대 떼는 버둥거리는 하린마루의 온몸으로 달려들었다.
뿌지직! 뿌직! 뿌지지지직!
수없이 많은 발톱과 이빨이 하린마루의 단단하고 질긴 가죽을 찢어발긴다.
미친 듯이 버둥거리던 하린마루는 서리 늑대들에게 붙잡혀 일순간 움직임이 크게 둔해졌다.
거기에.
[내가 끝을 내지.]
복수자 잭 오 랜턴이 직접 나섰다.
…뿍!
그는 대낫을 들어 하린마루의 단단한 가슴팍에 찍고는 반대쪽으로 잡아당겼다.
당연하게도, 수많은 늑대들에게 나포된 하린마루는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
쩌어어억…
하린마루의 가슴팍에 난 상처가 쫙 열리며 안쪽의 모습이 훤히 드러난다.
펄떡…! 펄떡…! 펄떡…!
시커멓게 변한 심장이 복잡하게 연결된 혈관으로 혈액을 힘차게 뿜어내고 있었다.
잭 오 랜턴은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한번 훅 빨아들였다.
호박 가면 속 심지가 으스스하게 불타오르며 눈, 코, 입에서 불빛 물든 뿌연 연기가 아스러진다.
[…힘을 다오. 친구들.]
회상에 잠긴 듯한 목소리. 저 ‘친구들’이라는 것이 나나 서리 늑대들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내, 잭 오 랜턴의 대낫이 높게 치솟았다.
뿌욱!
질긴 가죽이 생으로 찢어지는 소리.
타르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혈액이 사방팔방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모두의 귓가에 요란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띠링!
<세계 최초로 ‘중간지대의 괴물 ‘하린마루’’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최초 정복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