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38화 (338/1,000)
  • 339화 중간지대의 괴물 (3)

    -띠링!

    <‘얼어붙은 부패 중간지대-냉동 나락(奈落)’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드넓은 벌판엔 하얀 서릿발들이 날카롭게 돋아나 있다.

    수없이 많은 얼음송곳들 사이에는 누군가 주저앉은 채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장신, 비쩍 마른 몸, 전신을 감싸고 있는 시커먼 거적떼기.

    하지만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커다란 호박 가면이다.

    <‘좀도둑’ 잭 오 랜턴> -등급: A / 특성: 어둠, 백전노장, 할로윈, 선악과(善惡果)

    -서식지: 악의 고성, 냉동 나락

    -크기: 2.5m.

    -잡혀 버린 좀도둑. 죄는 아직 뉘우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과거, 악의 고성의 보스인 ‘어둠 대왕’을 잡으러 갔을 때 나는 그곳의 깊은 지하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잭 오 랜턴과 싸웠던 적이 있었다.

    그때 이성을 잃은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잭 오 랜턴은 내 덕분에 제정신을 되찾았었다.

    내 대신 조디악을 죽였던 것도 이 녀석이다.

    “……여전하네.”

    나는 잭 오 랜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커다란 호박에 성의 없이 조각된 눈, 코, 입.

    할로윈 때 장식하는 호박 가면하고 똑같은 외형이다.

    기이할 정도로 깡마른 몸은 때에 절어 시커멓게 변한 넝마로 덮여있었다.

    손에는 뭔가를 쥐고 있는 듯 보였는데 그것은 서릿발 밑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

    드레이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녀석이 왜 여기에 있지?”

    잭 오 랜턴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우리가 어둠 대왕을 찾아갈 수 있도록 백도어를 열어 주었다.

    그리고 자기는 만나러 갈 사람이 있다며 어디론가 훌훌 떠나갔었는데 그랬던 그가 이런 곳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것도 이런 비참한 몰골로!

    “일단 깨워야지.”

    나는 잭 오 랜턴의 몸에 붙은 고드름들을 떼어 냈다.

    윤솔과 드레이크가 서둘러 나를 거들었다.

    이내, 나는 얼음들을 긁어내고 난 뒤 잭 오 랜턴의 호박 가면 밑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호박 가면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다만 중간에 짚으로 만들어진 까끌까끌한 무언가가 있었는데 마치 촛불의 심지 같은 모양새였다.

    “머리 안에 뜨거운 것을 넣어 주면 움직일 거야.”

    내 말대로였다.

    횃불에서 떨어진 뜨거운 기름이 호박 가면 안으로 흘러들자 이내 안의 지푸라기 심지에 불이 붙었다.

    호박 가면 속 심지에 불이 붙자 눈, 코, 입으로 어스름한 불빛이 타오른다.

    “생각할 수 있는 뇌가 생겼군. 자고로 허수아비들은 머릿속에 뭔가를 채워 넣어 줘야 한다니까.”

    나는 잭 오 랜턴을 향해 피식 웃었다.

    예전에도 그랬다.

    드레이크가 잭 오 랜턴의 머리통 속에 화살촉 몇 개를 박아 넣었을 때 비로소 놈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되찾았으니까.

    그때.

    […그아아아악!]

    잭 오 랜턴이 소름끼치는 비명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실로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빠지직!

    잭 오 랜턴은 얼어붙어 있던 몸을 급하게 움직여 일어났다.

    그의 몸에 얼어붙어 있던 서리들이 일제히 부서져 떨어진다.

    우드득…!

    잭 오 랜턴이 바닥에 얼어붙어 있던 손을 뽑아내자 손에 단단히 쥐여져 있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예전에도 들고 다니던 거대한 대낫이었다.

    칼날 부분이 검붉게 타오르는 듯한 외형의 낫.

    마치 서양의 사신들이 들고 다닐 것처럼 생겼던 아이템.

    하지만 그것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직접 공격을 가하는 ‘날’ 부분은 아직 검붉은 핏빛으로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손잡이’ 부분은 여기저기 닳고 휘어져 있다.

    심지어 자루 곳곳에는 금이 가 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아아아아!]

    잭 오 랜턴이 대낫을 휘두르며 공격해 들어왔다.

    가장 먼저 노려진 것은 역시 힐러인 윤솔이었다.

    “꺄아아아악!”

    윤솔은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혀오는 잭 오 랜턴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너무도 창졸간이라 신성불가침 특성을 발현할 틈도 없다.

    나는 혀를 한번 쯧 찼다.

    “이 자식 또 시작이네 이거.”

    내가 재빨리 윤솔을 끌어안고 뒤로 내빼는 순간.

    쩌저저저적!

    잭 오 랜턴이 휘두른 낫이 얼어붙은 바닥을 두 조각으로 쪼개 버렸다.

    반경 십 수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다.

    [그으으으으…]

    잭 오 랜턴.

    껑충 큰 키에 깡마른 몸, 자기 신장보다 훨씬 길쭉한 대낫.

    시커먼 넝마를 펄럭이며 비틀비틀 다가오는 모습이 실로 그로테스크하다.

    나는 그런 잭 오 랜턴에게 말을 걸었다.

    그가 빨리 잠에서 깨어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 친구. 이런 곳에 얼어붙어 있다니.”

    그러자 내 말을 들은 잭 오 랜턴은 잠에서 덜 깬 듯한 목소리로 회답한다.

    […얼어붙어? …누가?]

    “자네 말일세.”

    […내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일까?

    잭 오 랜턴은 공격을 멈추고는 멍한 태도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아. 기억나는군, 너희. …솔로몬의 성에서 만났었어. 나를 깨워 줬었지?]

    “맞아. 은혜를 잊으면 안 되지.”

    […잊을 리가. 내가 아무리 뇌 없는 허수아비라지만. 큭큭큭!]

    잭 오 랜턴은 원래의 그 쾌활한 성격이 약간은 돌아온 모양이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마냥 유쾌할 수만은 없었지만.

    잭 오 랜턴은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얼어붙은 걸레’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자신의 몸을.

    잭 오 랜턴은 충격을 받은 듯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내가 얼마나 얼어붙어 있었나?]

    “꽤 오래. 게임 상의 시간으로는…몇 년이나 되었으려나.”

    잭 오 랜턴을 처음 만났을 때 내 레벨은 37이었다.

    그랬던 레벨이 75가 되고 나서야 처음 만났으니 게임 세계관의 시간상으로는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 것이다.

    심지어 그동안 대격변도 한번 일어나지 않았던가!

    잭 오 랜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낮으신 분’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어.]

    ‘낮으신 분’은 일곱 용군주 중의 하나이자 블랙 드래곤 종족의 제왕 ‘죽음룡 오즈’를 뜻하는 것이리라.

    잭 오 랜턴은 품에서 얼어붙은 담배 하나를 꺼냈다.

    투박하게 생긴 시가(cigar).

    이 역시도 낯익은 아이템이다. 어둠 대왕과 맞붙을 당시 도움을 톡톡히 받았던 ‘할로윈 구름과자’였다.

    치익-

    잭 오 랜턴은 시가를 자기 머리통 속에 집어넣어 심지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불이 붙은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천천히 회복되는 HP.

    […나는 복수를 해야 해. …그러려고 여기에 왔지. …그런데 왜 여기에?]

    잭 오 랜턴은 ‘낮으신 분’ 오즈에게 복수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꿈을 꾸는 이 허수아비는 자기가 왜 이런 곳에서 얼어붙어 있는지 아직도 이해를 잘 하지 못하고 있는 듯싶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잭 오 랜턴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던 듯싶다.

    죽음룡 오즈를 상대하기 전에 놈의 가장 강력한 첨병 중 하나인 리치왕을 먼저 격퇴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잭 오 랜턴은 리치왕이 있는 곳까지 이르지 못했다.

    이곳에서 리치왕의 애완동물이자 중간 보스인 하린마루에게 패했기 때문이리라.

    […으음, 길을 가로막던 빨간 악귀를 베어 죽인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잭 오 랜턴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입구에 있던 ‘간쇼마루’를 죽인 것이 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대단하네. 간쇼마루는 A+등급의 몬스터인데.”

    A등급의 잭 오 랜턴이 한 등급 위의 간쇼마루를 죽였을 정도라면 그 싸움이 얼마나 처절했을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개체값 높고 싸움 잘 하는 A등급이 커버할 수 있는 범위는 기껏해야 한 등급 위의 A+등급까지다.

    간쇼마루에 이어 새롭게 등장한 중간보스 하린마루에게는 절대 무리였으리라.

    “하린마루는 악귀계열 몬스터의 정점이지. 리치왕도 다루기 힘든 처치곤란 몬스터라서 보스방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에 격리시켜 둘 정도이니….”

    하린마루의 압도적인 힘은 잭 오 랜턴을 이곳에 비참한 꼴로 리타이어 시켜 놓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가. 나는 졌는가.]

    잭 오 랜턴은 갈라지는 듯한 음성으로 작게 읊조렸다.

    그리고 이내 분한 듯 으르렁거린다.

    [‘낮으신 분’은커녕… 그놈의 끄나풀의 끄나풀에게 당하다니…내 대낫만 멀쩡했어도….]

    그러고 보니 그가 쥐고 있던 대낫은 거의 고철에 가까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날만은 여전히 핏빛을 뿌리고 있었지만 자루 부분은 이미 한참 전에 한계를 넘어 버린 듯 흉하게 일그러져 있다.

    그때.

    “이봐, 친구. 이걸 써 보는 게 어때?”

    나는 잭 오 랜턴에게 선물 하나를 건넸다.

    -<고르딕사의 코어(core)> / ?

    광물 중 가장 값어치가 높다는 황금조차도 고르딕사의 본체가 아니었다.

    이 정체불명의 금속은 고르딕사를 움직이게 한 핵심 원동력이며 이 세상의 그 어떤 광물보다도 견고하고 희귀한 물질이다.

    ‘황천의 유극’에 수감되어 있는 고르딕사를 처치하고 난 뒤 얻었던 의문의 금속 막대.

    이 길쭉한 막대기는 잭 오 랜턴이 들고 있는 낫의 날과 썩 잘 어울린다.

    새로운 자루를 얻은 잭 오 랜턴은 경악하며 외쳤다.

    […오오! 이것은 ‘불카노스’가 아닌가! 이 귀한 것을 어찌 너희들이 가지고 있지?]

    불카노스. 용비늘에 견줄 정도로 단단하고 가볍다는 전설의 금속.

    참고로 잭 오 랜턴의 낫 날 역시도 이 불카노스로 만들어진 것이다.

    잭 오 랜턴은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불카노스는 고대 정령들…그 중에서도 광물 속성을 가진 정령들이나 조금씩 가지고 있던 것인데… 아무튼 고마워. 잘 쓰도록 하지.]

    알림음이 들리더니 잭 오 랜턴의 호감도가 크게 상승했다.

    이윽고. 불카노스 낫을 장비한 잭 오 랜턴의 상태창이 한번 크게 요동친다.

    <‘좀도둑’ 잭 오 랜턴> -등급: A+ / 특성: 어둠, 백전노장, 할로윈, 선악과(善惡果)

    -서식지: 악의 고성, 냉동 나락

    -크기: 2.5m.

    -잡혀 버린 좀도둑. 죄는 아직 뉘우치지 않았다.

    환한 빛무리와 함께, 잭 오 랜턴의 위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생각했다.

    ‘그렇겠지. 통짜 불카노스로 만든 무기를 장비했으니…아마 깡 공격력만으로 따지면 S급에 버금갈 것이다.’

    내구도가 다 닳은 장비를 가지고도 여기까지 왔던 좀도둑.

    깡마른 몸에 비해 너무나도 무거운 사명을 짊어지고 있는 복수자.

    잭 오 랜턴은 불카노스 낫을 손에 쥔 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바로 그때.

    [우-오오오오오오!]

    벼락같이 터져 나온 굉음이 옅게 얼어붙은 된서리들을 박살냈다.

    언덕빼기 아래에서 네 개나 되는 뿔이 천천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하린마루가 우리를 발견했나 보네,”

    “으아아, 여기까지 쫓아온 거야?”

    “한번 찍은 적은 끝까지 추격하는 건가? 끔찍하군.”

    나와 윤솔, 드레이크는 재빨리 후방을 경계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뒤로 물러나지 않은 자가 있었다.

    잭 오 랜턴!

    잠시 말이 없던 그는 호박 가면 속에서 음산한 눈빛을 뿌린다.

    그리고 짧게 한 마디 흘렸다.

    […리벤지 매치(revenge match)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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