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37화 (337/1,000)
  • 338화 중간지대의 괴물 (2)

    쿵쾅쿵쾅쿵쾅쿵쾅…!

    지면이 상하로 요동친다.

    땅이 상승했다가 하강하면 눈들은 그보다는 조금 늦게 움직였다.

    곳곳에서 눈의 파도가 격하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하린마루가 지나간 곳에는 커다란 발자국들이 남았다.

    [우-워어어어어!]

    놈은 무시무시한 포효와 함께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숴버린다.

    거대한 바위도 높은 침엽수도 죄다 박살나 흩어졌다.

    쿵… 쿵… 쿵… 쿵…

    하린마루는 핏발 선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

    한편.

    “…갔나?”

    나는 그 커다란 발자국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눈 바닥에 엎드린 채 슬쩍 고개를 들었다.

    ‘흙장난’

    ↳땅에 발을 딛고 있을 경우 보호색을 가지게 되며 주변 환경과 완벽히 동화됩니다.

    겉으로 보이는 색과 질감으로는 구분이 힘들며 선공형 몬스터에게 발각당할 확률이 최대 50%까지 낮아집니다.

    샌드웜의 망토에 붙어 있는 이 특성 덕분에 하린마루의 눈을 겨우 피할 수 있었다.

    팔랑-

    팔을 들자 눈처럼 하얗게 변한 망토 자락 아래로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윤솔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위기의 순간, 나는 보호색을 띤 망토를 넓게 펴고 그녀를 꼭 껴안은 채 눈 위에 엎어졌던 것이다.

    윤솔은 두 눈을 가린 채 머뭇머뭇거리다가 이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어진아. 너무 가까워. 몸이 너무 닿는 것 같아.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엉덩이는 좀…아직은 너무… 앗,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괴물을 피한다는 것이 중요하긴 한데! …아우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아무말 대잔치.

    하지만 부끄러워 죽겠다는 듯한 말투 때문에 대부분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여간 곤란해 보이는 눈치였기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으응. 네 엉덩이 말이지? 쥬딜로페 이 녀석! 어서 솔이 엉덩이에서 떨어지렴.”

    “……아, 아하하하. 너였니?”

    나는 윤솔의 엉덩이에 붙어 있는 쥬딜로페를 떼어내 어깨 위에 앉혔다.

    윤솔은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 쥬딜로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내, 우리들은 하얀 망토 밖으로 나와 저 멀리 떨어진 협곡을 내려다보았다.

    “정신없이 도망치다 보니 드레이크랑은 헤어졌네.”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큰 걱정은 되지 않는다.

    드레이크라면 도망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드레이크는 궁수 특유의 날렵한 움직임과 암살자 특유의 은신 능력을 보유했고 현재 장비하고 있는 아이템들의 수준도 높다.

    심지어 게임 센스까지 뛰어나다.

    거기에 하린마루는 S급 몬스터 치고는 기동력이 형편없는 수준이니 도주하는 것 자체만 놓고 보면 큰 무리가 없는 수준.

    하지만 윤솔은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가 보다.

    “드레이크 씨는 괜찮으실까? 아무래도 던전이다 보니 숨을 곳이 딱히 많지는 않을 텐데.”

    “걱정 마. 내가 없어도 잘 하는 친구니까. 나는 알 수 있어. 우리는 서로 통하거든. 결코 춥고 눈이 많이 와서 구하러 가기 싫은 게 아니야.”

    “역시. 서로 굳게 믿고 있구나. 남자들의 우정이란….”

    하지만 윤솔의 감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아아악! 어진! 나 죽는다! 도와줘라!

    저 멀리서 드레이크의 비명이 메아리친다.

    윤솔이 머쓱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안 괜찮으신 것 같은데?”

    “…으음. 저건 아무래도 하린마루를 유인하기 위한 전략일 거야. 우리가 위험할까 봐 일부러 어그로를 끌어 주는 것이지.”

    하지만.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거 위장 전략 아니다! 진짜 위험하니 헬프! 이놈 이거 진짜 세! 아악! 또 온다! HELP! 도움!

    드레이크의 메아리가 기다렸다는 듯 날아든다.

    나는 애써 고개를 가로저었다.

    “드레이크를 흉내 내는 몬스터일 수도 있어. 예전에도 배드엔딩 중에 성대모사를 하는 녀석이 ….”

    하지만.

    -참고로 덧붙이자면 나는 진짜 나다! 본명 드레이크 캣! 사회 보장 번호는…***-03-0321…키와 몸무게…생일…혈액형…벤치 프레스 신기록은….

    TMI. 투 머치 인포메이션이 따로 없다.

    그것을 들은 윤솔은 폭소를 터트렸다.

    “진짜 서로 잘 통하는 것 같네. 네가 어떤 변명을 할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아.”

    이쯤 되면 어쩔 수 없다.

    “……알겠어. 갈게!”

    솔직히 추워서 빨리 움직이기는 싫었는데 어쩔 수 없다.

    나는 잽싸게 설원을 달려 드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쾅! 콰쾅! 우지지직!

    [우-워어어어어!]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하린마루가 미쳐 날뛰고 있었다.

    드레이크가 하린마루의 발바닥을 피해 정신없이 도주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드레이크는 나를 보며 반색했다.

    “오오 어진! 와 줬구나! 하필 평지가 나오는 바람에 은신할 곳이 없어 고생 중이었다!”

    그는 벌써 하린마루의 머리통에 커다란 장전을 몇 발 박아 넣은 상태였다.

    각 눈알에 세 발 씩, 목에 일곱 발, 이마 중앙과 상단부에 각각 다섯 발,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수리 쪽에 두 발….

    만약 상대가 일반적인 보스 몬스터였다면 벌써 죽고도 남았겠지만…상대가 언데드 특성을 가진 S급 몬스터이다 보니 고전을 면치 못할 수밖에.

    [우어어어어어어어!]

    머리통만 고슴도치가 된 하린마루는 계속해서 두 팔을 휘저으며 드레이크를 잡으려 든다.

    “물러나.”

    나는 마동왕 메타로 아이템을 갈아 끼우고는 앞으로 나섰다.

    콰쾅! 우지지지직…!

    주먹으로 땅을 때리자 깊은 균열이 생겨 하린마루를 삼켜 버렸다.

    하지만.

    [그-아아아아악!]

    마동왕이 잡아 찢어서 생겨난 균열의 깊이보다 하린마루 키가 더욱 컸다.

    우직! 우직! 우지지직!

    하린마루는 목까지 땅에 잠겼지만 이내 거대한 두 팔을 이용해 지면 위로 기어 올라왔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 목적은 드레이크를 구해 내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균열 아래로 떨어질 뻔한 드레이크의 허리에 킬 체인을 감아 끌어올렸다.

    “깎단은 먹여 놨으니 기다리면 돼. 시간은 우리 편이다.”

    하지만 마냥 또 그런 것도 아니었다.

    [컹! 컹!]

    [그르르르…]

    건너편 절벽에서 한 떼의 서리 늑대들이 새롭게 출몰한 것이다.

    놈들은 몰살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엄청난 속도로 리젠되었다.

    애초에 이런 하드한 던전에 C+등급의 몬스터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수 있다.

    …하지만 하린마루의 ‘혈액포식자’ 특성을 감안하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떼 지어서 습격해 오는 많은 수의 늑대는 그 자체로도 플레이어들에게 성가신 방해물이지만, 결국은 흡혈 특성이 붙은 보스 몬스터의 난이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늑대들은 플레이어를 공격해서 지치게 만드는 역할도 수행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곳의 보스 몬스터인 하린마루의 먹잇감이 되기 위해 이곳에 배치된 것이다.

    단순한 몬스터 고유의 스탯이나 스킬을 떠나서 사는 환경의 생태계조차도 놈의 강력한 무기가 된다.

    즉, 이곳의 하린마루는 개체값이면 개체값, 특성치면 특성치, 거기에 생태계 먹이사슬적 관점에서도 최강의 생물인 것이다.

    아무튼.

    훌륭한 피 주머니들을 발견한 하린마루가 그런 늑대들을 그냥 둘 리 없다.

    애초에 잡아먹으라고 깔아 준 먹잇감들이니까.

    꿀꺽꿀꺽꿀꺽꿀꺽…

    하린마루는 어둠 대왕의 특성을 이용해 늑대들의 피와 기름을 빨아먹고 HP를 대폭 회복했다.

    서리 늑대들은 애초에 먹잇감으로 태어난 자신들의 운명을 알지 못하고 리젠되는 즉시 몸을 돌려 도망친다.

    얼마나 도망갈 수 있을지는 뻔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한편.

    그동안 나는 드레이크와 윤솔을 데리고 늑대들이 도망친 방향의 반대로 뛰고 있었다.

    드레이크는 눈에 들어가는 엄청난 양의 눈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뛰면서도 내게 물었다.

    “어진! 시간이 딱히 우리 편을 들어줄 것 같지는 않은데!?”

    “…음. 나도 다시 생각해 보는 중이야.”

    하린마루는 보폭이 커서 조금만 움직여도 우리를 따라잡을 수 있다.

    따라서 넓은 평지가 아니라 놈이 들어오기 힘든 협곡 위주로 도주로를 선택해야 한다.

    방금 전 서리 늑대들이 도망친 방향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넓은 설원지대를 향해 달린다.

    ‘…여기 어디쯤인데.’

    나는 추워서 식은땀도 흐르지 않을 혹한 속을 헤매고 있었다.

    이쯤에 숨겨져 있는 히든 피스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우어어어어어어!]

    뒤에서 하린마루가 쿵쾅거리는 굉음이 들려온다.

    온 대기를 파르르 떨리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인 포효!

    단순히 귀로 듣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것 같은 박력이라니, 과연 S급 몬스터답다.

    그때.

    […호에엥! 뿌!]

    내 옆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쥬딜로페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눈보라 저편을 손가락질했다.

    “……?”

    나는 고개를 돌려 쥬딜로페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휘이이이잉…

    어둠에 절은 눈발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쭉 뻗으면 자기 손가락 개수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둠.

    “이봐, 드레이크. 저 방향에 뭐가 좀 보이나?”

    “…으음. 나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시력 좋고 시야 넓은 드레이크마저도 고개를 갸웃한다.

    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하린마루의 추격은 이제 코앞이다.

    빨리 이 맵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히든 피스를 찾지 않으면 일이 더 고달파질 것이다.

    별 수 없이, 나는 쥬딜로페의 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전에 1층에서 내가 깜빡하고 미처 처리하지 않았던 냉동 흡혈귀들의 존재를 간파했던 것도 그녀가 아니던가.

    나는 윤솔을 옆구리에 끼고 눈밭 위를 내달렸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게임 속의 내 몸무게는 극도로 가벼웠기에 높이 쌓인 눈 위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달려 나갈 수 있었다.

    이윽고.

    나는 눈보라를 헤치고 쥬딜로페가 가리켰던 눈 언덕 위에 섰다.

    “……!”

    그러자 이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히든 피스가 눈에 보인다.

    “쥬딜로페 이 녀석! 네가 복덩이구나!”

    나는 쥬딜로페를 꽉 끌어안고 그 통통한 볼에 뽀뽀를 해 주었다.

    -띠링!

    <여왕의 호감도가 낮아집니다>

    쥬딜로페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재빨리 눈 덮인 언덕의 중앙으로 다가갔다.

    한편, 내 뒤를 따라온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특히나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드레이크의 놀람이 더 컸다.

    “…이 녀석이 왜 여기에 있지?”

    나와 드레이크는 까마득한 지저세계의 나락, 그 중에서도 가장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는 혹한의 땅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던 것이다.

    무력하게 무릎 꿇은 모습.

    길로틴을 기다리는 것처럼 푹 숙인 머리.

    부러지고 이빨 빠진 대낫.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꺼진 지 한참 된 등불.

    고드름만 주렁주렁 매달린 호박 가면.

    ‘좀도둑’ 잭 오 랜턴.

    그가 이곳에 얼어붙은 채 죽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