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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336화 (336/1,000)
  • 337화 중간지대의 괴물 (1)

    철컹…!

    육중한 철문이 열린다.

    아래층으로 가는 구역이 해금되었다.

    인벤토리에 있던 마동왕 전용 신발 ‘간쇼마루의 발가죽’이 뜨겁게 요동치고 있었다.

    “…오호. 동족이라 이거냐?”

    나는 피식 웃으며 15층 중간지대로 진입했다.

    -띠링!

    <‘얼어붙은 부패 중간지대’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필드에 진입하자마자 보인 것은 드넓은 설원이었다.

    지하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평야지대, 심지어 저 멀리 협곡과 산맥까지 보인다.

    하지만 드넓은 풍경보다 앞서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거구의 몸, 뾰족한 이빨, 거꾸로 뒤틀린 두 개의 뿔.

    뼈만 남은 오니 한 마리가 설원 한가운데 주저앉은 채 죽어 있다.

    드레이크는 백골만 남은 거대한 사체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간쇼마루인가?”

    위험등급 A+!

    오니 계열 몬스터 중에서도 흉악한 성질머리로는 당할 자가 없는 존재.

    참고로 내가 마동왕 전용 신발로 쓰고 있는 것도 이놈의 발가죽을 벗겨서 제작한 것이다.

    “……으아, 되게 무섭게 생겼다. 이런 무시무시한 괴물이 어쩌다 여기서 죽었을까?”

    윤솔은 간쇼마루의 뼈다귀를 살피며 고개를 갸웃했다.

    자세히 보니 이 괴물의 사인(死因)은 꽤나 명백한 것이었다.

    두개골을 세로로 양분하고 있는 거대한 칼자국.

    이것이 간쇼마루를 죽음에 이르게 한 치명타였다.

    “…뭐에 당한 거지?”

    나는 뼈다귀들의 산을 타올라 간쇼마루의 두개골을 살폈다.

    어떤 강맹한 참격 비슷한 것이 이 괴물의 크고 강인한 육체를 두동강내려 했던 것 같다.

    힘이 부족해서 두개골만 쪼개 놓는 데 그쳤지만 그것만으로도 즉사할 이유는 충분했으리라.

    바로 그때.

    [그르르르르…]

    어둠 저편에서 낮은 괴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드레이크는 오니의 뿔 끝에 선 채 어둠 너머를 꿰뚫어 보았다.

    “어진. 적‘들’이 온다.”

    과연 눈 밝은 드레이크의 말대로였다.

    뿌득- 뿌득- 뿌득-

    눈이 압축되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발자국들이 찍혔다.

    흰 털을 가진 맹수들이 어느덧 이쪽을 향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리 늑대> -등급: C+ / 특성: 백전노장, 뺑소니, 얼음, 야수

    -서식지: 가혹한 설산, 얼어붙은 부패

    -크기: 3m.

    -추운 곳에 적응한 늑대.

    무리를 이루어 살며 사냥감이 약해질 때까지 치고 빠지기를 반복해 결국 숨통을 끊어놓는다.

    낯익은 얼굴들이다.

    예전에 북대륙의 ‘가혹한 설산’을 넘어가면서 몇 번인가 마주쳤던 적이 있는 몬스터.

    나야 이동 속도가 빨라서 상관없었다지만 당시 나를 뒤쫓았던 추격자들은 이 늑대 떼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었다.

    “이놈들도 개체수가 엄청나게 많아서 골치 아프지. 체력과 공격력도 상당히 질긴 편이고.”

    나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늑대 하나의 옆구리를 퍽 걷어찼다.

    …아니, 걷어차려 했다.

    “어엇!?”

    나는 발을 뻗는 순간 당황해야 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던 늑대들은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더니 그대로 이쪽을 통과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

    드레이크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늑대들은 우리를 그대로 통과하더니 간쇼마루의 시체를 등지고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윤솔이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지?”

    그리고, 나는 윤솔의 말을 듣는 순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늑대들은 지금 ‘어떠한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어떠한 장소’를 피해서 가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깨닫고 막 입을 열어 외치려는 순간.

    …콰콰콰쾅!

    마치 운석이 떨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주저앉아 있던 간쇼마루의 해골이 박살났다.

    “드레이크!?”

    나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과연 천상계 랭커다운 움직임.

    드레이크는 그 찰나의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바로 아래로 직활강했다.

    …쿵!

    어깨부터 땅에 떨어진 드레이크는 HP를 꽤 많이 잃기는 했지만 목숨은 건졌다.

    윤솔이 그런 드레이크에게 바로 힐을 걸어 주었다.

    “빠지자!”

    나는 윤솔과 드레이크를 동시에 허리에 낀 채 뒤로 내달렸다.

    아까 늑대들이 도망가던 이유가 있었다.

    콰지직…!

    거대한 발바닥이 간쇼마루의 시체를 짓이겼다.

    [우우-우우우우…]

    어둠이 걷히며 그 너머에 있던 미증유의 무언가가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냐?”

    드레이크는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딱 벌렸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거대한 오니의 머리였다.

    하지만 머리 밑으로 보이는 모습부터는 일반적인 오니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한쪽 손은 열 개나 되는 손가락이 달려 꿈틀거린다.

    정리되지 않은 긴 손톱들이 달팽이 껍질저럼 뒤틀려 있어 괴기스러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다른 쪽 손은 아예 손가락이 없었다.

    대신 뭉툭한 팔 끝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안에 돋아난 수많은 기형치들이 분쇄기처럼 회전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린마루(破倫丸)> -등급: S / 특성: 어둠, 언데드, 하수인, 거인, 지진, 가뭄, 혈액포식자, 싸움광

    -서식지: ‘얼어붙은 부패’

    -크기: 50m

    -리치왕은 죽은 간쇼마루의 시체를 되살려 강력한 악귀를 만들어 냈다.

    일반적으로 언데드가 된 개체는 생전에 비해 낮은 전투력을 갖게 되지만 이 하린마루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간쇼마루의 육체에 어둠 대왕의 데이터로 만들어진 왼팔, 샌드웜의 데이터로 만들어진 오른팔이 이식된 이 괴물은 감히 모든 오니 계열 몬스터 중 최강이라 할 만하다.

    하린마루.

    A+등급의 간쇼마루보다 모든 면에서 상위호환적인 면모를 보이는 악귀타입 몬스터.

    콰-쾅!

    하린마루가 발을 구르자 어마어마한 규모의 지연재해가 몰아닥쳤다.

    샌드웜의 특기인 지진이다!

    드레이크가 깜짝 놀라 외쳤다.

    “미친! S급 몬스터가 중간 보스로 나온다고!?”

    확실히 대격변 이후라서 그런가 던전의 격이 다르다.

    미칠 듯이 높은 HP와 방어력, 상상을 초월하는 공격력, 거기에 저런 흉폭성이라니!

    드레이크는 요동치는 대지 위에서 간신히 중심을 잡은 채 내게 외쳤다.

    “어진! 저것도 잡으라고 만든 게 확실한 건가!?”

    너무 크고 강력하다 보니 도저히 사냥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튜토리얼의 탑에 있던 ‘용옥의 고문기술자’처럼 ‘잡지 못하라고 만든 몬스터’도 간혹 있지만…하린마루의 경우에는 아니다.

    “그래도 근력을 제외하면 S급 몬스터 중에서는 레벨과 스탯이 낮은 편이야.”

    나는 등에 업었던 윤솔을 내려주고는 다시 앞으로 내달렸다.

    부웅-

    하린마루의 주먹이 운석처럼 날아 들어온다.

    콰쾅!

    나는 놈의 주먹을 온몸으로 막아 냈다.

    우지지직…!

    반사파가 일어 놈의 오른팔에 묵직한 데미지를 주었다.

    나는 HP가 1 남은 상태로 살아남았지만 윤솔의 힐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오오오오!]

    너덜너덜해진 오른팔을 감싸 쥐고 물러난 하린마루 역시 회복 수단이 있다.

    쫘악-

    놈의 왼팔이 펼쳐졌다.

    어둠 대왕의 손가락 열 개를 모두 뽑아다 박았는지 놈의 왼팔에는 총 10개의 뒤틀린 손가락들이 꼼지락거린다.

    꿀꺽꿀꺽꿀꺽꿀꺽…

    혈액포식자 특성이 발현되었다!

    그것을 본 드레이크는 코웃음쳤다.

    “하핫! 우리들 중 빼앗아 갈 체력이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그렇다.

    나야 알몸이니 말할 것도 없고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 각각 힐러와 궁수이니만큼 HP가 그리 높지 않다.

    우리의 최대 체력 0.01%를 매 초당 훔쳐 가는 정도로는 하린마루의 커다란 HP통을 절대로 채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쭈우우욱-

    하린마루의 HP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어, 어째서!?”

    드레이크는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이 중에 하린마루의 HP를 저만큼 채워 줄 수 있는 피통을 가진 사람은 없다.

    하지만 나는 이내 그 이유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젠장! 저 늑대 놈들 빨리 안 도망가고 뭐 했어!?”

    그렇다.

    하린마루는 저 멀리 도망치던 늑대 떼를 향해 혈액포식을 시전하고 있었다!

    시야 안에 닿는 적이라면 가리지 않고 피를 빨 수 있다.

    하린마루는 거대한 덩치와 넓은 시야로 저 멀리 달아나 버린 늑대 떼의 피를 빨고 있는 것이다!

    […캥!]

    […그르륵!]

    […케엑!]

    […깨갱!]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설원을 달리던 늑대들이 순식간에 미이라처럼 바짝 말라 뒤집어진다.

    [우어어어어어!]

    이내 HP를 어느 정도 회복한 하린마루가 돌진을 시작했다.

    놈은 거꾸로 뒤틀린 두 개의 뿔과 정방향으로 솟아난 두 개의 뿔, 총 네 개의 뿔을 이용해 미친 듯이 밀고 들어온다.

    쿠드드드드득!

    마치 불도저처럼 돌진해 오는 하린마루의 압도적인 기세 앞에 우리는 별다른 대처를 하지 못했다.

    “모두 물러서!”

    그나마 윤솔이 시기적절하게 ‘신성불가침’ 특성을 발동해 하린마루의 돌격을 늦추지 않았더라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나이스 타이밍이야.”

    나는 윤솔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예전에 해적선의 미이라 레이드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그녀는 게임 센스가 은근히 좋다.

    이윽고.

    펑!

    내 반지 속에서 히드라가 거대한 몸을 드러냈다.

    “무리한 부탁만 해서 미안하다. 저놈을 잠시만 막아 줄래?”

    히드라는 내 부탁에 무조건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화아아아악!

    이내 여덟 개의 머리에서 시커먼 독안개가 뿜어져 나와 하린마루의 앞을 가렸다.

    하린마루는 의외로 맹독 특성이 없는지라 독 데미지를 입었다.

    게다가 시야가 온통 암흑으로 물들었기에 우리가 있는 방향을 햇갈려 하기 시작했다.

    퍼억!

    그 틈을 타 히드라는 하린마루의 몸에 여덟 머리의 박치기를 날렸다.

    콰콰쾅!

    히드라 또한 꽤 덩치가 있는지라 하린마루는 그대로 뒤로 나자빠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재빨리 히드라를 반지 속으로 불러들인 뒤 외쳤다.

    “튀자.”

    그러자 배드엔딩의 화살로 녹 데미지를 주고 있던 드레이크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다.

    “포기하는 건가?”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뭐 중간 보스쯤이야 안 잡고 넘어가도 큰 상관은 없다.

    하린마루는 잡는 데 필요한 노력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은 거지 몬스터이니까.

    ‘……S급 몬스터를 셋이서만 잡기에는 아직 힘드네.’

    잡으려면 어떻게든 가능이야 하겠지만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앞으로 포션이나 엘릭서 등의 소모품들을 벌충할 기회도 별로 없으니 레이드는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하린마루는 중간 보스에 불과할 뿐, 최종 콘텐츠가 아니니까.

    ‘아쉽네. 내 혈액포식자 특성이 어둠 대왕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라 아몬 백작에게서 얻은 것이었다면 저 하린마루 놈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같은 특성도 어떤 몬스터에게 얻었느냐에 따라 그 위력이 천차만별이다.

    (가령 굴거미의 ‘착굴’ 특성과 샌드웜의 ‘착굴’ 특성은 같은 특성이지만 위력 면에서는 클래스가 다르다)

    “뭐 아무튼. 하린마루 레이드는 이쯤에서 포기다.”

    나는 게임을 던지기로 했다.

    윤솔과 드레이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내 의견에 동의했다.

    다만 드레이크가 약간의 아쉬움을 표했을 뿐이다.

    “네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것이 맞는 길이겠지. 다만 HP를 20% 가까이나 빼 놨는데 그것이 조금 아쉽군.”

    하지만 아쉬워 할 것 없다.

    “걱정 마. 하린마루를 대신 잡아 줄 녀석이 있으니까.”

    나는 나락과도 같은 15층 바닥, 심연의 끝자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회귀하기 전 세상의 랭커들이 말했던 ‘히든 피스’

    이 던전 최고의 아웃풋이 숨겨져 있는 곳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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