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35화 (335/1,000)
  • 336화 오즈 랜드(Odd’s Land) (3)

    얼음으로 된 지하공동.

    어둠이 내린 벽에는 거대한 조형물들이 늘어져 있다.

    관(棺).

    벽마다 깊숙하게 패인 얼음굴 속에는 아름다운 양식으로 조각된 관들이 늘어서 있었다.

    관은 여섯 개의 각으로 모퉁이져 있고 길이도 꽤 길다.

    세로로 곧게 서 있는데다가 뚜껑 위에 정교하고 우아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언뜻 보면 그냥 장식물로 착각할 여지도 있었다.

    나는 관뚜껑 위에 쌓인 얼음먼지를 쓸어내며 말했다.

    “……이 안에 든 놈들은 후에 가장 귀찮은 적이 되지.”

    리치왕이 이끄는 언데드 정예병들은 죽여도 죽지 않는다.

    특히나 이 얼음 관 속에 잠들어 있는 ‘냉동 흡혈귀’ 병사들은 더더욱 그렇다.

    이놈들을 처치하기 위해서는 은으로 만들어진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알 리 없었던 플레이어 측은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뱀파이어들이 자고 있을 때 하나하나 죽여 두는 게 좋아.”

    나는 잿나무 장작을 태워 모닥불을 피우고는 뜨거운 재에 은 말뚝을 파묻었다.

    쉬이이이익…

    이윽고 은 말뚝의 끝부분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말랑말랑하고 뜨거운 빛이 근처의 어둠을 밀어내며 얼어붙은 관뚜껑에 닿았다.

    나는 깎단을 거꾸로 들고 온 힘을 다해 은 말뚝의 머리를 때렸다.

    따앙!

    은 말뚝은 순식간에 두터운 얼음 관짝을 뚫고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끄륵!?]

    말뚝이 관뚜껑을 뚫고 틀어박힐 때마다 안쪽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구멍 속에 물이 차오르는 듯한 소리.

    이윽고.

    덜커덩…!

    관뚜껑이 심하게 요동치는가 싶더니 그 밑에서 엄청난 몸부림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손톱으로 관뚜껑의 밑면을 사납게 할퀴고 있었다.

    퍼펑!

    이내 얼음으로 만들어진 관뚜껑이 완전히 박살난다.

    그 안에서 걸어 나온 것은 실로 끔찍한 외형을 하고 있었다.

    <냉동 흡혈귀> -등급: A / 특성: 어둠, 하수인, 백전노장, 혈액포식자, 내성발톱

    -서식지: 얼어붙은 부패

    -크기: 2m.

    -리치왕이 전쟁 시를 대비해 지하에 얼려둔 뱀파이어 병사로 흡혈귀들 중에서도 유독 강하고 피를 많이 마시던 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이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 해동되어 날뛸 준비가 되어있다.

    철갑을 두르고 있는 한 장신의 기사가 나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얼어붙은 강철 투구의 틈으로 노오란 눈알이 어스름하게 타오른다.

    그 압도적인 기세에 놀란 윤솔과 드레이크가 순간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쿵!

    이 얼어붙은 뱀파이어는 가슴을 움켜쥔 자세로 무릎을 꿇더니 이내 그대로 죽어 버렸다.

    쉬이이익…

    꽁꽁 얼은 무쇠 갑옷 틈새로 검은 기운이 빠져나갔고 이내 바닥에는 텅 빈 갑옷과 투구만 남게 되었다.

    쑥-

    나는 갑옷을 뚫고 박힌 은 말뚝을 뽑았다.

    그것은 위치 상 흡혈귀의 심장이 있을 곳까지 충분히 깊게 파고들어 있었다.

    “자, 다음 말뚝을 박아 볼까?”

    나의 해맑은 대사를 들은 친구들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저 앞까지 빽빽하게 나열된 얼음 관의 행렬을 향해서.

    *       *       *

    이윽고.

    드넓은 얼음굴에 있는 모든 관짝에 은 말뚝이 박혔다.

    무려 1층부터 13층까지!

    위험등급이 A씩이나 되는 고등급의 괴물들.

    훗날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통곡의 벽 앞에 주저앉힐 이 무시무시한 몬스터 군단은 변변찮은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나에게 줄줄이 살해되었다.

    간혹 심장이 오른쪽이 있는 흡혈귀가 한둘씩 있어 관짝에서 나와 저항하기도 했지만…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위해를 입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관짝에 말뚝 구멍이 날 때마다 어김없이 얼어붙은 심장 하나씩이 파괴된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관짝에 모두 말뚝 구멍이 날 때쯤, 나는 레벨업을 할 수 있었다.

    -<이어진>

    LV: 75

    호칭: 바실리스크 사냥꾼(특전: 맹독)  / 샌드웜 땅꾼(특전: 가뭄) / 어둠 대왕 시해자(특전: 선택) / 씨어데블 격침자(특전: 심해) / 대망자 묘지기(특전: 언데드) / 지옥바퀴 대왕게 잡이(특전: 백전노장) / 아귀메기 태공(특전: 잠복) / 크라켄 킬러(특전: 고생물) / 와두두 여왕 쥬딜로페의 펫(특전: 갹출) / 여덟 다리 대왕 참수자(특전: 불완전변태) / 리자드맨 학살자(특전: 징수) / 식인황제 시해자(특전: 1차 대격변) / 뒤틀린 황천의 생존자(특전: 절약)

    HP: 750/750

    75레벨.

    이 시점에서는 누구도 나의 레벨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옆에 있던 드레이크와 윤솔 역시 쾌재를 불렀다.

    “오. 나도 레벨이 올랐군. 이제 65다.”

    “어진아! 나도 레벨 63으로 올랐어!”

    전원 사이좋게 레벨이 오르는 것은 오랜만이다.

    우연히 레벨업에 필요한 기여도와 경험치가 비슷하게 남아 있었나 보다.

    한편.

    [우웅…]

    쥬딜로페는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들을 주워와 내게 내민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아이와도 같은 얼굴.

    나는 그런 쥬딜로페의 머리를 쓰다듬고 아이템을 받아들었다.

    “음. ‘뱀파이어의 머리카락 목걸이’라…민첩 옵션이 붙었으니 챙겨 둬야겠네.”

    그 외에도 B+부터 A급까지의 아이템들이 쌔고 쌨다.

    개중 민첩 아이템이 붙은 것들은 창고로 보냈고 그럭저럭 쓸 만한 것들은 윤솔과 드레이크에게 주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쓸 만한 아이템은 거의 없었다)

    그 외, 깡 공격력만 높거나 깡 방어력만 높은 등 잡다한 무구들은 대부분 경매장으로 팔아 버릴 생각이었다.

    “전 세계 랭커들이 눈에 불을 켜겠군. 돈은 많이 벌겠네.”

    나는 냉동 흡혈귀들이 떨군 아이템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나 역시도 한때 이 정도 등급의 아이템들에 목을 맸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겨우겨우 구한 아이템들은 결국 최상위 랭커들이 빨아먹고 남은 단물에 불과했을 것이다.

    쓰자니 부족하고 버리자니 아까운 ‘짬’들.

    최상위 계층이 먹다 버린 찌꺼기들을 비싼 값에 허겁지겁 구매했던 과거를 떠올리니 새삼 입맛이 쓰다.

    이윽고.

    나는 지하 14층으로 내려가는 층계의 앞에 섰다.

    “여기가 딱 중간 지점이네.”

    28층짜리 던전의 14층에 진입했으니 이제 던전도 절반가량 클리어 한 것이나 다름없다.

    물이 반밖에 없네, 반이나 있네의 문제만은 아니다.

    …던전의 절반을 공략했다는 것은 이제부터 중간 보스가 출몰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우리는 긴 나선형의 얼음계단을 걸어 지하로 내려갔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머리털이 더욱 쭈뼛하게 곤두선다.

    노르딕페이스의 드레스를 몇 겹 더 껴입어도 느껴지는 추위가 지하세계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이윽고 14층의 초입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이 우리를 반겼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굵직한 우박 알갱이들이 쏟아져 내린다.

    이것들에 머리를 맞고 기절한다면 그대로 끝이다.

    <싸락우박 풍뎅이> -등급: C+ / 특성: 하수인, 과식, 맹독, 빙결

    -서식지: 가혹한 설산, 얼어붙은 부패, 빙하숲 ‘고대 보존지대’

    -크기: 0.1m.

    -하잘 것 없는 작은 벌레처럼 보여도 대격변을 버티고 살아남은 강력한 고대 충왕종 몬스터이다.

    얼음굴을 걸어가다가 난데없이 우박이 쏟아진다면 십중팔구 이 녀석들임에 분명하다.

    바닥에 떨어진 우박들은 둥글게 말았던 몸을 펴 한 마리의 풍뎅이로 변한다.

    이 벌레들은 주변에 있는 모든 온기 느껴지는 것들의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며 말이다!

    드레이크는 바글바글 몰려드는 풍뎅이 군단에 경악했다.

    “뭐가 이렇게 많아!?”

    비록 풍뎅이 하나하나는 작고 약할지라도 엄청난 수가 한데 모이니 부담스럽다.

    놈들은 순식간에 우리를 빙 둘러쌌다.

    나는 드레이크와 윤솔에게 경고했다.

    “이 벌레에게 물리면 몸이 얼어붙는 동시에 맹독에 중독되니 조심해.”

    나는 우박처럼 떨어지는 풍뎅이들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그때.

    [이이익…!]

    내 품에서 갑자기 쥬딜로페가 튀어나왔다.

    본래 와두두는 곤충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포자형 몬스터.

    쥬딜로페는 눈앞의 풍뎅이들을 더없이 좋은 사냥감으로 판단한 모양이다.

    그녀는 눈앞에 몰려드는 수많은 풍뎅이들을 향해 숨결을 불어넣었다.

    옥색의 포자들이 이내 꽃가루처럼 흩날린다.

    하지만.

    -띠링!

    <여왕이 눈앞의 풍뎅이들을 가신으로 삼고자 하는 의지를 보입니다>

    <상대의 레벨이 너무 높습니다!>

    <가신화(家臣化)에 실패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쥬딜로페의 경험치가 너무 낮아서 풍뎅이들을 길들이는 것은 무리인 듯싶다.

    풍뎅이들은 포자범벅이 된 몸을 이끌고도 우리를 거침없이 공격했다.

    [호에엥…]

    “괜찮아. 다음에 더 잘 하면 되지.”

    나는 급격히 시무룩해진 쥬딜로페를 달래는 동시에 손가락의 반지에서 히드라를 소환했다.

    “마음껏 잡아먹으렴.”

    내 반지에서 튀어나온 히드라는 여덟 개나 되는 머리로 눈앞의 풍뎅이 대군을 막아섰다.

    쉬이이익!

    풍뎅이들은 빙결과 맹독 특성을 이용해 히드라를 물어뜯었지만 소용없었다.

    히드라는 독과 마법에 엄청난 저항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와작- 와작- 와작- 와작-

    히드라는 눈앞에 모인 수많은 풍뎅이들을 마치 과자 먹어치우듯 먹어 버렸다.

    풍뎅이들 역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차차차차차착…

    놈들은 히드라의 몸 곳곳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통의 관절을 가진 상대에게만 통하는 공격 패턴.

    히드라는 뱀 형태의 몬스터인지라 풍뎅이들이 몸을 뒤덮는다고 해도 딱히 몸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지지는 않는다.

    이윽고.

    파앗!

    히드라가 여덟 개의 머리를 앞으로 쫘악 뻗었다.

    그러자 꼬리로 위장하고 있던 제일 커다란 머리가 튀어나와 나머지 풍뎅이들을 한꺼번에 집어삼킨다.

    호다다다닥-

    풍뎅이들은 상대방과 상성이 좋지 않음을 깨닫고 재빨리 물러나기 시작했다.

    쥬딜로페는 자신이 활약하지 못해 화가 난 듯 히드라의 머리 위에 올라가 비늘을 쥐어뜯었고 히드라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거렸다.

    한편.

    나는 풍뎅이 떼가 몰려왔다가 물러간 흔적으로부터 아이템 하나를 입수했다.

    -<차가운 열쇠> / D

    잡으면 손에 동상만을 안겨 줄 금속 파편이다.

    푸르딩딩하게 물들어 있는 작은 쇳조각.

    이것이 지하 15층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 15층이 중간 보스 방이었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눈을 빛냈다.

    오래 전 랭커들의 인터뷰가 머릿속에서 저절로 재생된다.

    ‘15층에는 까다로운 중간 보스가 있었죠, 그리고 엄청난 히든 피스도 숨겨져 있었어요!’

    ‘어쩌면 그 히든 피스는 던전의 최종 보스인 리치왕보다도 더 엄청난 것이었을지 몰라요.’

    ‘우리가 그걸 얻는 데 성공했었다면 레이드를 실패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하긴, 지금 와서 후회하면 뭘 하겠어요?’

    회귀 전 이 던전을 공략했던 랭커들의 인터뷰.

    나는 그 대화내용들을 복기하며 열쇠 조각을 들었다.

    쿵! 덜커덩-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아래층으로 가는 구역이 해금되었다.

    츠츠츠츠…

    저 아래 도사리고 있을 괴물의 기운에 반응한 것일까?

    인벤토리에 있는 ‘간쇼마루의 신발’이 뜨겁게 진동하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