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32화 (332/1,000)
  • 333화 의외로 이 게임은 룩겜입니다 (4)

    나는 결국 경매장에서 개최된 노르딕페이스 패션쇼에서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세상에. 게임머니를 한 번에 그렇게나 많이 사 가는 사람은 처음 봤네. 나는 수수료도 엄청 비싸게 받았는데.”

    경매 막판에 핫세 다닐로바라는 우수고객에게 인벤토리의 황금을 엄청나게 팔아치운 것도 이번의 큰 수확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게임화폐를 판매했을 때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엄청난 차액은 덤이다.

    (수수료만으로도 경매장에서 옷을 사는 데 쓴 돈을 모두 충당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

    “뭐, 위법하게 거래한 것도 아니니 기타소득세만 제대로 내면 문제없겠네.”

    나는 세무사와의 상담 이후 게임화폐를 한 번에 풀지 않기로 했다.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제32조 제7호에 의해 게임화폐 판매를 업으로 하는 업자 취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뭐, 내가 이 일을 업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게임화폐는 우연성과 도박성이 강한 베팅게임의 게임화폐와는 달리 RPG게임의 게임화폐로 분류되기에 상관없는 일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개인정보를 이용해서 환전을 한다거나 게임화폐 자체를 불법 복제하는 일도 없었으니 안심.

    오히려 고르딕사를 잡고 얻은 황금의 경우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측에서 준비한 깜짝 로또, 파워볼 이벤트에 당첨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알맞다.

    …그러니까 이 경우는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기타소득이라는 말씀!

    ‘하지만 미리미리 조심하고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지.’

    이번에 핫세 다닐로바라는 유저에게 대량의 게임화폐를 판매했기에 내 통장에 외국 화폐가 관여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다른 나라 돈까지 흘러들게 된다면 자칫 일이 커질 수 있기에 세무사와 법무사의 조언을 받았고 이에 따라 한동안은 환전 시장을 기웃거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고로 안전이 제일이지. 안전하려면 합법적으로만 놀아야 하고.”

    나는 경매장을 나오며 중얼거렸다.

    뒤에서 핫세가 어딜 도망 가냐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기로 한다.

    *       *       *

    경매장을 나온 뒤, 나는 창고 건물이 있는 한적한 공터를 찾았다.

    대격변 이후에도 창고들이 모여 있는 구역은 큰 변화가 없다.

    어느 마을에나 가장 안전한 곳에 위치하는 것이 신전과 은행, 창고였으니까.

    나는 내가 분양받은 창고들을 찾았다.

    민첩 옵션이 붙은 잡템들이 그득그득 들어 있는 거대한 창고.

    개인이 임대받을 수 있는 가장 비싸고 튼튼한 창고들이다.

    애초에 창고가 필요할 정도로 아이템이 많은 유저들이 몇 없는지라 창고는 여유분이 꽤 많다.

    그리고 나는 평범한 유저였다면 한 채도 쓸 일 없는 창고 건물을 벌써 셋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어느덧 이렇게 빵빵해졌네. 세월 참….”

    나는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세 채의 창고 건물을 둘러보았다.

    전부 다 그동안 게임을 하며 수집했던 잡템으로 가득 차 있는 창고들이다.

    잡템들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많든 적든 모두 민첩 옵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랄까?

    나는 창고 주변을 한번 쭉 둘러보고는 입구 쪽으로 향했다.

    열쇠가 없으면 절대로 열리지 않는 파괴불가 철문이 이 창고들을 지키고 있다.

    끼긱…

    열쇠로 일곱 개의 자물쇠를 풀고 나서야 창고 문을 열 수 있었다.

    문이 열리자 낡은 먼지 냄새와 가죽, 금속에 바르기 위해 준비해둔 기름 냄새가 뒤섞여 난다.

    나는 창고 저 안쪽의 어슴푸레한 등불 밑으로 걸어갔다.

    목걸이, 안대, 방패, 완갑, 신발, 반지, 장갑, 투구, 귀걸이, 갑옷, 바지, 망토, 가면, 각반…온갖 종류의 아이템들이 산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보인다.

    달그락… 쿵… 빠드득… 바스락…

    어디선가 들려오는 요란한 잡음들.

    그 소리는 아이템들의 산 위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드레이크가 아이템들을 등급에 맞게 정리하고 있었다.

    세무학과 통계학을 전공한 윤솔이 아이템의 수량과 능력치를 도표로 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것도 보인다.

    “드레이크 씨. 그건 C+등급 아이템인데 능력치가 너무 구려서 사실상 C급으로 분류해도 될 것 같아요. 그냥 좌측으로 던져 주세요.”

    “알겠다. 정리한 차트를 보니 의외로 C+등급 이상의 고등급 아이템들이 많았군. 이래서 사람은 정리를 하고 살아야 해.”

    “그러게 의외네요. C등급 아이템보다 C+등급의 아이템이 더 많은 것은. 그래프가 이상하게 꺾이겠는걸요?”

    “예전에 리자드맨들을 한 번에 우르르 잡은 적이 있었지. 거기서 얻은 것들인가 보다.”

    “…에? 리자드맨들을요? PK 하셨어요?”

    “아니. 한때는 리자드맨들이 유저가 아니라 단순한 몬스터였던 시절이 있었거든. 대격변 전에는 말이야.”

    드레이크와 윤솔은 그간 어색함이 꽤 풀린 듯싶다.

    역시 게이머들끼리 친해지는데는 게임 이야기만한 것이 없다니까.

    한편, 윤솔은 차트와 그래프를 작성하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어진이는 이걸 다 뭐에 쓰려고 모으는 걸까요?”

    “음. 내가 얼핏 듣기로는…….”

    그때.

    나는 드레이크와 윤솔이 민첩 아이템의 수량을 파악하는 현장으로 들어갔다.

    “경매 끝났어.”

    산더미 같은 옷들을 짊어진 채 하는 말이다.

    내가 들고 온 옷들을 본 드레이크와 윤솔은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어진. 웬 여자 옷들을 이렇게 사 왔는…아하, 그런 취미가 있었는 줄은 미처 몰랐군. 존중한다.”

    “안 그래도 아까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에 경매장에서 알몸의 남자가 여자 옷을 마구 사고 있다는 고발글이 올라오긴 했었는데 설마….”

    내가 고른 게 아니라 쥬딜로페가 고른 것들이지만 뭐, 딱히 부연설명은 하지 않았다.

    나는 산더미 같은 옷 무더기 위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바둥거리는 쥬딜로페를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말했다.

    “뭐, 사실 이 옷들은 앞으로의 레이드에 꼭 필요한 아이템들이기도 해.”

    우리가 앞으로 걸어갈 길은 던전 고정 S+급 몬스터를 향한 가시밭길.

    그 중 첫 번째 루트는 바로 극도로 추운 던전이다.

    예전에 넘었던 북대륙의 ‘가혹한 설산’보다도 훨씬 더 맹렬한 추위가 지배하는 곳.

    그런 곳을 가기 위해서는 따듯하면서도 가벼운 ‘노르딕페이스’의 옷들이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무게가 거의 나가지 않으면서도 보온성을 갖추고 있기에 방어구 밑이나 위에 덧입기 딱 좋으니까.

    “…이런 걸 입으라고?”

    드레이크는 검은 망사가 붙어 있는 레이스 달린 원피스를 집어 들었다.

    밑으로는 가터벨트가 함께 동봉되어 있다.

    심지어 머리에 쓰는 털모자는 길고 검은 토끼 귀.

    무려 민첩 옵션도 붙어 있으니 궁수나 암살자 직업에게 딱이렷다.

    “Help yourself.”

    나는 드레이크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한편.

    [뿌애앵!]

    쥬딜로페는 서글프게 울기 시작했다.

    옷은 많이 샀는데 껴입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욕심 많은 여왕은 십 수 벌이나 되는 드레스를 한 번에 입겠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그만 동그란 공처럼 뚱뚱해지는 사태를 초래해 버렸다.

    데굴데굴데굴……

    발을 헛디디자마자 경사진 창고 바닥을 굴러가는 쥬딜로페를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진정해. 그거 다 못 입어. 적당히 부하들에게 나눠 줄 줄 알아야지.”

    나의 충언을 들은 여왕은 무척이나 상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쥬딜로페는 드레스 한 벌을 들고 아장아장 걸어간다.

    바로 윤솔이 있는 곳이다.

    “어머? 이거 언니 주는 거야? 고마워~”

    윤솔은 쥬딜로페가 주는 오프숄더 드레스를 받아들고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아이템을 착용하자 마치 날개를 단 것처럼 완벽한 핏이 선보여졌다.

    아까 무대 위에서 워킹을 하던 모델 부럽지 않은 기럭지.

    쥬딜로페는 자신의 옷이 빛을 내는 듯한 광경에 손뼉을 치며 웃는다.

    이내.

    -띠링!

    <여왕이 그대를 가신으로 삼고자 하는 의지를 보입니다>

    윤솔의 귀에 알림음이 떴다.

    그러자 윤솔은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쥬딜로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언니는 너랑 종이 달라서 와두두가 될 수 없어.”

    아니나 다를까, 윤솔의 귓가에 이어지는 알림음.

    <종이 달라서 포자에 감염되지 않습니다>

    <가신화(家臣化)에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띠링!

    <여왕의 의지가 생각보다 강력합니다>

    <여왕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왕은 꾸준한 성격입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

    쥬딜로페의 억지(?)는 도저히 이겨 낼 수가 없다니까.

    결국. 윤솔 역시도 나와 같은 절차를 밟게 되었다.

    -띠링!

    <귀하와 벌레의 연관성을 검색 중…>

    <검색 결과를 1건 찾았습니다>

    <연결되어 있는 SNS 계정의 친구 수 3000 돌파!>

    <축하드립니다! 이 정도면 훌륭한 인싸 ‘리얼충(蟲)’입니다>

    <‘일정 부분’만 벌레 속성을 가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일정 부분’만 감염이 진행됩니다>

    <와두두 여왕의 포자에 성공적으로 감염되었습니다!>

    <여왕의 가신으로 임명되셨습니다!>

    “…에? 내가 벌레?”

    윤솔은 자신의 머리 위에 뿅 하고 돋아난 작은 주황버섯을 보며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힐끗-

    쥬딜로페의 다음 목표는 윤솔의 옆에 있던 드레이크였다.

    “뭐, 뭐야? 나도? 나는 됐다. 몸에 버섯 달고 다니는 해괴망측한 취미는 없….”

    하지만 드레이크의 거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쥬딜로페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띠링!

    <귀하와 벌레의 연관성을 검색 중…>

    <검색 결과를 1건 찾았습니다>

    <현재까지의 게임 플레이 시간 1만 시간 돌파!>

    <축하드립니다! 이 정도면 명백한 ‘게임충(蟲)’입니다>

    <‘일정 부분’만 벌레 속성을 가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일정 부분’만 감염이 진행됩니다>

    <와두두 여왕의 포자에 성공적으로 감염되었습니다!>

    <여왕의 가신으로 임명되셨습니다!>

    드레이크 역시 나와 똑같은 절차를 밟아야만 했다.

    “윽! 뭐야 이 뿔버섯은? 왜 이런 민망한 곳에 돋아나는 거냐!”

    당황하는 드레이크를 본 나는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드디어 동지가 셋으로 늘었군! 나만 당할 수는 없지.

    그동안 오추멜로프의 무한코스튬 반지로 가리고 있던 버섯을 꺼내서 보여 줄까 하다가 말았다.

    “자. 농담은 이만 하고. 준비가 다 되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판을 벌여 보자고.”

    나는 박수를 몇 번 친 뒤 친구들의 앞에 커다란 지도를 쫙 펼쳤다.

    윤솔과 드레이크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지도를 들여다본다.

    “이번에 뭘 잡으려고 하길래 그렇게 진지해?”

    “추운 곳으로 가야 한다고 했었지? 거기서 사는 몬스터라면….”

    나는 친구들의 의문에 한꺼번에 대답해 주기로 했다.

    탁!ㅛ

    내 손가락은 동대륙 쪽에 시뻘겋게 표시된 구역을 짚는다.

    ‘제 7분쟁지역’

    어비스 터미널로부터 동북쪽으로 더 깊숙하게 십 수 킬로미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불타는 황무지 한복판임에도 불구하고 서릿발이 박혀 있는 혹한의 땅.

    나는 대격변 이후 새롭게 등장해 이 구역의 지배자가 된 몬스터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리치왕(Lich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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