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31화 (331/1,000)
  • 332화 의외로 이 게임은 룩겜입니다 (3)

    패션쇼의 열기는 점점 더 무르익고 있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모델들이 입은 의상은 점점 더 현대의 감각과 멀어진다.

    인류의 것을 아득히 앞서가는 패션.

    가령 네모나 세모 모양의 천을 뒤집어쓰고 나온다거나 전신이 거울로 된 옷이라거나 어깨 뽕이 마치 뿔처럼 과하게 툭 튀어나와 있다거나 성게처럼 전신에 긴 가시들이 돋아나 있다거나….

    실로 아스트랄한 패션들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예쁘다며 난리다.

    ‘……저게 예쁘다고?’

    나만 빼고.

    나는 무대 위에 펼쳐지는 엄청난(?) 의상들에 전율했다.

    패션이 원래 그들만의 리그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이것들 중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옷은 단 하나도 없었다.

    덤불 같은 것을 전신에 두르고 지나가는 모델을 보자니 경악밖에 안 나온다.

    저건 마치 길리슈트가 아니던가!

    하지만.

    “멋지다! 마치 야생 그 자체의 거칠음이 느껴져!”

    “흡사 부쉬에 숨어 있는 암살자의 긴장감! 그래 이게 스릴이지! 패션은 스릴인 거야!”

    “오오, 이것이야말로 감추는 것과 노출이 동시에 가능한 의상이 아닌가!”

    “몸을 감춘 채 적을 향한 살의를 노출한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닌 듯한, 실로 모순적인 아름다움이야!”

    사람들은 그런 모델들에게 열광하고 있다.

    ‘뭐라는 거야…….’

    남들이 나를 향해 이런 시선을 보내오는 것은 익숙하지만 내가 남에게 이런 시선을 보냈던 적은 드물다.

    나는 점점 더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호에엥- 포에엥-]

    쥬딜로페는 모델들이 입은 옷을 보며 연신 박수를 친다.

    …뭘 좀 알고 이러는 건가 얘?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보군.’

    내가 모르고 또 앞으로도 모를 세계.

    내가 의문에 빠져 있는 동안 모델들의 옷은 점점 더 괴랄해지고 있었다.

    전신에 가죽 간판 같은 것을 덕지덕지 붙인 여자가 나오는가 하면 커다란 빵봉투를 뒤집어쓴 남자도 나온다.

    휘핑크림을 몸에 바른 뒤 씨리얼을 잔뜩 묻힌 것 같은 숄이 나폴거리는가 하면 악어 한 마리의 가죽을 통째로 벗겨서 뒤집어쓴 느낌의 롱패딩도 나왔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심지어 어느 시점부터는 모델들이 아예 벗고 나오기 시작했다.

    몇몇 치명적인 부분만을 가린 옷들, 그 외에는 전부 알몸.

    그것을 본 관람객들은 모두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상에! 저 아방가르드하고 전위적인 디자인이라니!”

    “씨스루를 넘어서 그냥 스루로군.”

    “진보와 보수를 동시에 재현했어. 마치 민주당과 공화당이 손잡은 듯한 눈물겨운 감동이야.”

    “노출도가 극한까지 올라갔지만 어째서인가 보온도 돼.”

    “게임이 아니었더라면 선보일 수 없는 새로운 장르야!”

    다들 정신없이 칭찬하기에 바쁘다.

    ‘……저게 나랑 뭐가 다르지?’

    또 나만 빼고.

    나는 무대 위에서 거의 다 벗고 있는 모델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 사람들과 나의 차이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나도 벗었고 쟤네도 벗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얼굴과 몸매, 신체 비율 정도?

    그 정도 미세한 차이가 뭐가 중요하다고.

    “아니, 벗고 다니는 건 똑같은데 왜 나는 변태라고 욕하고 저것들은 패션이라면서 찬양하는 거야? 누가 봐도 공연음란죄인데.”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투덜거리자 그것을 들은 핫세가 발끈했다.

    “무식한 소리! ‘알몸’과 ‘알몸 룩’은 엄연히 다른 거야!”

    “…뭐가 다른데?”

    “달라! 아무튼 다름! 그럼 당신은 지금 ‘씰룩씰’이랑 ‘씰룩씰룩’이 같다고 생각하는 거야?”

    “……?”

    핫세를 위시한 패션피플들은 나를 향해 격렬한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아앗!”

    핫세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다음으로 무대에 오른 것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중국풍의 원피스 ‘치파오’였다.

    그 세련되고 우아한 디자인은 무대 주변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곳에 잡아끌 정도.

    핫세는 재빨리 손을 들어 외쳤다.

    “1억.”

    그녀가 입찰가를 외치자 다들 자신 없는 표정으로 팻말을 내린다.

    저 원피스가 너무 예뻤지만 핫세의 집념과 재력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1억 5백만.”

    핫세의 입찰가에 최소 단위만 붙여서 상회입찰을 하는 손이 있었다.

    이번에도 나다.

    내가 피식 웃자 핫세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그녀는 나에게 자금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승부욕에 제대로 불이 붙을 수밖에.

    핫세는 통 크게 최소 단위의 몇 배나 되는 가격을 붙여 상회입찰했다.

    “1억 3천만.”

    “1억 3천 받고 500 더.”

    나는 얄밉게도 핫세의 금액에 계속해서 최소 단위의 추가금을 얹었다.

    핫세는 발끈해서 팻말을 든다.

    “1억 5천!”

    “사장님 여기 오백 한 잔 더 주세요.”

    나는 너무나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것을 받았다.

    최저가 5천만의 원피스는 순식간에 2억을 돌파했다.

    ‘돈 좀 있다 이거냐?’

    핫세는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본다.

    그녀의 자존심에 제대로 불씨가 점화되었다.

    ‘어디 얼마나 있나 보자. 내 용돈이….’

    핫세는 경매 시간을 알리는 초시계를 한번 힐끗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없다.

    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어오르는 무식쟁이의 코를 죽여 놓으려면 확실한 한 방이 필요했다.

    “5억!”

    핫세는 통 크게 불렀다.

    애초에 저 원피스에 투자할 마음이 있었던 금액 중 최고 높은 커트라인이었다.

    그 엄청난 기세에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핫세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돈은 중요치 않다.

    원하는 디자인이 있으면 그 정도 값은 치를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받고 5억 500만.”

    나는 너무도 쉽게 그런 핫세를 추격해 온다.

    내가 들어 올린 상회입찰 팻말에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부들짱부들퀸…

    핫세가 나를 내려다보며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주었다.

    “쫄리면 뒈지시던가.”

    나는 이미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옷 중에서 치파오와 비슷한 옷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 다리에 대 보고 입는 시늉을 했다.

    “이런 걸 왜 이렇게 비싸게 주고 사는지 원.”

    사실 뭐 누가 뭘 사는 데 얼마를 쓰든 별 관심은 없다. 내가 참견할 바도 아니고.

    이건 그냥 단순한 도발이었다.

    그러자 내 도발을 들은 핫세의 얼굴이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 희귀한 치파오 스킨을 저따위 변태가 입게 둘 수는 없어!’

    그녀는 재빨리 팻말을 들어 올렸다.

    “10억!”

    순식간에 경매가를 두 배로 올리는 핫세다.

    좌중이 헛바람을 집어삼키려는 순간.

    “10억 받고 500 추가.”

    그것을 순식간에 턱 막아 버리는 나의 상회입찰 선언이 있었다.

    ‘얼마든 불러 봐라.’

    나는 절대적인 자신감으로 핫세를 상대하고 있다.

    이대로 물러나서야 패션 피플이자 재벌 3세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부들부들 떨던 핫세는 결국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고야 말았다.

    “20억!”

    그녀는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오늘 그녀가 가용 가능한 골드를 모두 꺼내든 것이다.

    순간.

    “……!”

    핫세는 자기가 내질러 놓고도 스스로 깜짝 놀라 헉 소리를 내고 말았다.

    20억이라는 돈은 너무 크다.

    눈앞의 저 치파오가 예쁘기는 했지만 고작 게임 아이템 아닌가.

    아무리 그녀가 재벌가의 여식이라지만 그래도 용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는 처지.

    게임에 이런 큰돈을 투자한다면 분명 엄한 추궁이 잇따를 것이다.

    ‘하, 하지만 괜찮아. 분명 저 변태 녀석이 500을 붙여서 추격해 올 테니까.’

    핫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로 그때.

    “죽습니다~ 이번은 양보하죠 뭐.”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팻말을 바닥에 툭 내던져 버렸다.

    핫세의 얼굴이 한 번 더 분노로 일그러진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최종 낙찰을 알리는 경매봉 소리가 울려 퍼졌다.

    [축하드립니다. 낙찰되셨습니다.]

    지배인은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핫세에게 치파오를 보냈다.

    그 뒤에서는 노르딕페이스의 디자이너들이 기쁨의 비명을 지르는 것이 보였다.

    “축하해.”

    나 역시 핫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쥬딜로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쥬딜로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실 애초에 그녀는 이번 치파오 원피스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핫세를 경매로 이기는 것만이 목적.

    핫세는 이번 경매 한 번으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게임머니를 소진하는 바람에 더 이상 경매에 참여할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그 뒤는 쥬딜로페의 무대가 되었다.

    이제 이 무대는 온전히 나의 것이다.

    오직 나만을 위한 쇼!

    재벌 2세들이고 패션 피플들이고 이제 모두 그냥 3등석의 스탠딩 관객에 불과하다.

    넘쳐나는 돈! 분노에 떠는 경쟁자!

    완벽한 상황이 조성되자 쥬딜로페의 기분도 상당히 좋아진 듯하다.

    -띠링!

    <정적(政敵)에게 한 방 먹인 여왕이 크게 만족스러워합니다>

    <멸족의 설움이 아주 조금 옅어집니다>

    <여왕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내가 마음껏 경매품을 사들이는 것을 본 핫세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빽 외쳤다.

    “환전! 환전을 해 와야겠어!”

    인벤토리 안의 게임머니들은 텅 빈 상태다.

    현실의 돈으로 게임머니를 충전하려면 꽤나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으며 시간도 은근 오래 걸린다.

    핫세는 경매에 참여하기 위해 재빨리 인터넷 창을 띄우고 아이템과 골드가 거래되는 사이트에 접속했다.

    하지만 대부분 판매되고 있는 게임머니는 액수가 적었기에 여러 번으로 나뉘어 구매해야 했다.

    그리고 결제 대기와 실제 입금 과정에서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

    “아아악! 이러면 경매에 참여 못 하잖아! 저 변태 놈을 이겨야 하는데!”

    핫세는 굽 높은 힐로 바닥을 구르며 외쳤다.

    그리고.

    톡톡…

    그런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하나 있었다.

    “저 게임머니 많아서 바로 환전해 드릴 수 있는데.”

    소요 시간 없이 바로 환전이 가능한 남자.

    (수수료가 좀 쎄긴 하지만)

    역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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