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30화 (330/1,000)

331화 의외로 이 게임은 룩겜입니다 (2)

오후 경매가 시작되었다.

9등신 몸매를 가진 모델들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무대를 활보한다.

인공지능으로 무대 워킹을 하는 모델들의 무빙은 실로 감탄을 자아낼 정도.

그녀들이 하늘하늘한 드레스 또는 파격적인 노출을 자랑하는 원피스 등을 입고 나올 때마다 관객들 사이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세상에! 가리는 동시에 노출을 하는 저 전위적인 디자인이라니!”

“저런 디자인이라면 따듯함과 동시에 나의 몸매를 드러내 과시할 수 있겠어!”

“현실에서는 구현 불가능한 디자인이다!”

“너무 예뻐! 저건 꼭 사야 돼! 게임 아이템이라서 그런가 가격도 착하다구!”

글로는 묘사할 수 없는 파격적인 디자인들이 연달아 시연된다.

어떻게 보온성을 유지하면서도 노출도 있는 의상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노르딕페이스’라는 브랜드는 지금 그것을 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5천만, 상회입찰입니다.”

“6천 5백만.”

“7천!”

“7천 5백만으로 입찰.”

“8천. 손 들어 봅니다.”

그 분위기와 아우라를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며 압도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혼자서 모든 매물들을 모조리 상회입찰 해 버리는 존재.

“이익! 대체 옷을 몇 벌이나 사려는 거야!”

몇몇 아가씨들이 옷을 빼앗기 위해 상회입찰을 알리는 팻말을 높게 들어 보였지만.

“그것보다 500만 골드 더.”

“그보다 500만 더.”

“그것 500 더.”

“그, 오, 더.”

“궈더.”

“궏.”

그는 얄밉게도 경매 종료 임박 시점을 노려 최소단위인 500만 골드를 덧붙여 아이템을 쓸어 간다.

게다가 도중부터는 귀찮았는지 말까지 이상하게 줄여버렸다.

게임 속인지라 브랜드 아이템이라고 해도 가격이 저렴하다지만, 그래도 이런 엄청난 물량을 혼자 독식하는 걸 보니 꽤나 정상이 아니다.

아이템을 제작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지라 수량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이곳 쇼에 모인 이들은 모두 이를 갈고 있었다.

“1억 6500만. 입찰합니다.”

또 한 번 높게 손을 드는 사람.

오전부터 오후까지, 패션쇼에 나온 모든 여자 옷들을 싹 쓸어가고 있는 존재.

압도적인 재력.

천재적인 입찰 타이밍.

귀신 같은 경매 전략.

무엇보다 엄청난 것은 그가 바로 남자라는 것이다.

……그것도 알몸의!

‘휴, 경매는 오랜만이네.’

나는 패션쇼 무대 맨 앞에 앉아서 아까부터 계속 상회입찰을 알리는 팻말을 들어 올려야 했다.

[꺄르륵! 꺄륵!]

내 망토자락 뒤에 숨어 있는 쥬딜로페가 방금 산 코트를 만지작거리며 웃는다.

‘쪼끄만 한 게 옷 욕심은…’

나는 쥬딜로페의 옷 사랑에 혀를 내둘렀다.

아무런 방어력 증가 옵션도 없는 저런 방어구(?) 들을 뭐에 쓰려고 이렇게 사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쥬딜로페에게 옷을 사 줄수록 호감도가 오르는 것은 분명했기에 나는 이번에도 손을 들었다.

‘돈은 많이 나가지만…나중에 2차 대격변을 통제할 수 있는 녀석은 이 녀석뿐이니.’

대격변의 시장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그것을 손에 쥐고 흔들기 위해서는 지금의 출혈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거기에 고정 S+등급 몬스터를 잡기 위해서는 어차피 이 옷들이 필요하긴 하다.’

나는 간만의 경매 스킬을 모두 활용했다.

사실 경매는 단순히 돈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물건 감정 능력. 상대방과의 기 싸움. 입찰 타이밍. 적의 상회입찰 흐름을 끊는 기세. 경매사의 미세한 몸 움직임까지 포착하는 눈. 그리고 적당한 때에 죽을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나는 지난 세월동안 경매장에서 퀘스트 아이템이나 히든 피스 등을 놓고 벌어지는 치열한 경매에 몇 번인가 참여한 적이 있고 수없이 많은 유혈사태들을 봐 온지라 이런 시스템에는 익숙했다.

‘……경매는 전쟁이지.’

NPC들은 경매장에서 그 어떠한 행위도 제지하지 않는다. 돈만 제대로 낸다면 말이다.

‘노르딕페이스’가 게임 상에서 첫 홍보를 하겠다고 이런 쇼를 개최한 것은 분명 앞서 나가는 전략이지만…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을 하겠다고, 또 게임 아이템이라고 옷의 가격을 낮게 책정한 것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나 같은 사람은 현실의 옷보다는 게임의 옷을 더 좋아하니까 말이야.’

즉 현실의 옷보다 게임 옷의 가격을 낮게 책정하면 지금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는 소리다.

게임 룩덕들은 현실의 몸보다 게임 캐릭터를 예쁘게 꾸미는 것을 더 중요시하는 경우도 많거든!

지금은 고인물이 나 하나니 망정이지, 나중에 가면 이런 패션쇼는 금방 터져 버릴 게 분명하다.

몰려드는 인원을 수용하지 못하고 말이다.

한편.

쇼가 진행되고 있는 파티룸 안에는 웅성거림이 가득했다.

“뭐야? 남자야? 왜 알몸으로 있지?”

“아까부터 줄창 여자 옷을 사들이고 있어…더러워.”

“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유튜뷰에서 유명한 사람 아니야? 알몸으로 다니는 걸로 유명한….”

“근데 왜 여자 옷을 저렇게 많이 사고 있지?”

“역시 저 변태는 컨셉이 아니었어…그는 ‘진짜’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것들을 전부 무시했다.

“……너만 좋으면 된단다.”

나는 손을 뻗어 등 뒤에 있는 쥬딜로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귓가에 미약한 알림음이 울려 퍼진다.

-띠링!

<‘신상 드레스’를 본 여왕의 호감도가 약간 상승합니다>

<여왕이 브랜드를 꽤 마음에 들어합니다>

<여왕이 ‘신상 원피스’를 가지고 싶어합니다>

“휴, 고르딕사 안 잡았으면 어쩔 뻔했어.”

나는 슬픈 표정으로 무대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올해 내 프로게이머로서의 연봉은 여기다 모두 투자해야 할 것 같다.

‘돈이 없으면 대격변도 못 일으키는 더러운 세상 같으니….’

내가 한숨을 쉬며 입찰 팻말을 들어 올리는 순간!

“5억.”

어디선가 귀를 의심할 만한 액수가 들려온다.

최저가 3천만짜리 원피스의 가격에 5억을 부르는 미친놈이 있다고?

……그것도 게임 아이템에?

고개를 돌리자 금발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 미녀 하나가 나를 내려다보며 경멸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인다.

“룩겜의 가치를 모르는 당신이 한심해.”

웬 외국인 여자 하나가 나를 깔아보고 있었다.

길고 풍성한 금발, 아름다운 이목구비, 늘씬한 자태.

하지만 나는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미모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가 입찰하지 못한 아이템에만 눈길이 갈 뿐이다.

“뭐래. 내가 입찰한 토륨 주괴…아니 신상 원피스 상회입찰하지 마라.”

나는 팻말을 들어 ‘5억 5백만’ 골드를 부르려다가 멈칫했다.

…솔직히 돈이 아깝다.

고개를 들어 무대를 보자 숄이 하늘하늘한 원피스가 보인다.

뭐 모델들이 입으니 예쁘긴 예쁘지만…솔직히 5살짜리 체형의 쥬딜로페가 저것을 사서 어디가 쓰겠는가?

입어 봤자 땅에 질질 끌리게 될 텐데.

그때 옆에 있던 지배인 NPC가 나를 향해 슬쩍 귀띔했다.

[게임 아이템들은 착용자의 체형에 맞게 변화하니 사이즈 걱정은 노우노우.]

“……조용히 해 주세요.”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손 팻말을 만지작거렸다.

입찰 타이밍만 잘 재면 5천만 정도로 무난하게 살 수 있었던 원피스이다.

그것을 저 이상한 여자가 터무니없이 가격을 높여 놓은 것이다.

“죽지 뭐.”

5억이나 되는 돈을 내고 상회입찰 레이스를 따라갈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이번 매물을 스킵해 버렸다.

그러자.

[호에엥…]

뒤에 있던 쥬딜로페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띠링!

<‘신상 원피스’를 놓친 여왕의 호감도가 약간 하락합니다>

“…돌겠네 진짜.”

그동안 다 사 주다가 한번 안 사 주니 바로 이 모양이다.

너무 응석을 받아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태어난 직후 보육원에 잠시 맡겼던 것이 미안해서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심지어 보육원의 시설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서 맡긴 것이니!)

한편.

모델들은 계속해서 다음 디자인의 옷들을 입고 나온다.

경매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다 입을 모아 그 디자인들을 칭송했다.

“꺄악! 이번 신상도 너무 멋져!”

“게임 속에서만 단독 선공개되는 디자인이래!”

“근데 가격이 진짜 현실과 완전 동떨어졌다! 작가가 명품 가격 잘 모르나 봐!”

한편 나는 그것을 보며 계속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애써 올린 쥬딜로페의 호감도를 다시 떨굴 수는 없으니 이제 계속 사야 한다.

‘…진짜 저게 예쁜가?’

나는 지갑을 열며 수백 번, 수천 번 고민하고 또 번뇌했다.

예전에 동대문에서 덩치 큰 아저씨들에게 강매 당했을 때 말고는 옷에 큰돈을 써 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쥬딜로페의 감성은 확실했다.

녀석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저 멀리 있는 핫세를 노려보고 있었다.

“입찰합니다.”

나는 다음 차례로 나온 원피스 하나를 사서 쥬딜로페에게 선물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쥬딜로페의 호감도는 제자리 그대로였다.

그녀는 이제 쌓아 놓은 옷들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다만…….

-띠링!

<여왕이 적개심을 표하는 대상이 생겼습니다>

<상대를 처치 시 호감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아무래도 쥬딜로페는 옷보다 더 관심이 가는 대상이 생긴 것 같다.

그것은 까다로운 표정으로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고르고 있는 아까의 그 외국인 여자였다.

“이봐, 핫세! 방금 그 동양인 표정 봤어?”

“크크크, 벙 찐 표정이 재밌더라.”

“알몸으로 여자 옷을 수집하는 것을 보니 변태인 모양인데 제대로 한 방 먹였어.”

“압도적인 재력 차이를 보여 주자고!”

“그런데 방금 걸로 게임머니를 너무 많이 소모한 것 아냐? 환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내가 해 올까?”

그녀의 친구로 보이는 이들이 주변에 바글바글하다.

‘…이름이 핫세인 모양이지?’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지만 사실 크게 관심은 없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여왕이 저 여자를 적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차라리 잘 됐네. 밑도 끝도 없이 옷을 사들이느니 한 명만 상대하면 되는 거니까.’

룩겜을 추구하는 이를 패션(?)으로 이긴다라.

보스 몬스터만 잡던 나에게는 조금 생소한 레이드다.

‘황금이 얼마나 남았지?’

아직 현실 돈으로 환전하지 못한 게임머니, 황금들은 인벤토리에 가득 가득 쌓여 있다.

레벨 74라는 독보적인 수치가 가진 인벤토리는 일반적인 유저들의 것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니 나의 재력은 알 만한 셈이다.

나는 쥬딜로페를 내려다보았다.

녀석은 두 주먹을 꽉 쥔 채 저 멀리 핫세를 바라보며 씩씩거리고 있다.

어찌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커다란 두 눈에는 눈물마저 그렁그렁하다.

‘가진 건 쥐뿔도 없는 여왕이지만 자존심 하나는 대단하구만.’

눈을 뜨자마자 세상에 홀로 남았고 또 영문도 모른 채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가장 높은 곳에 있다가 한순간에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했으니 마음속이 공허할 만도 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쥬딜로페가 이 세상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존재.

멸종한 종족의 여왕 곁에 남은 ‘최후의 가신(家臣)’

따라서 나는 약간의 사명감을 품은 채 쥬딜로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솔직히 패션은 잘 모르겠는데, 경매는 무조건 이기게 해 줄게.”

아까는 실수, 이제는 여왕의 체면을 세워 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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