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29화 (329/1,000)
  • 330화 의외로 이 게임은 룩겜입니다 (1)

    힘이란 무엇인가?

    문제는 하나지만 답은 많다.

    힘.

    [명사]

    사람이나 동물이 몸에 갖추고 있으면서 스스로 움직이거나 다른 물건을 움직이게 하는 근육 작용, 정지하고 있는 물체를 움직이게 하고 움직이고 있는 물체의 속도를 변화시키거나 아주 정지시키는 작용,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나 역량, 일이나 활동에 도움이나 의지가 되는 것, 약물 따위가 인체에 미치는 효력이나 효능, 개인이나 단체를 통제하고 강제적으로 따르게 할 수 있는 세력이나 권력, 사물의 이치 따위를 알거나 깨달을 수 있는 능력, 한 나라의 국력이나 세력, 감정이나 충동 따위를 다스리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 자연 현상이 일어나는 작용의 세기나 그것이 다른 사물에 영향을 미치는 작용,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여 세상일에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아니하는 작용, 물건 따위가 튼튼하거나 단단한 정도……

    열서너 가지가 넘는 다양한 용례로 쓰이는 것이 ‘힘’이라는 단어고 또 그 정의이다.

    영어 단어로도 힘을 뜻하는 것들은 다양하다.

    strength, energy, force, brawn…

    그만큼 힘이라는 것의 개념은 다양한 상황에서 다채롭게 변주되어 이해되고 또 통용되는 것임에 분명한 것이다.

    …….

    하지만 이곳에서는 다르다.

    힘=돈

    너무나도 명확한 질서와 정의가 존재하는 곳.

    그곳은 바로 ‘경매장’이다!

    경매장에서는 돈, 그중에서도 현금을 가진 놈이 왕이다.

    가장 쎈 놈이고, 가장 잘난 놈이면서도, 가장 고귀한 놈이 바로 돈 가진 놈인 것이다.

    돈이 없으면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남이 꿈을 이루고, 남이 웃고, 남이 환호하고, 남이 쟁취하는 것을 손가락 빨며 구경할 수밖에 없다.

    돈 없는 놈은 그 무엇 하나 손에 쥘 수 없으며 아무것도 얻어갈 수 없는 세계.

    실로 간단하며 실로 냉정하지 아니한가!

    가히 자본주의의 심지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       *       *

    커다란 샹들리에가 백팔 개의 각도로 화려한 불빛을 뿌리는 파티룸 안.

    우아하게 꾸며진 무대 앞에 깔끔한 원목 의자들이 놓여 있다.

    이곳은 경매장으로 유저들은 이 공간을 관리하는 NPC들에게 수수료를 내고 물건을 경매에 부칠 수 있다.

    이런 식의 민간 경매들은 마을 전체에서 꽤나 많이 진행되는데 오늘 진행되는 경매는 조금 특별했다.

    보통은 마을의 주점이나 간이 천막에서 약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경매이다.

    경매에 주로 올라오는 물품으로는 감정되지 않은 골동품이나 재료 아이템, 희귀한 무기나 방어구, 혹은 퀘스트로 모아 와야 하는 몬스터들의 시체 부속 등등이 있다.

    …하지만!

    간혹 이런 식의 일반적인 경매와는 다른 ‘특별한’ 경매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현실에 있는 기업들이 주최하는 경매로 게임 내에 존재하는 아이템을 판매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홍보의 목적을 띤다.

    가령 유명한 제과 회사에서 신제품을 만들었다면 그것의 맛과 디자인을 게임 속에서도 똑같이 시연하는 것이다.

    의류회사 스포츠 용품 회사 등등에서도 현실에서 만든 신제품과 동일한 디자인으로 게임 속 아이템을 코스튬하여 내보인다.

    시연회(試演會). 쇼(Show).

    그것이 경매의 형식으로 아주 고급스러운 파티룸 안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이곳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당연히 현실 세계에서도 VIP인 이들.

    이런 곳에 관심이 있는 셀럽들은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현실보다 게임에서 먼저 나올 신제품들의 디자인을 대중들보다 먼저 맛보고 입어 보는 것을 최신 유행의 기조로 여겼다.

    그리고 오늘!

    유명한 아웃도어 브랜드 ‘노르딕 페이스’가 새로운 디자인의 옷을 게임 속에서 시연한다.

    이 경매는 패션쇼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모델들이 옷을 입고 무대에 뽐내듯 서 있으면 수많은 셀럽들이 그 옷을 입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현실에서는 기술적인 문제로 형용키 어려운 수많은 디자인들이 이곳 게임 세계에서는 빛을 발한다.

    패션에 관심이 있는 셀럽들이라면 당연히 이번 경매 기회를 놓칠 수 없는 것이다.

    일반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철저한 ‘그들만의 리그’랄까?

    아니나 다를까.

    ‘노르딕페이스’가 경매 패션쇼를 시작하기 전, 경매장으로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다.

    대부분은 여자였고 그녀들은 방어력이나 효율성 따위는 철저히 무시한 드레스 등을 입고 있었다.

    그녀들은 호호깔깔 웃으며 수다를 나눴다.

    “이번 노르딕페이스 패션쇼 진짜 기대된다.”

    “맞아. 디자인과 실용성을 동시에 갖춘 걸로 유명하잖아.”

    “입으면 진짜 엄청 따듯해. 추운 북방의 나라에서 시작된 브랜드답게 보온성이 정말 좋아.”

    “하지만 그러면서도 북방계열 사람들의 흰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를 더욱 강조해 주기도 하지.”

    “노출과 보온성을 동시에 잡을 수 있다니. 이런 디자인이 가능한 브랜드는 노르딕페이스 밖에 없을 거야!”

    “현실에서는 구할 수 없는 디자인이라니 게임 속에서라도 마음껏 입어야겠어! 대중들이 얼마나 나를 부러워할까!”

    그때.

    경매장 입구로 마차를 타고 오는 여자가 있었다.

    긴 금발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여자.

    스탯 증가 옵션은 없지만 화려한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멋진 마차에서 내린다.

    ‘핫세 하티슨 다닐로바’

    우즈베키스탄의 요식업 재벌로 유명한 다닐로바 가문의 여식이다.

    그녀는 두터운 뿔테안경을 고쳐 쓴 뒤 경매장 입구를 쳐다보았다.

    “경매 시작했나요?”

    그러자 마침 경매장 안으로 들어가려던 여자들이 친한 척을 하며 핫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얘, 왜 이제 왔어! 이제 막 시작했겠다.”

    “미안. 오빠랑 조찬 약속이 있어서.”

    “어머? 고든 회장님이랑? 멋지다. 여전히 자상하시구나.”

    “자상은 무슨. 요리사인 주제에 집에서는 요리 한번 안 하는 사람인데.”

    핫세는 웩 하는 표정으로 혀를 내밀어 보이고는 이내 친구들과 함께 ‘노르딕페이스’의 패션쇼 및 경매장을 찾았다.

    한편.

    함께 있던 친구들 중 드물게 끼어 있는 몇몇 남자들은 그런 여자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다.

    “아니, 옵션도 구린 아이템들을 그냥 디자인만 보고 산단 말야? 나 참. 아무리 돈 많고 사냥에 관심 없다고 해도 그렇지. 패션 리더라고 하는 친구들은 당최 이해가 안 돼.”

    그러자, 핫세 다닐로바가 우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남자친구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게임의 ‘최종 콘텐츠’가 뭐라고 생각해?”

    그러자 남자들은 잠시 고심한다.

    “흠. 그야 보스 몬스터를 잡는 거지.”

    “궁극의 무기를 얻는 것?”

    그러자 핫세는 다시 물었다.

    “그걸 다 얻고 난 뒤에는? 모든 괴물들을 다 쓰러트리고 난 다음엔?”

    그러자 남자들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들은 머리를 긁적였다.

    “…으음, 캐릭터를 간지나게 꾸미지 않을까?”

    그러자 핫세는 웃었다.

    “맞아. 게임의 최종 콘텐츠는 결국 ‘룩(look)’이야. 즉 모든 게임은 룩겜인 거지.”

    게이머가 게임의 모든 콘텐츠를 정복하고 난 다음에 으레 하는 것은 캐릭터 디자인이다.

    새로운 스킨이나 예쁘고 멋진 장비들로 캐릭터를 꾸미는 것.

    그것이 바로 룩!

    핫세는 우아한 표정으로 긴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겼다.

    “나는 지금 게임의 ‘최종 콘텐츠’를 즐기고 있는 거야. 몬스터나 잡으면서 노는 것은 하수지.”

    그녀의 말을 들은 남자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핫세의 논리에 설득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미모와 기세에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핫세의 논리에 감화된 친구들은 그녀를 필두로 경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게임 상에서 처음 선보여지는 명품 브랜드 ‘노르딕페이스’의 ‘보온+노출’이라는 환상의 디자인을 보기 위하여!

    …한데?

    […죄송합니다. 오전 경매는 이미 끝났습니다.]

    콧수염이 멋진 파티룸 지배인이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들을 막아섰다.

    핫세는 시계를 보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 10시인데요? 경매가 9시 30분부터 시작되지 않았나요?”

    보통 오전 경매는 오후 1시까지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후 오후 경매가 밤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배인은 여전히 난처한 표정.

    [오전에 제일 먼저 오신 분이 모든 물건을 초스피드로 구매하시는 바람에….]

    “……?”

    핫세를 비롯한 모든 아가씨들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떴다.

    무슨 놈의 경매가 시작된 지 30분 만에 끝난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물건들을 싹쓸이하는 것은 매너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물건을 보고 즐길 시간조차도 없지 않았으니 말이다.

    경매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해도 엄연히 패션쇼를 목적으로 하는 행사다.

    경매 주최자인 ‘노르딕페이스’의 디자이너들도 별로 이 상황을 고까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핫세, 그녀의 추측이었지만)

    ‘…뭐지? 뭔데 그렇게 공격적으로 입찰한 것이지? 적대 브랜드의 디자이너인가?’

    핫세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지배인에게 물었다.

    “그럼 오후 경매는 언제인가요?”

    [2시부터 진행될 예정입니다.]

    “식사 후에 다시 접속하면 되겠네요. 알겠어요.”

    핫세는 사람을 대하듯 NPC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뒤로 돌아 경매장을 빠져나왔다.

    “얘들아. 오전 경매에서 매물 다 쓸어 갔던 놈이 누군지 알아봐.”

    “벌써 알아봤어.”

    핫세가 묻자 한 남자가 그녀의 환심을 사려는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듣자하니 어떤 동양인 놈이 와서 무조건 상회입찰을 외쳤다던데? 미친 듯이.”

    “…업계 관련자야?”

    “아닌 것 같았대. 룩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어떻게 하면 룩에 관심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룩에 관심 없는 듯한 룩이 있다고?”

    게이머라면 패션 센스가 좋든 구리든 간에 누구나 자신만이 추구하는 커스터마이징이 있다.

    아무리 성능이 좋다고 해도 외형이 못생기면 입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이니까.

    ‘대체 뭘 어떻게 입고 다니길래?’

    이것이 핫세의 궁금증이었다.

    하지만 친구의 대답은 신통치 않았다.

    “글쎄. 거기까진 못 알아봤는데….”

    그 말을 들은 핫세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어떤 ‘룩’을 하고 있는 작자인지 모르겠네. 나 같은 룩덕의 심기를 자극하다니 말이야.

    그녀는 뿔테안경 속으로 크고 아름다운 눈을 부릅떴다.

    ‘내가 이번 패션쇼를 얼마나 기다렸는데…이번 노르딕 신상을 가로챈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어!’

    핫세는 오후 경매 때 놈의 얼굴을 꼭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전 경매에서 이 깽판을 쳐 놓은 놈이라면 분명 오후에도 나타날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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