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26화 (326/1,000)
  • 327화 애완남의 일상 (1)

    고정 S+등급 몬스터.

    이 거대한 세계관을 지배하는 열일곱 거신(巨神).

    내가 그들 중 하나를 끌어내리겠다고 선언한 시점으로부터 정확히 한 달 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환한 빛무리와 함께 플레이어 하나가 접속했다.

    윤솔.

    그녀는 초보자 존이 있는 중앙대륙 마을에 발을 디뎠다.

    “…와아. 여기도 진짜 많이 바뀌었네.”

    그녀는 혀를 내둘렀다.

    원래 캐릭터를 처음 생성하고 처음 만나는 마을이 바로 이 마을이다.

    마을이라기보다는 도시에 가까운 거대한 인구밀집지역.

    튜토리얼의 탑이 있는 초보자 존부터 시작해서 커다란 시장, 신전, 도서관, 잡화점 등등이 널려 있는 구역이다.

    ‘유토러스(Utorus)’

    원래 플레이어들은 이 커다란 마을을 중심지로 삼아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모든 퀘스트 아이템, 재료 아이템들이 모여드는 곳도 유토러스의 시장이었고 굵직굵직한 퀘스트의 중심이 되는 NPC들도 전부 다 이곳에 모여 살았다.

    아름다운 건축물과 떠들썩한 시장, 활달한 예술가들, 크고 작은 소란들과 흥겨운 축제.

    도시 ‘유토러스’는 모든 플레이어들의 고향이며 동시에 마음의 안식처였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 살풍경하다.”

    지금 윤솔이 보고 있는 유토러스의 풍경은 그녀가 게임을 막 시작할 당시에 보던 것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모든 플레이어의 고향’, ‘어머니의 도시’라고 불리는 유토러스조차도 대격변으로 인한 여파를 피해가지 못했다.

    거대한 지진은 이 도시를 세 조각으로 쪼개 버렸고 그것은 각각 인간, 리자드맨, 오크의 초보자 마을로 변모했다.

    문명이 가장 발달한 쪽은 인간의 지역으로 웅장하고 정교한 건축물들이 특징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리자드맨과 오크에 비해 인구수가 적어지다 보니 어딘가 황량하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사람 없이 화려한 광장 중앙에 선 채 텅 빈 유령도시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쇠퇴해 가는 고대문명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반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리자드맨과 오크의 마을은 다르다.

    깊은 대균열로 격리되어 있는 세 마을.

    유일한 연결 통로는 낭떠러지 위로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외줄다리가 유일하다.

    그마저도 각 종족의 경비대 NPC들이 지키고 있어 출입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리자드맨들은 넓은 평원 지대에 동양 유목민들의 문화와 흡사한 생활양식을 보인다.

    목책과 토벽으로 마을을 둘러쌌고 그 너머로 천막이나 움집, 간단한 구조의 목조 건물들이 눈에 띈다.

    마을을 돌아다니는 것은 대부분 몸이 날랜 가축이었다.

    오크 족의 문화는 선사시대의 투박한 건축 양식들이 특징이다.

    건축물이라고 할 만한 것은 딱히 없었고 랜드마크로 쓰이는 것은 신관 역할을 하는 주술사의 석탑, 그 외에는 전쟁에서 죽은 오크 영웅들을 기리는 위령비나 뼈로 만들어진 묘지 등이었다.

    대부분의 NPC들은 토굴이나 석굴, 혹은 노숙 생활을 하며 언제나 전의에 가득 차 있다.

    가장 대세인 악마족의 영향일까?

    유저 수도 가장 많아서 마을은 언제나 활기에 넘친다.

    “하루아침에 다른 게임이 되어 버린 것 같네.”

    윤솔은 바뀐 도시 곳곳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맥수지탄(麥秀之嘆)이라는 말이 이렇게 실감된 적이 없다.

    그때.

    “어이.”

    신전 위, 가고일의 석상 위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든 윤솔은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드레이크 씨! 간만이에요!”

    그녀의 앞으로 훌쩍 뛰어내린 이는 바로 드레이크였다.

    윤솔과 드레이크는 악수를 했다.

    “한국 생활은 좀 익숙하세요?”

    “나쁘지 않다. 구단 측에서 숙식 같은 건 전부 제공해 주니 사실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지.”

    드레이크는 ‘닳고 닳은 뉴비’ 구단에 들어온 이후 아예 한국으로 거주지를 옮겨 버린 상태이다.

    윤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어진이는…?”

    “너랑 같이 온 것 아니었나?”

    윤솔과 드레이크는 동시에 팔짱을 꼈다.

    “어진이가 약속 시간에 늦다니 별일이네요. 늘 십 분은 일찍 오는 앤데.”

    “엊그제 통화했을 때 게임머니를 환전하느라 며칠 간 밤을 샜다고 말하더군. 상한가 타이밍을 잡으려면 대기해야 한다나? 어디서 정보를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특정 시간대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 그럼 아직 늦잠을 자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럼 먼저 약속 장소에 가 있을까요?”

    윤솔과 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원래 셋이 만나기로 했던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는 ‘엔젤 인 유어스(Angel In Yours)’라는 이름의 한 키즈카페였다.

    말이 키즈카페지 어린아이를 돌보아 주지는 않는다.

    이곳은 사실 펫을 맡기는 곳으로 현실의 개념으로 따지면…애견호텔에 비유해야 할까?

    윤솔은 엔젤 인 유어스를 찾아가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어진이는 왜 여기서 보자고 했을까요? 여기는 별로 유명한 곳도 아닌데. 사람들이 거의 이용하지 않는 시설이라서 그런가 찾기도 힘들었어요. 차라리 신전이나 시장 입구에서 보자고 하지.”

    그 말에 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아마 뭔가를 그곳에 맡겨두었던 것 같다.”

    “어진이가요?”

    “그렇다. 이번 기회에 그것을 찾으려는 것이겠지.”

    드레이크의 말을 들은 윤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한동안 유토러스의 대로를 걸었다.

    원래라면 마차와 말, 온갖 NPC들로 북적거려야 할 거리는 꽤나 한산했다.

    무기력한 표정으로 계단이나 길가에 널브러져 있는 부랑자들은 NPC인지 유저인지도 구분하기 어렵다.

    하지만 윤솔은 그런 풍경마저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게임 세계라는 게 이렇게 현실감이 넘치는 곳일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을 쭉 떠올려 보았다.

    어비스 터미널에서 비행로, 유령선, 천공섬으로 이어졌던 긴 레이드.

    그 도중 윤솔은 정말 잊지 못할 수많은 추억들을 쌓았다.

    천사 소녀와의 만남과 이별.

    한 종족과 문명의 흥망성쇠를 모두 직접 겪을 수 있었다.

    그러니 이런 세계를 알려 준 친구에게 자연히 고마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을 뷰티 유튜버로 데뷔하게 만들어 준 것 이상으로 고마울 정도다.

    윤솔은 드레이크와 함께 걸으며 이것저것을 물었다.

    “어진이랑 게임 같이 하신 지는 오래 되셨어요?”

    “음. 오래됐다면 오래됐다고 할 수 있지.”

    “그 전에 어진이는 어땠어요? 저처럼 뉴비일 때.”

    “흐음. 지금이랑 별로 다를 건 없었던 것 같은데…그건 왜 묻지? 그를 좋아하나?”

    드레이크가 장난스럽게 묻자 윤솔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약간 우물거리던 윤솔은 이내 시선을 회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좋아하죠 그럼. 친군데.”

    그녀의 대답을 들은 드레이크는 껄껄 웃었다.

    “나 역시도 그를 좋아하지. 의지가 굳고 미래지향적인 친구가 아닌가.”

    “…아아. 맞아요! 맞아요!”

    “어디서 게임 정보들을 알아오는지는 당최 알 수 없지만… 정보를 떠나서 그것들을 실제로 이용하는 기동력과 실행력을 보면 정말 존경할 만해. 전우로 인정할 만한 남자다.”

    드레이크의 말을 듣는 윤솔의 얼굴에는 점점 미소가 번진다.

    “…그렇구나. 남자가 봐도 멋있는 남자구나.”

    윤솔은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째 발길이 조금 더 가벼워진 듯한 느낌.

    …바로 그때.

    “……!”

    윤솔과 드레이크의 대화가 뚝 끊겼다.

    그들은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입을 딱 벌린 채로.

    “아, 아니 이게 무슨…….”

    드레이크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엔젤 인 유어스.

    인간 거주구역 외곽에 존재하는 키즈카페.

    작은 호텔과 같이 아름답고 아담하던 이 보육 시설은 지금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희고 깨끗한 담벼락에는 아홉 개나 되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건물의 외벽에 보이는 모든 창문들은 죄다 박살 나 있었다.

    심지어 안에서는 시커먼 독기들이 매연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는 상태!

    “뭐, 뭐야 대체!? 리자드맨이나 오크의 습격이라도 받은 건가?”

    드레이크는 황급히 엔젤 인 유어스로 달려갔다.

    가끔 있다. 몰래 타 종족의 마을로 들어가 분탕을 치는 테러리스트들이.

    만약 이 경우도 그런 경우라면…….

    “인간의 무서움을 보여 주지.”

    타 종족에 대한 호승심과 적개심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드레이크는 쇠뇌와 화살을 든 채 재빨리 담벼락을 넘어 건물의 모퉁이를 돌았다.

    그가 막 엔젤 인 유어스의 현관에 도착하는 순간…….

    [아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엔젤 인 유어스의 유모이자 원장인 마더 테레라.

    언제나 자애로운 미소로 아이들을 대하는 맘씨 좋은 여성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 눈에 핏발이 선 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꺄아아아아! 나만 빼고 다 죽었으면 좋겠다! 망해 버려라 이놈의 세상…!]

    딱히 위기에 처해서 지르는 비명소리는 아니다.

    그녀는 극도의 신경질과 짜증으로 인해 폭발하고 있는 상태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던 드레이크는 그녀의 기세에 놀라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때.

    희번뜩!

    마더 테레라와 드레이크의 시선이 마주했다.

    대격변으로 인해 맛이 간 것일까?

    언제나 온화한 미소와 함께 덕담을 해 주던 마더 테레라는 드레이크를 향해 죽일 듯 눈을 부라린다.

    [이 손놈 새끼들! 이제는 더 이상 펫 안 받는다! 돌아가! 썩 꺼져! 맡아 줄 생각 없어! 빨리 돌아가!]

    그러자 뒤늦게 도착한 윤솔도 깜짝 놀란다.

    그녀가 힐 마법을 걸어 주자 그제야 마더 테레라는 조금 진정한 듯 소리치는 것을 멈췄다.

    윤솔은 그런 마더 테레라의 손을 잡아 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사장님.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건물 꼴이 왜 이래요? 펫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은 또 뭐고….”

    그러자 마더 테레라는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윤솔과 드레이크에게 하소연을 했다.

    [며칠 전 웬 사악한 빌런이 나타나서 펫을 맡겼는데…그 펫이 날뛰는 바람에 우리 건물이 이 모양이 됐다우…….]

    테레라는 몸을 떨었다.

    [그 무시무시한 놈. 그놈은 악마임이 틀림없어. 나한테 그런 괴물을 떠넘기다니…아아, 나는 그를 받아들이면 안 됐어요. 거부하고 돌려보내야 했어…흑흑흑흑….]

    마더 테레라는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이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았다.

    그녀는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처럼 윤솔에게 안겨 울먹였다.

    드레이크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펫을 맡아 주는 시설도 중요한 시설인데…어떤 사악한 테러리스트가 이런 짓을 했을까.”

    “뭐가 됐든 퇴치해야 할 빌런의 소행임이 틀림없네요. 나쁜 놈!”

    윤솔도 화가 난 표정으로 맞장구쳤다.

    바로 그때.

    훌쩍이던 마더 테레라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녀의 이마에 핏줄이 솟고 눈동자는 잔뜩 팽창한 채 파르르 떨린다.

    [저놈이야! 바로 저놈이라고! 나에게 무시무시한 괴물을 떠맡긴 악마 놈! 죽어!]

    공포로 인해 달달 떨리는 손가락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

    “…!”

    드레이크와 윤솔은 전투태세를 갖춘 채 마더 테레라가 지시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오랜만이야, 친구들.”

    약속시간에 조금 늦게 도착한 내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