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25화 (325/1,000)
  • 326화 악당 연합 (4)

    지저 4만 미터.

    태양빛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아득한 공간.

    대기 중을 으스스하게 떠도는 누런 가스와 지하수가 터져 나와 내리는 짭짤하고 미지근한 부슬비.

    무너지다 만 검은 흙 사이로 불거져 나온 금맥들만이 옅은 황금빛을 드리우고 있다.

    <황천의 유극(遊隙)> -등급: A

    황금빛 광채가 일렁이는 균열(龜裂).

    이 거대한 틈 사이에서는 부글부글 끓는 소리와 함께 황금빛 오오라만이 커튼처럼 일렁이고 있다.

    그리고 그 황금빛을 앞두고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가 열두 개.

    카렐린 강.

    그리고 그를 따르는 열한 명의 동료들이 이 대균열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피부 위에 안개처럼 축축하게 달라붙는 부슬비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혀를 낼름거릴 때마다 찝찔한 맛이 난다.

    “이봐, 카렐린. 정말 괜찮을까?”

    리자드맨 동료 하나가 물어왔다.

    카렐린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약속을 했으니.”

    맨 처음, 동료들은 던전 안으로 들어간 고인물의 뒤를 밟자고 했다.

    황금굴 안에는 다이아몬드도 깨물어 부수는 귀뚜라미들과 그런 귀뚜라미들을 수없이 잡아먹고 사는 거대한 청개구리가 도사리고 있는 만큼 천하의 고인물도 힘들어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인물이 부지기수로 몰려드는 귀뚜라미 군단에, 그리고 거대 개구리의 변화무쌍한 공격 패턴에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는 순간 암습을 해서 죽이고 던전을 독차지하자는 것이 동료들의 의견이었다.

    “조금 비열하다고 생각될 수는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닌가! 우리가 돈을 가져가지 못하면 직원들은 어쩌나?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 세운 회사 아닌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지 않나!”

    동료들은 물었다.

    하지만 카렐린 강은 고개를 저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말은 지긋지긋하군.”

    “…카렐린!”

    “억압받는 소수를 위해 만든 언론사야. 그 자금을 구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어.”

    “이건 게임이잖나!”

    “현실이든 게임이든 간에 말이야. 나는 조금의 부도덕한 짓도 하고 싶지 않아. 고지식한 이상론자라고 느껴지겠지만 미안하네….”

    카렐린 강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러자 열한 명의 동료들은 할 말을 잃고 시선을 떨군다.

    가장 격렬하게 카렐린을 설득하던 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네의 결정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미안하네.”

    “사과할 것 없어.”

    그는 몸을 돌려 옆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툭 내뱉듯 한마디 했다.

    “다들 자네의 그런 면에 반해서 따라다니는 것이니까. …나도 그렇고.”

    동료의 새침한 말을 들은 카렐린 강은 멋쩍게 웃어 보였다.

    리자드맨의 긴 입술로는 웃어도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바로 그때.

    저벅… 저벅… 저벅…

    던전 안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

    카렐린 강이 벌떡 일어나 손톱을 뽑아들었다.

    ‘금광 안에서 나오는 인간들은 모두 죽여라.’

    던전에 들어가기 전, 고인물이 남긴 말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방금 전에도 상당한 레벨의 흑마법사 하나를 베어 죽인 바가 있다.

    ‘…정말 괴물 같은 놈이었지.’

    그 흑마법사 놈은 한눈에 보기에도 꽤나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레벨이 꽤 높아 보였기에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고 리자드맨의 종족 특성인 은신 능력으로 관목숲 사이에 숨어 있었다.

    그러다가 줄사다리를 잡고 올라가려는 놈의 몸을 일격에 토막 쳐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놈은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상태에서도 반격을 해 왔다.

    당연히 가만히 널브러져 죽어 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놈은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욕설과 저주, 극도로 뜨거운 지옥불 마법을 퍼부어 댔다.

    그 덕분에 카렐린 강은 꼬리와 오른팔이 불타 버리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팔, 다리, 꼬리 중 하나나 눈알을 잃은 동료들도 몇몇 있었다.

    오싹…

    그 흑마법사 놈의 희번뜩한 눈알을 떠올리니 새삼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카렐린 강은 이번에는 어떤 괴물이 튀어나올지 경계하며 던전 입구를 주시했다.

    하지만.

    “…짜잔. 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번에 던전에서 나온 것은 고인물 본인.

    …바로 나였다.

    *       *       *

    “뭐.”

    나는 던전 앞을 지키고 있던 열두 마리의 리자드맨을 향해 짧게 물었다.

    ‘내가 약해져 있으면 공격해 올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던전 안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에 올라왔다.

    윤솔, 드레이크 역시도 지금 베스트 컨디션이다.

    내가 눈을 부릅뜨자 손톱을 빼들었던 리자드맨들은 뒤로 조심스럽게 물러난다.

    …한데?

    ‘이것들 상태가 왜 이러지?’

    나는 리자드맨들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대부분은 몸에 치명적인 결절이나 화상을 입고 있었다.

    나는 이내 합리적인 추론에 이를 수 있었다.

    ‘아하. 도망친 조디악을 이놈들이 잡아 준 건가?’

    그렇다면 조디악은 정말로 대단한 놈이다.

    다 죽어 가는 몸으로도 이 까다로운 리자드맨 유저들을, 그것도 열두 마리나 되는 놈들을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다니.

    -흑마법사 하나 도망친 것 못 봤나?

    나는 번역기를 돌린 뒤 깎단으로 땅에 글씨를 써 보여 주었다.

    카렐린 강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더니 뒤를 향해 흘끗한다.

    “…?”

    나는 고개를 돌렸다.

    카렐린 강이 턱짓한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

    혹시 나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뒤 암습을 하려는 게 아닐까 싶어 재빨리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카렐린 강은 그저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다.

    그는 뭘 하냐고 물어보는 듯한 시선으로 다시 한번 같은 방향으로 턱짓했다.

    “……?”

    나는 또다시 카렐린 강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

    저 땅바닥에 뭔가 거무죽죽한 것이 뿌려져 있는 것이 이제야 보인다.

    ‘설마?’

    나는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땅바닥에 나 있는 검은 얼룩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조디악이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한때 조디악이었던 것’이다.

    리자드맨의 손톱은 칼날처럼 길고 날카롭다.

    심지어 표면에는 미늘이 잔뜩 붙어 있으며 수많은 난전을 겪고 난 뒤에는 톱날처럼 까끌까끌해지기도 한다.

    그런 손톱이 한 손바닥에 다섯 개, 양 팔에 총 열 개가 달려있다.

    여기 모인 리자드맨의 머릿수는 열둘.

    그러니 총 120자루의 크고 강력한 미늘톱날을 생각하면 된다.

    그것들이 아마 조디악의 전신을 다지고 다지고 또 다져 놓았을 것이다.

    살점 토막 하나 건져 가지 못하고 얼룩이 되어 흙에 스며들 정도로.

    “음. 아주 함박 스테이크…아니 거의 고기 쥬스를 만들어 놨네.”

    시체가 이 지경이 되었다면 사망 패널티도 클 것이다.

    나는 120% 만족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짤그랑-

    나는 카렐린 강의 앞에 자루 하나를 던졌다.

    약속한 의뢰 대금이다.

    ‘…의외야.’

    솔직히, 그들이 배신하지 않고 자리를 지켜 준 것은 예상 밖의 결과였다.

    몰래 뒤따라오는 적을 자연스럽게 족칠 수 있는 765개의 루트를 계산한 보람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 덕에 도망치는 조디악을 죽일 수 있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잘 된 일이다.

    한편.

    내가 던전 자루 속을 확인해 본 리자드맨들의 눈이 커졌다.

    레글리의 농장이었다면 저 안에 커피 찌꺼기만 가득했겠지만… 나는 그런 악덕 고용주는 아니다.

    카렐린 강은 진심으로 놀란 듯 외쳤다.

    “MAN AH!”

    많아. 그렇다. 많다는 뜻이다.

    카렐린 강은 당황해서 횡설수설 하다가 내가 그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땅바닥에 글을 썼다.

    -왜 이렇게 많이 주나?

    나는 그저 빙긋 웃을 뿐이다.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은 던전 안에서 얻은 보상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벨럿이 떨군 몇 개의 금화 자루를 주워 온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것만 해도 그들에게는 엄청난 돈일 것이다.

    나는 열두 마리의 리자드맨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쩨쩨하지 않아.

    내가 땅에 적은 메시지를 본 리자드맨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난다.

    나는 씩 웃었다.

    저들은 앞으로도 내 말을 듣게 될 기회가 있었으면…하고 바라게 될 것이다.

    왜냐고? 나는 돈이 되니까.

    정직한 놈이고 비겁한 놈이고 돈 좋아하는 것은 똑같다.

    영웅도 악당도 돈은 필요한 법이다.

    돈은 가장 좋은 친구이며 어지간해서는 배신하지 않는다.

    나는 땅에 메시지를 추가했다.

    -다음에 또 부탁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것을 본 리자드맨들은 잠시 저희들끼리 수근거린다.

    이내, 카렐린 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치고는 믿을만 하군. 언제든 불러라.

    누가 보면 현실 세계에서도 리자드맨인 줄 알겠다.

    이윽고.

    보상을 모두 챙긴 리자드맨들은 자리를 떴다.

    내가 준 금화는 열두 사람의 몫으로 배분되지 않고 카렐린 강 하나의 인벤토리로 들어갔지만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문제 삼지 않았다.

    카렐린 강은 꽤나 신뢰받고 있는 리더인 듯하다.

    “…리자드맨들은 이용할 곳이 많지.”

    나는 그의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팔랑거리며 말했다.

    대격변 전의 리자드맨들은 지능이 낮은 몬스터에 불과했다. 약간의 푼돈만 있으면 용병으로 부릴 수도 있는.

    예전에 몇몇 리자드맨들이 다른 몬스터가 흘린 금화를 주우려다가 절벽 밑으로 떨어지기도 했었지 않은가.

    하지만 대격변 이후 플레이어들이 리자드맨으로 바뀌었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리자드맨 캐릭터는 키우는 데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늘 자금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

    여전히 리자드맨들을 포섭하고 부리는 데에는 돈이 최고다.

    “또 보지. 진화 덜 된 원숭이들.”

    도르래에 탄 카렐린 강은 짧게 말했다. 내가 아니라 드레이크를 향해서 한 말이었다.

    “노려보긴 뭘 노려 봐, 더러운 도마뱀 놈들이. 확 등팍에 화살을 박아 버릴까 보다.”

    드레이크는 멀어지는 카렐린 강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두 사내는 서로 지그시 노려보며 멀어져 간다.

    벌써부터 인간과 리자드맨들 사이에는 서로 멸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오크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현실에서 인종, 국적 간의 모든 차별과 갈등을 없애고 게임에서 새로운 차별과 갈등을 만들겠다는 뎀 사의 의도대로 잘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한편.

    “어진아. 이제는 뭐 할 거야?”

    인벤토리가 빵빵해진 윤솔이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마을로 가서 황금을 처분해야지. 너무 갑자기 다 처분하면 시장 질서가 흐트러지니 조금씩.”

    하지만 빠른 시일 안에 처분해야 하는 것은 맞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게임머니의 환율은 낮아지니까.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드레이크가 윤솔의 질문을 이었다.

    “황금을 처분한 뒤에는? 그 후에는 무엇을 하나?”

    나는 그가 무슨 대답을 원하고 있을지 얼추 감이 잡힌다.

    그동안 겪어 온 바에 의하면 드레이크는 언제나 더 험난하고 새로운 도전을 원한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물었다.

    “…혹시 또 일일 퀘스트 노가다를 한다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예전에 커피농장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기억이 떠오른 모양.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드레이크의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고정 S+등급 몬스터를 잡을 거야.”

    다소 넘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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