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19화 (319/1,000)

320화 Show me the money (3)

사금(砂金).

모래 속에 섞여 있는 미세한 금들을 가리킨다.

이 사금들을 채취하기 위한 도구로 ‘패닝 접시’라는 것이 있다.

1. 소용돌이 같은 홈이 패여 있는 넓은 접시의 중앙에 돌과 모래, 사금이 섞인 흙을 놓고 주방세제 한두 방울을 떨군다.

2. 그 후 접시에 물을 반쯤 채워 원을 그리며 천천히 흔들면 원심력(遠心力)에 의해 무거운 불순물들은 죄다 접시의 밖으로 튕겨져 나가게 된다.

3. 입자가 고운 금 알갱이와 약간의 불순물들은 접시 바닥에 패인 소용돌이 홈에 걸려 결국 금 함유량이 높은 알갱이들만 접시 중앙에 모이게 되는 것이다.

결국 빙글빙글 회전하는 힘을 이용해 불순물들을 걸러내고 순도 높은 금을 골라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       *       *

“……간만에 옛날 생각나는데 이거?”

나는 눈을 감은 채 씨익 웃었다.

‘눈 감고도 잡는다’ 콘셉트.

게임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나는 ‘우는 천사’라는 몬스터를 만난 적이 있다.

인터넷의 괴담 커뮤니티에서 한창 핫했던 괴물, 우는 천사.

잠시라도 시선을 떼면 공격해 온다는 괴기스러운 설정 탓에 드라마 소재로까지 진출한 몬스터이다.

이 우는 천사는 메두사라는 괴물로 진화하게 되는데 이 또한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이다.

우는 천사에게 시선을 떼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다면 메두사에겐 그 반대로 시선을 마주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한테는 해당 사항 없지.”

나는 눈을 감은 채 피식 웃었다.

콰쾅!

둔하게 휘둘러지는 고르딕사의 주먹을 몇 번 피한 뒤, 뒤이어질 ‘진짜’ 공격에 대비한다.

[오-오오오오!]

고르딕사는 황천으로 돌아가 사금의 늪에 몸을 담근 뒤 물에 젖은 개처럼 전신을 털기 시작했다.

퍼퍼퍼퍼펑!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 방울들이 펄펄 끓는 상태로 퍼부어졌다.

엄청난 광역에 퍼지는 화상 데미지!

…철퍽! …철퍽! …철퍽! …철퍽! …철퍽! …철퍽!

온 세상 천지에 사람 머리통만한 황금 대포알들이 쇄도한다.

그것도 하나같이 액체 상태로 펄펄 끓고 있는!

드레이크와 윤솔은 실눈을 뜬 채 나를 바라보며 경악했다.

“세상에! 무슨 탄막슈팅게임도 아니고!”

“꺄악! 저런 걸 어떻게 피해!”

최후의 드워프인 벨럿 역시도 이를 악문 채 주먹으로 바닥을 쳤다.

[제기랄! 나도 저 공격에 모든 동료들을 잃어야만 했어! 저것은 상대할 방법이 없다고!]

…그러나.

“1.e4 e5, 2.f4 exf4, 3.Bc4 Qh4+, 4.Kf1 b5.”

나는 눈을 감은 채 쇄도하는 황금 포탄들을 모조리 피해 버렸다.

퍼펑! 펑! 퍼펑!

뒤에서 폭발하는 황금의 파편들을 등진 채, 나는 계속 앞과 옆을 지그재그로 활주했다.

“…5.Bxb5 Nf6, 6.Nf3 Qh6, 7.d3 Nh5, 8.Nh4 Qg5.”

내가 스텝을 밟을 때마다 황금 포탄들은 나를 모두 빗겨가 아슬아슬한 범위 내에서 터지고 있었다.

고르딕사의 어그로는 100% 나에게만 쏠리고 있었다.

바위 뒤로 피한 드레이크와 윤솔은 나를 쳐다보며 입을 딱 벌렸다.

“어, 어진. 번역기 고장 난 것 같은데….”

“…그렇다기엔 우리 말은 제대로 들리는데요?”

드레이크와 윤솔은 경악한 표정으로 나의 플레이를 바라본다.

심지어 NPC인 벨럿조차도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편.

나는 계속 혼자 중얼중얼거린다.

“1.e4 e5, 2.f4 exf4, 3.Bc4 Qh4+, 4.Kf1 b5, 5.Bxb5 Nf6, 6.Nf3 Qh,6 7.d3 Nh,5 8.Nh4 Qg5, 9.Nf5 c6, 10.g4 Nf6, 11.Rg1 cxb5, 12.h4 Qg6, 13.h5 Qg5, 14.Qf3 Ng8, 15.Bxf4 Qf6, 16.Nc3 Bc5, 17.Nd5 Qxb2, 18.Bd6 Bxg1, 19. e5 Qxa1+, 20. Ke2 Na6, 21.Nxg7+ Kd8, 22.Qf6+ Nxf6……”

아, 정신 나갔냐고?

그럴 리가.

물론 번역기의 오류도 아니다.

이것은 ‘체스’의 기보였다.

[우-어어어어!]

고르딕사는 황천의 늪에서 용트림을 하며 다시 한번 탄막 슈팅을 준비했다.

내 기억에 의하면 놈이 쏘아 보내는 무수히 많은 황금 대포알들은 대상이 된 한 명의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반경 십 수 미터를 체스 판으로 인식한다.

어그로를 제일 많이 끈 유저를 체스의 폰으로 인식하고는 체스말의 패턴으로 거리를 좁혀오는 탄막들.

이것을 기보로 문자화, 수치화하는 규칙은 다음과 같다.

백의 왼쪽 아래를 기준점으로 잡고 세로 열은 좌측에서 우측으로 알파벳 a에서 h까지.

가로 열은 아래에서 위로 아라비아 숫자 1에서 8까지를 조합하여 표기한다.

가령, 좌측 상단의 귀는 백이고 a8이다. 그러니 우측상단의 귀는 검은 칸으로 h8.

체스의 말들은 이니설로 표기한다.

킹은 K, 퀸은 Q, 비숍은 B, 나이트는 N, 룩은 R, 폰은 P로 표기할 수 있다.

말이 이동한 것은 해당 말의 이니셜과 움직인 자리의 좌표를 더해 표기한다.

예를 들어 Ke2는 킹이 e2칸으로 이동했다는 것이고 e5는 폰을 e5칸으로 이동했다는 뜻이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고르딕사의 체스 말들을 슉슉 피해가며 씩 웃었다.

“자, 보라구. 나는 이미 첫 공격을 받은 직후 간파했어. 다음 기보 패턴은 Be7#겠지. #는 체크메이트를 뜻하니 여기서 큰 것을 한 방 날려 올 거야. 이크! 위험할 뻔했군. 내 말이 맞지? 체스 기보를 좌표화해서 외운 뒤 그대로 움직이기만 한다면 피하는 것은 쉽지.”

내 말을 들은 윤솔과 드레이크는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나, 나는 그냥 방어막으로 막아 볼게.”

“음. 이건 들어도 이해 못 하겠군. 어진, 너는 제정신이 아니다. 병원에 가 보는 게…….”

“…그래도 어쩐지 좀 멋있지 않아요?”

“…너도 같이 가 봐라.”

나는 윤솔과 드레이크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사실 고르딕사의 공격 패턴이 체스 룰에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는 다음에 어떤 공격이 이어질지 알 수 없다.

내가 이토록 고르딕사의 공격을 완벽하게 예지할 수 있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딥 러닝’

수많은 데이터를 군집화하고 분류하여 일정한 패턴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

2016년에 한창 핫했던 알파고의 기술이 대표적인 예이다.

역사에 존재했던 수많은 바둑 유저들의 기보와 데이터를 한데 모았던 바둑 인공지능의 총체.

이처럼 딥러닝은 수많은 상대의 패턴들을 학습해 그것을 차곡차곡 모아 누적 데이터로 승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르딕사의 경우에는 지금껏 플레이어를 상대해 본 경험이 전무하다.

첫 클리어(First Clear).

고르딕사에게 도전하는 것은 내가 첫 번째로 그 전에는 어떠한 도전자도 없었다.

따라서 고르딕사의 딥러닝은 아직 아무것도 배운 적이 없는 순수한 상태.

즉, 학습량의 누적치가 경미한 수준인 것이다.

“…예전에 씨어데블 때도 그랬지.”

나는 눈을 감은 채 고르딕사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 내며 중얼거렸다.

고르딕사의 AI는 플레이어를 상대해 본 경험이 없기에 체스계에서 가장 유명한 명승부를 바탕으로 정석적인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1851년 6월 21일. 아돌프 안데르센(Adolf Anderssen)과 라이오넬 키세리츠키(Lionel Kieseritzky)가 펼쳤던 명승부, 일명 ‘임모탈 게임’

고르딕사는 순수한 백지 상태에서 이 임모탈 게임의 기보를 바탕으로 한 공격패턴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콰콰콰쾅!

고르딕사가 쏘아보내는 황금의 대포알들은 각각 킹(K), 퀸(Q), 비숍(B), 나이트(N), 룩(R), 폰(P)이 되어 날아든다.

그 패턴은 내가 기보에 반하는 움직임을 하지 않는 한 항상 일관되어 있었다.

“이제 체크메이트(#)다.”

나는 깎단을 움켜쥐고 앞으로 나섰다.

비숍(B).

나는 온 힘을 다해 대각선으로 점프했고 그대로 e7의 좌표로 내달렸다.

고르딕사의 가슴팍을 향한 곳이었다.

콰쾅!

나는 그곳에 열십자 모양의 깊은 홈을 패 놓았다.

[…그우우욱!]

고르딕사는 무방비 상태에서 데미지를 입자 크게 놀랐는지 허둥지둥거린다.

바로 지금이었다.

“놈이 스턴에 걸렸다! 갱, 아니 한타 타이밍이야!”

내가 말하자 드레이크와 윤솔, 벨럿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어진아! 너는 대체 이런 기상천외한 걸 어떻게 아는 거야!?”

“어차피 물어봐도 안 알려 준다! 그럴 시간에 한 대라도 더!”

윤솔과 드레이크는 잽싸게 나의 양 옆으로 와 붙었다.

그리고.

쾅! 쾅! 쾅! 쾅! 퍽! 퍽! 퍽! 퍽!

다들 눈 감고 벌벌 떨었던 것이 억울했는지 고르딕사를 열심히 쥐어 팬다.

나 역시도 계속해서 고르딕사에게 말뚝 데미지를 박고 있었다.

“돈 내놔, 새끼야!”

고르딕사는 몸을 뒤틀며 황금을 뿜어냈지만.

“필요 없어!”

나는 그것을 피해 가며 계속해서 데미지를 넣었다.

결국. 황금을 뿌려 대던 고르딕사가 정말로 화가 났다.

[우오오오오오오!]

놈의 공격 패턴이 변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전신에서 한 번에 뿜어져 나오는 대포알!

그것은 마치 온 세상을 꽉 메워버리려는 듯 빽빽하다.

드레이크는 온 시야를 가득 매운 탄막들을 보며 입을 딱 벌렸다.

“오래 전에 했던 ‘벌레 공주’라는 게임이 생각나는군. 그 게임의 최종 보스도 탄막을 저렇게 뿌리던데…….”

아까 설명했던 바와 같이 체스의 기보로 따지면 #######…….

‘무한대로 체크를 부를 수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상대방이 막거나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엄청난 공격.

…하지만!

“아, ‘퍼페츄얼 체크’ 아시는구나! 진.짜.겁.나.어.렵.습.니.다.”

나는 한 게임 유저의 명대사를 패러디하며 깎단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는 뒤를 향해 소리쳤다.

“내 뒤로 일렬로 서!”

운솔이 제일 먼저 쪼르르 달려왔고 그 뒤에 드레이크, 그 뒤가 벨럿이었다.

나는 빈틈없이 쏟아지는 황금 탄막들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중 가장 구석에 있는 작은 탄막을 향해 돌진했다.

뻐-억!

나는 그 탄막에 정통으로 맞아버렸다.

마치 건물을 철거하는 스틸볼에 피격당한 듯한 느낌!

순식간에 시야가 붉게 물든다.

우지지직-

묵직한 물리 데미지가 내 전신을 햄버그 반죽 으깨듯 두들겼다.

더불어 끔찍한 화상 데미지까지!

대격변 이후에 등장한 몬스터라서 그런가, 과거 상대했던 씨어데블의 점액탄과는 데미지 수준이 천양지차다.

나는 앙버팀 특성 덕에 HP 1의 상태로 겨우 살아남았다.

“아앗!? 어진아 괜찮아!?”

“어진! 피할 수 있는 것 아니었나!?”

윤솔과 드레이크가 깜짝 놀랐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슈슈슈슈슉-

나는 처음에 탄막에 피격당한 이후 단 한 번도 다른 탄막에 맞지 않을 수 있었다.

황금 대포알들은 절묘한 각도로 나를 빗겨나가 다른 곳으로 날아간다.

HP가 1뿐이 남지 않았지만 힐이나 포션 따위는 필요 없었다.

나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솔과 드레이크에게 말했다.

“보통 탄막 슈팅 게임은 아무리 복잡한 탄막 패턴이라고 해도 어디든 피할 틈이 있고 꼭 피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지. …하지만 가끔은 일부러 맞아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고.”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미래의 수많은 고인물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정리해 놓은 것들을 그대로 답습하여 외운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이것이 집단지성의 힘이다!’

나는 비틀거리는 고르딕사를 향해 속으로 외쳤다.

그것을 본 윤솔이 뒤에서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우와, 멋있다.”

드레이크는 그런 윤솔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그때.

[이봐, 너희들!]

NPC 벨럿이 내 옆으로 이동해 왔다.

호감도가 올라가서일까? 그녀의 말투는 어쩐지 젊어져 있었다.

고르딕사와 싸우며 그간의 해묵은 세월들을 어느 정도 털어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벨럿은 난처한 듯 물었다.

[피하는 재주는 제법 용하다만… 이래서야 싸움이 안 되잖아?]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였다.

우리는 고르딕사의 공격을 모두 피해 내고 있었고 고르딕사는 데미지를 입으면 황천으로 돌아가 사금을 몸에 덧발라 HP를 회복한다.

이래서야 레이드가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질 것이 뻔했다.

하지만.

“걱정 마. 이제부터가 진짜니까.”

고르딕사의 공격을 봉인했으니 이제 우리의 공격이 먹혀들게 할 일만 남았다.

나는 두 팔을 걷어붙였다(알몸이었지만).

그리고 황천의 중앙에서 사금이 섞인 진흙을 온몸에 처덕처덕 덧바르고 있는 고르딕사를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사금(砂金) 발라내는 것의 진수를 보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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