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16화 (316/1,000)
  • 317화 카타콤 (4)

    “닥후지.”

    닥치고 후자.

    나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아니 금과 곡식 중에 고르라면 당연히 금 아닌가? 이게 고민할 거리가 되나?

    ‘10억 받기 vs 고자 되기’

    마치 이 정도의 밸런스를 보는 느낌이다.

    무조건 뒤의 것이 압도적으로 좋지 않은가!

    내 말을 들은 윤솔은 배시시 웃으며 나를 나무랐다.

    “에이, 너무 현실적이다. 이럴 때는 곡식을 골라야지.”

    “맞다 어진. 너는 동화적 감수성이 부족하군.”

    드레이크 역시도 윤솔의 말에 맞장구치며 나를 나무랐다.

    ‘나는 그냥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세계관에 따라 말했을 뿐인데….’

    현실은 황금만능주의 세상 아닌가.

    여기서 황금을 택하겠다는데 왜 나를 속물 취급하는 거야.

    “아니, 이걸 좀 보라고.”

    나는 시야 구석에 인터넷 창을 띄워 쌀과 금의 가격을 비교해 주었다.

    -네*버쇼핑

    √ 낮은 가격 순 *높은 가격순 *등록일 순 *리뷰 많은 순

    레고표 밟은쌀 20kg - 39,800원.

    소라게표 미래쌀 20kg - 48,710원.

    베베꼬인표 쇼미쌀 20kg - 51,000원.

    .

    .

    …어디보자.

    음, 쌀이 20킬로그램에 약 5만 원쯤 하는군.

    그렇다면 금 시세를 볼까?

    국내 금 시세(매매기준율 ₩/g)/ *월 *일/ 18:00/ ***회차

    1g=42,192.57 원 (전일대비 ▼581.73 등락율 -1.36%)

    계좌(고객입금 시): 42,614.49 원

    계좌(고객출금 시): 41,770.65 원

    실물(고객이 살 때): 44,302.19 원

    계좌(고객이 팔 때): 40,082.95 원

    기준 국제 금 시세: 1,183.47 달러

    기준 원 달러 환율: 1,109.00 원

    20kg=843,851,400 원

    (※매매기준율 기준)

    .

    .

    “…금이지.”

    “…금이네.”

    윤솔과 드레이크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쌀이 20kg에 5만 원이고 금이 20kg에 8억 5천만 원 정도니까 대충 17,000배 정도가 차이나는 건가?

    그러니까 투표권을 가진 꼬마에게 내걸었던 두 정령왕의 공약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의 차이인 셈.

    “가이악사가 아주 나쁜 정령이네. 어딜 순진한 마을 사람들을 꼬시려고…요즘 FTA다 뭐다 쌀값 폭락 때문에 아주 난리인데….”

    나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들은 건지 만 건지, 벨럿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가이악사는 산에 있는 모든 풀들을 곡식으로 바꿔 준다고 했고 고르딕사는 산에 있는 모

    든 돌과 흙들을 금으로 바꿔 준다고 했지. 나의 선택은…….]

    내가 보기에는 같이 비빌 수도 없을 정도로 밸런스 붕괴가 심한 두 선택지였지만 벨럿한테는 그게 아니었는가 보다.

    이윽고.

    벨럿의 기억이 우리의 앞에 천천히 영상화되기 시작했다.

    *       *       *

    “가이악사 님에게 한 표요!”

    벨럿.

    이 작은 인간 소녀는 해맑게 외쳤다.

    보리밭에 부는 바람, 황금빛으로 물든 평야, 곡식 볶는 구수한 내음을 사랑했던 한 소녀의 결정이었다.

    그녀가 입을 떼는 순간 회관에 모인 마을 사람들의 절반은 웃고 절반은 탄식했다.

    사아아아아…

    보리밭이 웃기 시작했다.

    그것은 곡식의 정령 가이악사가 지어 보이는 푸근한 미소였다.

    바람이 불자 보리잎이 한 방향으로 흔들린다.

    마치 밭 안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뛰노는 것처럼, 바람 그림자들이 보리와 보리 사이를 맑고 시원하게 달리고 있었다.

    밝은 양광이 보조개처럼 패인 완만한 능선과 골짜기를 따라 곳곳에 바삭하다.

    산 곳곳에 봄 날씨가 찾아왔다.

    고대 정령 가이악사는 오랜 시간 동안 인간들을 보듬어 온 보답을 받았다.

    정령왕이 된 가이악사는 자애로운 미소로 인간들의 축하에 화답했고 그의 권능에 의해 마을을 감싸고 있는 모든 산의 식물들은 탐스럽고 아름다운 과일과 곡식으로 변해 갔다.

    척박한 황무지들은 순식간에 젖과 꿀이 흐르는 농토로 바뀌었다.

    삶은 콩을 심어도 싹이 날 정도로 생명력 가득한 옥토가 된 것이다.

    먹지 못하는 독초는 고소한 벼와 보리가 되었다.

    떫고 신 맛이 나는 열매들은 달고 즙이 풍부한 과일로 변했다.

    마른 땅에서는 맑은 물이 퐁퐁 솟아났고 곰팡이만 가득했던 음침한 계곡, 골짜기에는 밝은 햇살이 내려앉는다.

    버섯은 고기를 먹는 게 아닐까 착각이 정도로 통통하게 살이 올랐고 채소 역시 한 사람이 채 뽑지 못할 정도로 크고 풍성해졌다.

    이로운 벌레와 짐승이 도처에 가득하게 되었고 물웅덩이마다 보기 좋게 살찐 물고기들이 바글거렸다.

    마을 사람들은 비옥하고 풍요롭게 변한 마을의 풍경을 보며 안도했다.

    그리고 인간과 본질적으로 더욱 가까운 것을 고른 어린 소녀의 혜안을 칭송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풍족했다.

    …문제는 정령왕이 되지 못한 고르딕사였다.

    ……오잉!? ‘고대 정령 고르딕사’의 상태가……?

    -축하합니다! ‘고대 정령 고르딕사’는(은) ‘암흑 타락 정령 고르딕사’(으)로 진화했다!

    고르딕사.

    그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황금과 보석을 안겨 주었던 광물의 정령.

    그는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돌보아 준 마을 사람들의 배신에 격노했다.

    세계를 뒤덮은 전쟁의 광기로부터 유일하게 자유로웠던 마을은 이날부로 혼돈의 중심이 되었다.

    황금 정령 고르딕사는 고대로부터 지켜 왔던 상급 정령으로서의 긍지를 악마에게 팔아 버렸다.

    정령왕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허탈함과 분노가 담긴, 실로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그것은 그의 수행이 정령왕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깊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결과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세력을 불려 ‘죽음룡 오즈’와 겨룰 수 있을까 고민하던 ‘악마성좌 마몬’은 기꺼이 고르딕사의 타락을 받아들였고 그날부로 지저에 도사리고 있는 그의 악마 군단에는 아주 강력한 타락 괴물 하나가 가세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몬에게 정령족으로서의 고귀한 자존심을 넘긴 대가로 강력한 힘을 얻은 고르딕사는 자신을 제치고 정령왕이 된 가이악사에게 무시무시한 악의(惡意)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고대서부터 힘과 긍지, 지혜를 쌓아 온 상급 정령 가이악사, 아니 이제는 정령왕 의 힘을 가지게 된 가이악사는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여 고르딕사에게 맞섰다.

    땅 위, 곡물들의 생명 에너지로부터 힘을 얻는 가이악사.

    땅 밑, 광물들의 욕망 에너지로부터 힘을 얻는 고르딕사.

    가이악사는 땅 위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마을 주민들을 위해, 그리고 땅에 관련된 한 엄청난 탐욕과 야심을 드러내는 마몬과 그 수하로 전락한 고르딕사를 막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고대 정령왕의 힘으로도 악마의 개로 전락한 타락 정령의 힘을 막을 수는 없었다.

    현세 최강의 지배종인 악마.

    그리고 그 악마들 중에서도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만큼 까마득한 상석(上席)에 올라 군림하는 존재, 악마의 일곱 성좌(星座)들!

    그리고 그 일곱 악마성좌 중에서도 모든 ‘탐욕’과 ‘지하광물’을 지배하는 악마성좌 마몬.

    그 마몬의 힘을 뒤에 업은 고르딕사는 정령왕조차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던 것이다.

    악마의 애완견이 된 고르딕사는 붕괴하는 몸과 정신을 이끌고 가이악사를 공격했다.

    가이악사는 자신을 정령왕으로 만들어 준 은인들을 위해 고르딕사를 맞아 싸웠다.

    두 거대 정령의 힘겨루기는 장장 일곱 밤낮에 걸쳐 이루어졌다.

    산이 주저앉고, 다시 솟고, 또다시 무너지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그 기나긴 인고의 시간 끝에, 승자와 패자는 명확하게 판가름 났다.

    가이악사는 모든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두 눈이 뽑힌 채 대균열(大龜裂) 깊은 곳에 못 박혔다.

    마을 근처에 있던 모든 곡창지대는 황무지로 변해 버렸다.

    채소와 과일들은 전부 다 말라 비틀어졌고 이내 썩어 문드러졌다.

    곡식들은 불타 버렸고 샘과 시내는 토사에 짓이겨졌다.

    짐승들은 떠나거나 죽어 버렸다.

    산이 무너져 마을을 뒤엎었고 용암과 유황이 터져 나와 그 위를 휩쓸었다.

    정령왕 자리에 오른 가이악사는 모든 것을 잃고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곳에서 쓸쓸하고 비참하게, 그리고 고독하게 소멸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가이악사를 정령왕으로 추대했던 마을 사람들과 그들을 향한 고르딕사의 무시무시한 분노였다.

    마을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황금빛 눈동자.

    그것은 부글부글 끓는 증오로 인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공포의 대왕, 아득한 절망의 시작점과도 같은 모습.

    한낱 인간의 몸으로 저 갈 곳 명확한 분노를 어찌 감내할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겁에 질려 머리를 조아린 앞에, 고르딕사의 마지막 선고(宣告)가 내려졌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도저히 정령이 내는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무서운 목소리.

    그것이 이제는 까마득한 지저갱이 되어 버린 마을에 울려 퍼졌다.

    고르딕사의 원한 어린 눈빛을 마주한 인간들은 저마다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무릎 꿇었다.

    눈부신 황금빛에 눈이 부서진 사람들.

    그들은 눈이 먼 채로 쓰러졌고 이내 전신이 황금과 보석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뼈는 황금이 되고 살은 진흙이 되었으며 가죽은 무쇠가 되었다.

    눈으로 보되 볼 수 없었고 살갗으로 느끼되 느낄 수 없었다.

    맑은 물은 사치였고 태양빛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저주를 피할 수 있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마을에서 가장 늙은이부터 가장 어린 아이까지 전부 다 저주의 크고 작은 표적일 뿐이었다.

    고즈넉했던 마을이 하루아침에 한 줄기 광맥(鑛脈)으로 전락한 채 억만 겹의 토사에 파묻혀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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