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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315화 (315/1,000)
  • 316화 카타콤 (3)

    제한시간에 딱 맞춰 보자기 유령의 HP가 0이 되었다.

    60초 뒤, 보자기 유령의 옷이 벗겨지며 그 안의 내부가 공개되었다.

    […누가 나를 함부로 깨우느냐?]

    보자기 속에서 등장한 것은 약 1미터 30센티미터 정도의 키를 가진 한 여자였다.

    그녀를 보는 순간 나와 윤솔, 드레이크는 모두 자리에 멈춰 섰다.

    작은 키였지만 환상적인 비율, 볼륨감 있는 몸매의 여자.

    호수와 같이 푸른 눈을 제외한 얼굴의 구성요소들은 하나같이 다 작고 오밀조밀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는 잡티 하나 없었고 갈색의 윤기마저 흐른다.

    하지만 그녀의 외모를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래도 코 밑과 턱에 길고 덥수룩하게 자라난 수염이었다!

    <최후의 드워프 ‘드머프 벨럿’>

    벨럿. 그녀는 우리에게 줄기차게 얻어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상처를 입지 않은 것처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것은 그녀의 몸이 둔중한 중장비로 보호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만났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 있는 드워프를 바라보았다.

    겉보기에는 젊은 여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나이가 아주 많다.

    저 멋진 머스탱 콧수염이 그것을 증명한다.

    윤솔이 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어진아. 드워프가 뭐야?”

    “으음. 톨킨이 북구 신화에서 모티프를 얻어 창작한 소인족인데…이 게임에서도 비슷해. 지하의 광물을 잘 다루는 특별한 종족이야. 뭐 지금은 멸종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나는 벨럿을 예의주시하며 말했다.

    원래 보자기 유령의 속에서 나타나는 NPC는 종족마다 제각기 다르다.

    리자드맨의 경우에는 나가(Nāga)라는 반은 뱀이고 반은 인간인 종족이 등장하고 오크의 경우에는 고블린이 등장한다.

    나는 인간 종족이었기에 드워프가 등장한 것이다.

    쿵!

    벨럿은 자신의 주먹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건틀릿을 뻗었다.

    차라라락-

    그러자 지금까지 길에 떨어져 있던 금화들이 모두 그녀의 손아귀 안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처 줍지 못한 골드들을 회수하는 것이다.

    “아아…….”

    드레이크는 금괴와 보석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며 아쉽다는 듯 탄식했지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짜 대박은 지금부터 시작이기 때문이다.

    드워프 NPC 벨럿은 우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몽유병이 있어서 종종 묘지 외곽까지 배회하기도 하지. 보아하니 나를 깨워 준 것은 그대들인 것 같구나.]

    그녀는 사례를 하겠다며 우리를 자신의 보금자리로 안내했다.

    황금으로 된 카타콤의 가장 깊숙한 곳. 그러니까 황천의 유극 2층 최심부에 그녀가 거주하는 공간이 있었다.

    작은 방처럼 움푹 파인, 굴에 가까운 구덩이.

    너저분한 가죽떼기와 깎다 만 금속 조각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잠자리로 보이는 공간은 그녀의 체형에 맞게 곳곳이 움푹움푹 들어가 있었는데 막상 보기에는 톱밥이 잔뜩 깔려 있는 것처럼 푹신해 보였지만 만져 보면 전부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 부스러기였다.

    벨럿은 굴의 구석을 뒤지더니 몇 가지 물건을 황금 쟁반에 담아 내왔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고 있는 그릇.

    안에는 유황이 녹아든 지하수와 막 담금질해 뻘건 금괴가 올라가 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시게.]

    그녀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드워프는 황금과 다이아몬드를 먹고 유황과 수은을 마시며 사는 종족.

    그들의 뼈는 금이나 은으로 되어 있고 살은 진흙, 가죽은 무쇠로 이루어져 있다.

    눈은 루비나 사파이어, 에메랄드, 토파즈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그들이 평소에 먹는 음식은 우리는 먹을 수 없는 것들이다.

    벨럿은 생긋 웃으며 우리에게 뜨거운 황금을 권했다.

    [많이들 들게나. 인간들은 금을 좋아하니….]

    이거 뭐라고 거절해야 하나? 못 먹는다고 하면 먹지도 못할 거 뭐 그렇게 좋아하냐고 핀잔이 돌아올 것 같은데….

    호감도를 위해서는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해야 했다.

    “아. 저희가 저녁을 먹고 와서요.”

    […아직 오후 4시인데?]

    “어제 오늘 치 저녁까지 미리 먹었어요.”

    나는 말을 마치며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전에 리자드맨 잡화상을 처치하고 얻은 수은이었다.

    수은이 담긴 병을 본 벨럿은 눈을 반짝였다.

    [오오, 이것은 수은이 아닌가? 여기서는 귀한 물건인데.]

    그녀는 기본 좋다는 듯 수은을 받아들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착한 어린이들은 절대 따라하지 말 것!)

    수은을 마신 벨럿의 눈이 약간 몽롱하게 풀렸다.

    아마 인간에게 알콜이 작용하는 것과 비슷한 메커니즘인 듯싶었다.

    그녀는 사파이어로 된 눈을 반짝인다.

    수심이 가득한 그녀의 눈은 수심 깊은 호수처럼 어두운 청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쯤 해서 윤솔이 내가 시킨 질문을 했다.

    “왜 이런 곳에 혼자 계시나요?”

    사실 나로서는 별로 궁금하지 않은 질문이다.

    벨럿의 사연을 알기보다는 빨리 여기 있는 황금들을 캐서 나가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경.

    하지만 그따위 망발을 내뱉었다가는 벨럿의 도끼에 몸이 두 동강으로 쪼개질 수 있기에 아직은 눈치를 봐야 한다.

    나는 잠자코 벨럿의 말을 듣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벨럿은 드워프답게 성격이 괄괄하고 직설적이어서 대화가 빙빙 겉도는 일은 없었다.

    [후후. 그렇겠지. 나처럼 몇 백 살 밖에 되지 않은, 한창 때의 아름다운 수염을 가진 젊은 여자가 이런 곳에 혼자 있으니 궁금해 할 법도 해.]

    벨럿은 자신의 터질 것 같이 풍만한 콧수염과 길고 쭉 뻗은데다가 군살 하나 없이 매끄러운 턱수염을 강조하며 말했다.

    그녀는 이내 게츰스레한 눈으로 나와 윤솔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이곳에서 묘지기를 하고 있다네.]

    그 말에 윤솔과 드레이크는 눈을 크게 떴다.

    사실 아까부터 얼추 짐작하고 있기는 했다.

    드워프는 금이나 은으로 된 뼈 위에 진흙 살, 무쇠 가죽을 두르고 다니는 종족.

    이 카타콤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황금의 뼈들은 아마도 드워프들의 것이리라.

    그리고 그것은 벨럿의 NPC명인 ‘최후의 드워프’라는 수식어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윽고, 벨럿의 푸른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녀는 알루미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벽을 쓰다듬었다.

    황금으로 된 뼈다귀 굴, 루비로 이루어진 횃불.

    [이들은 전부 나의 부모이자 형제, 친우들이라네.]

    오래 전 존재했던 드워프 마을의 현주소다.

    모든 드워프들이 죽은 뒤 혼자 살아남은 그녀는 아직까지 이 거대한 지하묘지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무려 지저 4만 미터의 아득한 갱도 속에서, 수백 년 동안이나, 홀로!

    윤솔은 그런 벨럿을 보며 안타깝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는 벨럿의 손을 잡아주고 싶어 했지만 부글부글 끓으며 떨어지는 알루미늄 눈물 때문에 그것은 다소 어려운 일이었다.

    최후의 드워프 벨럿.

    그녀는 이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먼 옛날. 평화로운 마을이 하나 있었지.]

    그녀는 울음을 그치고는 수은 한 잔을 쭉 들이켰다.

    그 후 은빛 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작고 철없는 아이도 하나 있었어.]

    이야기가 벌써 길어질 조짐을 보인다.

    나는 지루함을 느끼고 슬쩍 눈알을 굴려 벨럿의 대사 자막 옆에 있는 [SKIP] 버튼을 흘낏거렸다.

    하지만 이내 내 팔뚝을 찰싹 때리는 윤솔과 드레이크에 의해 나의 스킵 시도는 물 건너갔다.

    아무래도 내 동료들은 벨럿의 이야기에 꽤 흥미를 가지고 있는가 보다.

    벨럿은 아련한 눈빛으로 과거를 더듬는다.

    [마을은 항상 풍족했다네. 농사는 항상 잘 되었고 금고에는 금화가 넘쳐났어. 이것은 마을을 돌보아 주는 두 정령의 힘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었지.]

    고대의 지배종 중 하나인 정령.

    현세의 정령들은 많이 약해졌지만 고대에서부터 살아온 몇몇 정령들은 아직도 꽤나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

    …용과 악마의 애완동물로 전락해 버린 존재들 또한 부지기수였지만 말이다.

    [우리 마을을 돌보아 주는 고대 정령은 둘이었어. 하나는 곡식의 정령 ‘가이악사’였고 다른 하나는 황금의 정령 ‘고르딕사’였지.]

    가이악사는 곡식을, 고르딕사는 금화를 주었다.

    먹고 소비하는 것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풍요로운 시대였다.

    [세상 밖은 강력한 괴물들의 전쟁으로 늘 시끄러웠지. 옆 나라에서 지혜롭기로 소문났던 솔로몬 왕조차도 타락해 버리더군. 하지만 우리 마을에서는 그런 것 따윈 알 바 아니었어. 그 태평성대가 영원할 줄로만 알았지.]

    하지만 이 지하묘지의 수많은 해골들을 본 이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평화는 영원하지 않았다.

    벨럿은 얼굴 가죽을 한번 쓱쓱 문질렀다.

    [어느 날, 마을을 돌보아 주던 두 정령이 크게 싸웠어. 사정을 들어보니 인간들에게 오랜 은혜를 베푼 두 정령 중에서 오직 한 정령만이 그간의 공덕을 인정받아 정령왕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더군.]

    오랜 세월 동안 두 정령의 도움을 받아온 인간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한쪽은 그동안 먹을 수 있는, 소중한 곡식을 주었다.

    다른 한쪽은 그동안 다른 마을보다 우월하게 지낼 수 있는, 화려한 금화를 주었다.

    인간들은 서로 맹렬하게 대립했다.

    당장 먹을 수 있는,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곡식을 원하는 이들.

    그리고 황금을 원하는 이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렸다.

    […결국. 사람들은 투표를 하기로 했지.]

    벨럿은 수은을 채워 넣은 물담배를 피우며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슬픔으로 가득하던 표정은 어느덧 몽롱하게 풀린 상태다.

    선거는 사흘 밤낮으로 치러졌다.

    곡식과 황금이 엎치락뒤치락 대결한다.

    인간의 생존에 더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토론 역시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결과는 동표였어. 비긴 거야.]

    벨럿은 웃었다.

    곡식과 황금 중 무엇이 더 삶에 필요한 것인가.

    인간들은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 선택권은 마을에서 제일 어렸던 한 소녀에게 돌아오게 되었지. 그 아이를 제외하면 모두 이미 투표를 한 상태였기도 하고… 또 편견이 없는 어린아이라면 인간에게 조금 더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알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어.]

    벨럿은 뿌연 연기를 내뿜었다.

    은색 연기는 어둠에 젖은 황금에 닿아 흐리게 번진다.

    [마을을 돌보아 주던 두 정령은 최후의 투표자가 된 소녀를 향해 말했다네.]

    ‘나를 골라라. 온 산의 잡초들을 전부 곡식으로 바꾸어 주겠다.’

    ‘나를 골라라. 온 산의 돌멩이들이 전부 황금으로 바뀔 것이다.’

    윤솔과 드레이크는 숨을 죽인 채 벨럿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내.

    벨럿의 입이 열렸다.

    [자네들이라면 누구를 택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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