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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312화 (312/1,000)
  • 313화 황금광 시대 (5)

    ‘젠장. 빌어먹게도 걸렸군.’

    카렐린 강은 복부를 관통한 화살을 뽑아내며 생각했다.

    …모든 것은 남대륙 최외곽 ‘그레이 시티’에서 시작되었다.

    그레이 시티의 변방에 우뚝 솟은 ‘살인자들의 탑’

    그곳에 흉악한 빌런 하나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막 퍼지고 있을 때였다.

    카렐린 강은 그 빌런을 퇴치해 달라는 그레이 시티 시장의 퀘스트를 받아 살인자들의 탑으로 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빌런은 홀몸이 아니었고 꽤나 강력한 부하들을 산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탑 공략에 실패한 카렐린 강은 믿을 수 있는 친구들 열한 명을 모아 다시 한번 그레이 시티로 향했다.

    살인자들의 탑은 이미 악당들의 소굴로 아지트화 되어 있었고 공략을 위해서는 철저한 자료 수집이 필요했다.

    탑 주변에 매복하여 틈을 노리던 중, 그는 악당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우연히 엿들을 수 있었다.

    ‘세상에! 우리가 손을 잡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나나 너희나 결국 같은 처지 아닌가. 이용당하다가 버려진.’

    ‘이제부터 뭘 할 거야?’

    ‘푸스스스! 모든 것은 클로즈 베타에서 했던 것과 같이. 나는 복수를 원해.’

    ‘미친놈 같으니. 어떻게 하게?’

    ‘글쎄. 일단 가볍게 1차 대격변부터 시작해 볼까?’

    ‘…그렇다면 천공섬으로 가야겠군.’

    ‘도깨비 출신이라 그런가 역시 이야기가 빠르네.’

    ‘그곳으로 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는데. 물론 너도 알겠지?’

    ‘‘터미널’ 말야?’

    악당들의 대화는 단순히 엿듣는 것만으로는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미래를 구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카렐린 강은 악당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인지 정도는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동대륙에 있는 거대한 싱크홀 ‘어비스 터미널’

    악당들은 이곳을 다음 타깃으로 정한 것 같았다.

    ‘천공섬에 대격변이라…뭔지는 모르겠지만 큰 일이 날 것 같군.’

    놈들의 음모를 막아야겠다는 생각 반, 이놈들을 추격하다 보면 뭔가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반.

    카렐린 강을 포함한 열두 명의 플레이어들은 비밀리에 악당들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막상 어비스 터미널에 도착한 악당들은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어이, 이거 원래 메꿔져 있었던가?’

    ‘미친! 어떤 놈이 운석을 건드린 거지!? 이럴 리가 없는데….’

    ‘클로즈 베타를 한 놈이 더 있는 건가?’

    ‘모르겠어. 내가 알기로 클베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네가 유일해.’

    ‘애먼 놈이 천공섬으로 갔겠군.’

    ‘…짚이는 놈 있어?’

    ‘푸스스스! 하나 있긴 있는데 그 놈이 맞을런지는 몰라. 혹시 대격변까지 일으키지는 않겠지?’

    ‘그것은 절대 불가능하지. 수많은 돌발 상황에서 언제나 정답을 고르기란 쉽지 않으니까.’

    ‘혹시 모르는 것 아닌가?’

    ‘확률이 아예 없다고는 말 못하지. 오랑우탄이 아무렇게나 피아노 건반을 누르다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할 정도의 확률이랄까.’

    ‘…아무튼 가능성이 있기는 있다는 소리군.’

    악당들은 평지로 변해 버린 어비스 터미널을 한참 동안이나 맴돌다가 각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3.21,91) 다시 만나지.’

    기묘한 숫자들을 언급한 뒤에 말이다.

    카렐린 강은 그것이 좌표값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뒤 해당 좌표 근처에 숨어 대기했다.

    함께한 동료들은 모두 현실에서도 끈끈한 우정으로 이어져 있는 이들.

    이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인간 플레이어였던 그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뒤쫓던 악당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게 웬걸?

    악당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갑작스러운 대규모 업데이트가 이루어지며 그들은 전부 게임에서 튕겨 버렸다.

    긴 대기 끝에 다시 게임에 접속하자 그들이 있던 황무지는 지하 4만 미터의 엄청난 심연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연의 바닥에 위치하게 된 열두 명의 플레이어들은 위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계속 근처를 배회했다. (3.21,91)이라는 숫자 하나만을 믿고서.

    그리고 그 기나긴 인고의 시간 끝에 이 커다란 금광의 입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해서 발견한 금광인데! 절대로 양보 못 한다!”

    “조금 비겁하지만…어쩔 수 없지. 미안하다.”

    “우리는 조국을 위해 할 일이 있단 말이다!”

    침통한 표정의 카렐린 강을 제외한 다른 열한 명의 리자드맨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1:1 약속을 깨고 전장에 개입했다.

    그리고 카렐린 강을 몰아붙이던 드레이크를 역으로 포위해 버렸다.

    …그러나.

    “이것들 봐라?”

    놈들을 따라 전장에 개입한 나에 의해 상황은 다시 뒤집어진다.

    나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리자드맨들을 향해 씩 웃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리자드맨들은 겁을 먹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난다.

    하지만 싸움을 포기할 생각은 없는지, 놈들은 드레이크를 향해 겨눈 손톱을 물리지 않고 있었다.

    유명인은 이래서 피곤하다.

    놈들은 나의 전투 스타일이 도트 데미지를 이용한 근접 전투 스타일인 것을 아는지라 거리를 벌려 놓은 채 드레이크를 인질로 잡고 있었다.

    나는 꽤나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

    내가 아무리 이동속도가 빠르다지만 드레이크를 포위하고 있는 리자드맨들의 손톱보다 빠르지는 않다.

    사실상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놈들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는 수밖에는.

    …만약 내 뒤에 윤솔이 있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파팟!

    윤솔은 내가 신호를 보내자마자 바로 신성불가침 특성을 발동했다.

    “커헉!?”

    “으악!”

    “쉬익!”

    열두 마리의 리자드맨들은 헛바람을 토해 냈다.

    그것을 본 나는 씩 미소 지었다.

    ‘역시, 요즘 세상에 ‘어둠’ 특성 하나 안 달고 다니는 플레이어들은 없지.’

    대격변 이후 어둠 속성을 가진 몬스터들이 부쩍 많아졌다.

    플레이어들 역시 호칭이나 아이템 쪽에서 어둠 성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둠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만큼, 당연히 윤솔의 유일한 특성인 신성불가침이 점점 더 빛을 발하게 될 수밖에 없다.

    환한 보호막에 닿은 리자드맨 몇몇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간다.

    멀쩡한 녀석들도 있었지만 그런 놈들은 제법 멀찍하게 떨어져 있는 상태.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이브했다.

    “…비키라고 했지?”

    나는 달려드는 리자드맨 두 명의 주먹을 받아낸 뒤 반사 데미지로 날려 버렸다.

    그리고 뻣뻣하게 굳어 있던 드레이크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은 뒤 암벽을 박차고 내가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마비에 걸리지 않은 몇몇 리자드맨들이 앞으로 나섰다.

    굳어 있던 놈들도 인벤토리에서 마비 치료제 주사를 맞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지 하나는 굉장하다.

    하지만.

    스릉-

    내가 허리춤에서 깎단을 꺼내들자 리자드맨들의 기세는 단번에 사그라들었다.

    나는 씩 웃으며 깎단을 그들에게 디밀었다.

    “…이게 뭔지 알지?”

    나를 상징하는 성명절기.

    여기에 찔리고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나 이렇게 변변한 치료수단도 없는 오지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오싹-

    내가 무력을 드러내자 리자드맨들은 시선을 떨궜다.

    맹수나 괴물을 대하는 것이 아닌, 마치 치명적인 전염병을 대하는 것 같은 공포.

    머리가 있다면 물러나는 게 답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결국 리자드맨들도 기세를 꺾었다.

    “…….”

    카렐린 강은 배에 난 구멍을 포션에 적신 솜으로 메꾼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공포와 경외감이 짙게 배여 있다.

    한편 드레이크는 눈살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저놈들은 여기서 죽여 놔야 후환이 없을 것 같다.”

    그는 쇠뇌에 화살을 건 채 당장이라도 쏠 듯한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런 드레이크를 만류했다.

    “음. 평소라면 나도 그랬겠는데…이번만큼은 아니야.”

    “……?”

    “리자드맨들을 죽이는 것보다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지.”

    나는 눈을 감고 잠시 미래를 그려 보았다.

    그것은 확신을 가지고 하는 투자가 아니라 감(感)으로 하는 도박에 가깝다.

    고인물 특유의 어떠한 감 말이다.

    나는 드레이크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준 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위 아래에 있는 리자드맨들을 향해 땅에 글씨를 썼다.

    “?”

    리자드맨들은 내가 보내는 메시지를 보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땅에 적힌 뜻은 간단명료했다.

    ‘Watch Dog or Dead.’

    나는 지금 모종의 이유로 던전을 지키는 ‘문지기’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와치독’이 되거나 아니면 죽거나.

    내 메시지를 읽은 모든 리자드맨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내, 전장의 모든 시선이 한 곳을 향해 쏠렸다.

    “…….”

    그곳에는 카렐린 강이 서 있었다.

    이것은 내가 카렐린 강, 아니 ‘슬리핑 독’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나는 지금 이 리자드맨들을 고용하려는 것이다.

    언제고 뒤통수를 칠 준비가 되어 있는 이 이종족들을!

    그러자 드레이크와 윤솔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이자들을 살려 두겠다고? 약간 발암일 것 같은데…괜히 찝찝하게 후환을 남겨 놓는 것 아닐까?”

    “방금 전에도 1:1 약속을 깨고 배신했잖아. 금광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다 들여보내 주면 어떻게 해?”

    이것은 흡사 몬스터를 믿겠다는 것과도 같다.

    리자드맨과 인간은 같은 플레이어라도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공탁도 걸리지 않고 카르마 수치도 적용되지 않는다.

    배신이나 PK를 막을 어떠한 수단도 없는 마당에 던전의 수문장을 시키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심지어 카렐린 강조차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너희 이후로 던전에 들어가려는 자들을 막으라는 건가? 우리가 배신할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하나?

    하지만, 나는 그저 생글생글 웃을 뿐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맡기는 거야.”

    사람됨을 보고 믿는다든가, 싸우다 보니 우정이 싹텄다든가, 눈에서 진실성이 엿보인다든가….

    나는 그따위 멍청한 말들은 믿지 않는다.

    다만. 내가 그들에게 시킬 문지기는 일반적인 문지기와는 조금 다른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신의가 없는 녀석들일수록 더욱 잘 수행할 수 있는 포지션.

    나는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금광 안에서 나오는 인간들은 모두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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